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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어울려 빛났던 파리

ARTNOW

지난여름, 파리에선 쟁쟁한 아티스트들의 새로운 만남이 눈길을 끌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재건하기 위한 가고시안 갤러리의 전시와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마주한 특별한 발레 공연에서다.

1 카타리나 그로스의 ‘Untitled’(2017).
2 레이철 화이트리드의 ‘Untitled(Notre- Dame)’(2019).

가고시안 갤러리의 노트르담을 위한 전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T. S. 엘리엇의 시는 2019년에도 유효했다. 지난봄, 전 세계인은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 Cathedral)의 하늘 가까이 솟은 첨탑에서 피어오른 불꽃과 자욱한 연기를 실시간으로 지켜봐야 했다. 건축 기간만 무려 200년, ‘12세기 고딕 양식의 극치’라 칭송받으며 무려 800년 동안 한자리를 지킨 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notre-dame’이라는 단어를 마치 고유명사처럼 품은 파리, 아니 프랑스의 대표 아이콘이다. 그곳에 쌓인 시간의 궤적만큼이나 수많은 예술 작품과 문화 전반에 끼친 영향도 지대하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 모네·피카소·마티스의 그림에,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에 고스란히 새겨진 대성당의 모습을 이제 더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신디 셔먼의 ‘Untitled’, (2002~2008).

쉽사리 잡히지 않은 불길만큼 안타까움도 쌓인 덕분인지, 화재 발생 2주 만에 약 85억 유로의 기부금이 모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소실된 부분의 복원을 위해 뜻을 모았다. 뉴욕을 중심으로 파리, 런던, 홍콩, 제네바 등에서 활동하는 갤러리스트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도 힘을 보탰다. 그는 “가장 널리 알려진 파리와 프랑스의 상징물 중 하나인 노트르담의 재건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소속 아티스트들을 모아 판매 수익금 전액을 기부하는 < An Exhibition for Notre-Dame >전을 마련했다.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ndreas Gursky), 무라카미 다카시(Takashi Murakami), 신디 셔먼(Cindy Sherman), 에드워드 루샤(Edward Ruscha) 등 28명의 작가가 기꺼이 작품을 내놓았고, 그중 일부는 특별히 신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영국 출신 예술가 레이철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노트르담 대성당의 옛 모습이 담긴 두 장의 엽서에 다양한 크기의 동그란 구멍을 뚫어 만든 ‘Untitled(Notre-Dame)’이 대표적이다. 작품 운송업체부터 전시 디자이너까지 많은 이들이 ‘기부’ 형식으로 선의의 전시에 동참했지만, 워낙 급박하게 꾸려진 탓일까. 쟁쟁한 아티스트들의 명성에 비해 나온 작품 대부분 소품인 데다 면면 또한 아쉽다. 그럼에도 이 전시를 통해 작품을 소장하게 되는 이들은 앞으로 새로 태어날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의 일부에 기여하는 셈이니 이보다 뜻깊은 수집의 명분은 찾기 힘들 것이다.

< Tree of Codes >의 공연 장면. 사진만으로는 언뜻 각기 다른 작품처럼 보일 만큼 무대 디자인과 구성이 매우 뛰어나다.

동시대적 아름다움에 관한 무대
지난 6월 26일부터 7월 13일까지 파리 오페라 바스티유(Opera Bastille)에서 선보인 공연 < Tree of Codes >를 놓칠 수 없었던 이유는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을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영국 현대무용계의 빅 네임,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가 안무를, 북유럽 출신 아티스트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이 무대미술을, The XX의 리더 제이미 XX(Jamie XX)가 음악을 맡았다니! 2015년 ‘맨체스터 국제 페스티벌(Manchester International Festival)’에서 초연했을 때부터 “때로는 별 다섯 개도 부족하다”, “즐거운 감각의 과부하” 등 극찬을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은 2018/2019년 시즌을 맞아 다시 무대에 올랐다. 4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새로운 감각을 일깨우는 까닭은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복합적인 실험과 상상에 있을 것이다.
우선 < Tree of Codes >는 발레 작품이기 전에 ‘한 권의 책’이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Jonathan Safran Foer)가 2010년에 발표한 이 비범한 책은 1942년 나치가 살해한 폴란드 작가 브루노 슐츠(Bruno Shulz)의 < The Street of Crocodiles >가 원전이다. 포어의 책은 페이지마다 몇몇 문장과 단어가 적힌 부분의 종이를 파내거나 아예 면 전체를 삭제해 만들었다. 그래서 자체로 하나의 페이퍼 오브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읽는 사람의 시선이 곳곳에서 툭툭 끊기게 되고 이는 완전히 새로운 문맥을 창조하는 느낌을 준다. 여기에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맥그리거의 안무가 완성됐다. 음악을 맡은 제이미 XX 역시 이 텍스트를 전자음악 멜로디로 ‘번역’해 일종의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시각적으로 몰입감 넘치는 배경을 탄생시킨 올라푸르 엘리아손은 자신의 주특기인 ‘빛’과 ‘거울’을 동원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며 직선과 곡선이 공간을 구획하고 뒤섞이는 과정을 통해 관람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무는 연출은 어떤 면에선 이 예술가의 거대한 설치 작품이나 형형색색의 만화경 내부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 Tree of Codes >의 공연 장면. 사진만으로는 언뜻 각기 다른 작품처럼 보일 만큼 무대 디자인과 구성이 매우 뛰어나다.

사실 문학과 시각예술, 춤이 하나 된다는 개념으로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일렉트로닉 음악과 무용의 만남도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장르의 구분을 넘어 그것을 실현하는 차원에서 < Tree of Codes >를 통해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서로 만날 수 없는 시간들이 포개지고, 분절과 삭제를 거친 막연한 의미들이 맥락 없이 연결되는 모습이다. 죽음과 생 사이에 놓일 수많은 코드, 암시와 암시가 이어지는 와중에 그것을 살아 있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힘은 결국 무용수들의 몸짓이다. 스튜디오 웨인 맥그리거와 파리 오페라 발레 단원들이 합심해 만들어낸 춤은 때론 고대 조각상이 잠에서 깨어난 듯 클래식하고, 때론 장 폴 구드(Jean-Paul Goude)의 사진처럼 일사불란하며,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1982)처럼 계시적이다.
다소 보수적인 프랑스 발레 팬들은 엘리아손의 무대에는 극찬을 아끼지 않으면서 상대적으로 음악이나 안무가 아쉽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하지만 낯선 음악과 영리한 안무 없이 배경이 홀로 돋보일 순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 시도가 충돌하며 튀어 오른 섬광은 가히 ‘동시대적 아름다움’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에디터 김미한(purple@noblesse.com)
이가진(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