새로운 캐릭터 전성시대
몇 년 사이 광고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눈에 띄게 늘었다.

나이키 캠페인에 등장한 지소연 선수. 이 광고는 온라인 SNS를 통해 #위대한챌린지, #위대한페스티벌 등 스포츠와 문화가 어우러진 이벤트로 확산했다.
2019년, “내가 바꾸고 있는 건 여자 축구의 내일이 아니야. 축구의 미래야”라는 카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광고가 있다. 현재 영국 최상위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 중인 축구 선수 ‘지메시’ 지소연(첼시 레이디스)의 나이키 광고다. 한국의 빨간색 국가 대표 유니폼을 입은 모습을 멀리서 보고 남자로 착각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키의 단독 모델이 된 것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도 많았다. 프로 선수들과 함께한 글로벌 광고에도 출연했는데, 소수의 아시아계라 뿌듯하다는 호평이 이어졌다.
나는 이 광고가 노출된 당시에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뒤이어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지는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우리의 힘을 믿어’ 시리즈에는 눈이 갔다.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는 내용의 캠페인이다. 여기엔 쇼트트랙 선수 심석희를 비롯해 소위 ‘망가지는 분장’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예능인 박나래와 항상 파워풀한 무대를 보여주는 가수 청하, 세계 정상에 도전하는 골퍼 박성현이 등장했다. 그러고 보니 여성 캐릭터의 뻔한 묘사를 깨는 다른 광고도 다시 보였다. 배우 김서형, 가수 김윤아, 예능인 송은이가 등장한 맥주 광고(스텔라 아르투아, 2019)도 여느 30, 40대가 할 법한 미래에 대한 고민과 선후배 간 격려를 그려 온라인에서 한 달 만에 350만 뷰를 기록했다. 긴 생머리의 청순한 여성이 등장하는 소주 광고도 이제 보기 어려우려나?

디올의 ‘WE SHOULD ALL BE FEMINISTS’ 티셔츠. 페미니스트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가 발표한 에세이집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알다시피 물건이나 서비스의 판매고를 높이는 것이 광고의 목적이고, 오늘날 광고는 더욱 정교한 타깃 설계를 바탕으로 배포한다. 게다가 미디어 역사상 확실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광고를 노출하는 매체의 대상이 다양해졌다는 것. 스마트폰 앱을 쓰면서 승인한 GPS 위치 추적 기능과 검색 기록이 내가 지금 찾는 동네의 분양 광고를 골라 포털 첫 화면에 띄워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대형 마트의 카트 손잡이나 지하철 문 입구, 스마트폰 첫 화면까지 틈새 곳곳에서 수많은 이미지와 메시지에 노출된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광고의 힘이 커졌고, 우리는 피하기 어려워졌다.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인 광고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캐릭터는 결국 우리 사회가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인간상에 대한 척도가 된다. 또 그것이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한다. 그래서 다음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펨버타이징(femvertising). 2010년대 중반, 광고 홍보계에 등장한 페미니즘(feminism)과 광고(advertisement)의 합성어다. 기존 사회에서 ‘성 평등’을 주제로 하는 광고를 일컫는다. ‘미투(#metoo)’ 운동의 촉발과 더불어 인식이 높아진 개념이기도 하다. 이 말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 위해 광고에서 그리는 여성 캐릭터와 소비자 반응의 변천부터 잠시 짚어보자. 1974년 미국에서 신용기회평등법이 의회에 통과되기 전까지 여성들은 신용카드를 만들 수 없었다. 남편이 공동 사인한 기혼자만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었고, 혼자가 되면 때로 도서관 출입 카드도 발급받기 어려웠다. 당연히 파스텔 톤 세제 광고엔 전업주부만 등장했고, 1970~1980년대 히피의 상징 같은 폭스바겐의 미니버스조차 판매할 당시에는 아이들을 축구 교실에 데려다주기 좋은 ‘사커 맘’의 패밀리 카로 추천했다. 1988년, 선두 기업이던 유럽 브랜드 리복에 대항해 시작한 나이키의 ‘Just do it’ 캠페인도 광고 회사의 전략이었다. 스포츠가 남성의 취미라고 여기던 당시, 여성과 청소년을 소비자로 끌어들이기로 한 것이다. 누구나 운동화를 신고 뛸 수 있지만, 그땐 이 사실을 세상에 콕 집어 알려야 했다.

육아휴직 중인 아빠를 묘사한 현대 아반떼 광고의 한 장면. 편향된 성 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렉서스와 볼보는 신차 개발 시 개발팀의 남녀 비율을 맞추기도 한다.
이후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준 광고는 도브의 리얼 뷰티 캠페인(2004)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던 여성의 미(美)에 대한 관념에 정면 도전했다. 다양한 인종의 평범한 사람들을 모델로 보여주면서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 것. 광고엔 날씬하고 완벽한 메이크업을 한 여성은 없었다. 논란도 많았다. “너의 곱슬머리를 사랑해라(#LoveYourCurls)”,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아름답다(Real beauty sketches)” 같은 솔직한 화법에 누군가는 거부감을 보이기도, 울컥하기도 했다. 이후 P&G의 ‘여자답게’(Always #LikeAGirl, 2014) 캠페인도 지금까지 6억8000건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P&G 브랜드 위스퍼는 조사를 통해 50%의 여성이 초경을 시작하는 10~12세 이후 자신감을 크게 잃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특히 크면서 듣는 ‘여자답게’라는 말은 인격 형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주목해 여성으로서 여자답다는 건 수동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광고로 보여줬다. 광고 속 목소리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성인에 이르는 남녀를 불러놓고 각각 ‘여자답게’ 움직여보라고 주문하는데, 사회적 편견이 적은 어린 나이일수록 그 모습이 다르지 않다. 예닐곱 살쯤 된 여자아이는 여자답게 움직여보라는 말에 ‘최대한 빠르게 뛰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곧장 뛰어간다.

위스퍼 ‘여자답게’ 광고. 2017년 칸 국제광고제에서는 유엔여성기구(United Nations Women)와 협약해 P & G, 유니레버, 존슨앤존슨 등 20개 글로벌 대기업이 광고 및 미디어 내 성 고정관념을 없애자는 동맹을 맺었다.
그사이 한국에도 변화가 없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단순했다. 1990년대 초·중반 ‘산소 같은 여자’ 이영애는 범인을 잡기 위해 뛰는 형사이자 커리어 우먼이었고, 짧은 머리의 신은경은 X세대를 대변했다. 2010년대 후반에는 가족의 건강을 고민하는 식품 광고에 장인·장모와 사위가 같이 등장했고, 운전하며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가 아파트나 자동차 광고에 등장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광고를 만들고 송출을 결정하는 이들의 세대와 인식이 바뀐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이노션 임다운 AE는 “그동안 회의실에서는 언제나 ‘왜 연인을 픽업하러 가는 사람은 항상 남자로 그려질까?’, ‘손주 보는 재미 말고 다른 재미로 사는 할머니를 그릴 수는 없을까?’, ‘세컨드 카는 집안일 하는 여자가 탄다는 건 옛말 아닌가?’ 하는 의문이 오갔어요. 이제는 자동차 광고에서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는 대신, 동시대적 감수성으로 삶을 그려내는 데 목표를 두기로 했습니다.”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고 또래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주차장으로 뛰어가는 할머니들이 등장한 올봄 현대 아반떼 광고의 탄생 배경이다. 디올이나 구찌, 베트멍 같은 패션 하우스에서도 특정 성별을 뚜렷이 드러내지 않는 컬렉션을 이제는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업에 있는 광고인은 여전히 아쉽다. HS애드 신숙자 CD는 아직까지 한국 광고, 특히 화장품이나 다이어트 보조제 광고에서는 의식의 변화가 미미하다고 말한다. “외모 관리를 위한 제품 광고에서는 셀레브러티 모델의 힘이 강합니다. 외려 주체적 여성보다는 부드러운 남성이나 화장하는 남성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지죠.” 여성의 전유물로 여기던 화장품 광고 세계에 남성 아이돌과 모델의 기용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작가이자 문화비평가로 20년 넘게 페미니스트 관점으로 미디어를 살펴온 앤디 자이슬러는 저서 <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우리가 지금 감탄하는 ‘주체적 여성’을 그린 광고를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주체적 여성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이 무조건 평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오로지 물건을 팔기 위해 여성 운동을 이용하는 장치에 현혹될 수 있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광고에 등장한 우리 자신, 즉 캐릭터의 색다른 모습이 등장할 때면 스스로 냉철한 기준을 가지고 보는 수밖에. 광고나 브랜드는 사회적 인식과 편견을 개선할 의무가 없지만, 먼저 시사점을 제시한다면 그 또한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하나의 방식이란 점만은 분명하고, 이것을 기꺼이 응원해주면 된다. 결국 한 세대의 문화와 인식은 우리 눈에 자주 노출되고 또 공감할수록 사회적 동의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국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어느 때보다 인간 평등에 대한 문제가 뜨거운 지금, 디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가 만든 ‘WE SHOULD ALL BE FEMINISTS’ 티셔츠를 보면서 다시금 바란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독자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있다고 해서 오로지 이 옷을 여성 운동의 관점으로만 보지 않는 너른 시각의 소유자이길!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