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로 말하다
해마다 이맘때면 ‘올해의 컬러’를 선정해 발표하는 ‘팬톤’. 팬톤이 선택한 컬러는 1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다. 팬톤이 지금 같은 공신력을 얻기까지.

1 팬톤이 ‘2017 올해의 컬러’로 선정한 ‘그리너리’는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2 세상엔 수많은 색상이 존재한다.
지금 여기를 1960년대의 한 출판사 사무실이라고 가정해보자. 출판사 직원은 잉크 제조업자에게 전화를 걸어 “크림색으로 인쇄해주세요”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자신이 주문한 색깔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본 출판업자는 망연자실한다. 같은 크림색을 말하면서도 둘이 머릿속에 떠올린 색상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을 수밖에. 하지만 2017년 올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버터크림 컬러를 원한다면 간단하게 ‘11-0110 TCX’ 혹은 ‘11-0110 TPG’라는 버터크림 컬러의 고유번호를 전달하면 된다. 컬러 산업에서 세계적 권위를 지닌 기업 팬톤(Pantone)의 로런스 허버트(Lawrence Herbert)가 색채의 기준을 세운 덕분이다. 팬톤은 1963년 색상에 숫자를 붙여 분류한 팬톤 컬러 매칭 시스템(PMS)을 선보이며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로런스 허버트는 현재 은퇴했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팬톤은 1만 가지가 넘는 색상에 각각 고유번호를 선사하고 색채를 체계적으로 세분화할 수 있었다. 미국 뉴저지주 칼스태드에 본사를 두고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에 지점을 둔 팬톤은 이때부터 60년 가까이 컬러 커뮤니케이션 분야를 선도해왔다.
이제 팬톤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표준 색채 언어다. PMS 덕분에 제조업체나 디자이너가 직접 만나 색깔을 일일이 대조하지 않고 컬러만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 이 시스템의 탄생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와 출판·인쇄업계의 작업이 훨씬 수월해진 건 당연지사. PMS는 그래픽 디자인과 출판뿐 아니라 섬유, 디지털 테크놀로지, 건축, 패션, 도료, 음식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궁무진한 영역으로 퍼져나갔다. 스타벅스의 2018년 플래너는 팬톤과 협업해 다양한 컬러의 다이어리를 선보였으며, 데이즈도 얼마 전 팬톤 컬러를 활용한 액세서리 라인을 소개했다.

색상의 만국 공용어가 된 팬톤의 컬러 칩.
하지만 팬톤의 진가는 해마다 이맘때쯤 발휘된다. 팬톤이 2000년부터 매년 ‘올해의 색’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와 산업 분야의 트렌드가 될 컬러 하나를 발표하기 때문. 매년 12월이면 온 세계가 팬톤을 주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분기마다 트렌드 컬러도 10개씩 발표한다. 2016년엔 팬톤 최초로 ‘로즈 쿼츠’와 ‘세레니티’ 두 가지 컬러를 선정, 당시 유행에 민감한 패션과 대중문화 관련 업계가 앞다투어 두 색상을 활용한 화보와 앨범 커버 디자인 등을 선보였다. 올해는 ‘그리너리’를 선정, 대자연의 울창함을 보여주는 컬러로 소비자에게 활력을 선사했다는 평을 얻었다. 당시 그리너리를 발표하며 팬톤이 밝힌 “현대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자연의 본질적 아름다움과 고유성에 몰입하려는 갈망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도시계획, 라이프스타일, 일상생활에서 그리너리가 점차 확장될 겁니다”라는 말처럼, 그리너리는 사회 전반에 안락함을 선사하며 그 힘을 퍼뜨렸다.
어찌 보면 사설 기업이 제시한 컬러 트렌드일 뿐인데 이다지도 높은 파급력을 지니는 이유가 뭘까? 첫째로,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팬톤이 손을 뻗친 영역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회사의 제품 개발과 브랜드 아이덴티티 등에 영감을 주는 존재 이상으로 팬톤은 이 세상의 모든 컬러를 규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미국의 유명 아이스크림 브랜드 벤 앤 제리(Ben & Jerry)의 브라우니 컬러를 정의했고, 미국 국기 속 레드, 고속도로 경고 사인 속 옐로에 각각 193번과 116번이라는 고유 번호를 부여 했다. 로런스 허버트는 와인뿐 아니라 혈액 샘플의 컬러 차트에도 힘을 보탰다. 그는 몇 년 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신이 세계를 창조하는 데 7일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8일째 되는 날, 신은 팬톤이 온 세상을 컬러로 수놓게 했습니다”라고.

3 컬러풀한 독일 건축이 삭막한 도시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4 팬톤의 컬러로 만든 백열등. 5 팬톤의 182번 라이트 핑크 컬러 를 입힌 텀블러.
둘째로, 세계적 컬러 전문가이자 17년째 팬톤 컬러 인스티튜트의 전무이사로 일하는 리트리스 아이즈먼(Leatrice Eiseman)에 대한 업계의 신뢰 또한 만만찮다. ‘올해의 컬러’를 선정하는 핵심 인물이면서 10권이 넘는 색채 전문 서적을 집필한 리트리스 아이즈먼과 동료들은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1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패턴과 트렌드를 꾸준히 살핀다. 그리고 올해의 컬러 런칭 4개월 전부터 본격적인 선정 과정을 시작한다. “컬러는 이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합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죠. 올해의 컬러 선정에 참여하는 모든 전문가는 뛰어난 예술가를 주시하고, 컬러의 심리적 효과를 조사합니다. 시각을 넓히고 광범위한 영역을 전망하기 위해 팀원 전원이 여행도 많이 다니죠. 컬러를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는 단서와 지표를 가능한 한 전부 찾아 나섭니다. 패션, 예술, 엔터테인먼트 등 전 영역을 둘러보고, 개막을 앞둔 세계적 스포츠 행사와 개최 도시, 대중문화, 사람들이 선호하는 여행지를 훑어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찾는 거죠. 소비자의 요구에 들어맞는 컬러를 예측해야 하니까요”라는 그녀의 말처럼, 팬톤은 삶에서 컬러가 미치는 영향력을 믿고 더욱 정확한 예측을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그들의 노력만큼이나 그리너리를 이을 올해의 컬러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만 간다. 12월 11일, 팬톤이 ‘2018 올해의 컬러’ 세미나를 열어 올해의 컬러를 발표한다. 그동안 절대 스포일러가 될만한 단서를 공개하지 않은 리트리스 아이즈먼이 방한한다. 새로운 컬러를 찾아 패션, 뷰티, 홈 인테리어, 디자인에 맞게 변환하는 방법을 제시할 뿐 아니라 올해의 컬러를 선정하는 내부 과정도 알려준다. 이미 세미나의 모든 좌석이 매진됐지만 관계자는 추가 예매가 있을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홈페이지나 카카오톡 플러스 친구를 수시로 주시할 것. 설사 참여하지 못하더라도 팬톤 홈페이지의 메일링 리스트에 등록해두면 발표 결과를 빨리 알 수 있으니 아쉬워하지 말자.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제공 팬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