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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반과 춘향이

LIFESTYLE

대담하고 실험적인 연출로 이름난 세계적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과 우리만 잘 안다고 믿어온 ‘춘향이’ 얘길 나눴다.

파리 오페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등 세계 무대에서 연극과 오페라를 넘나들며 활약하고 있는 안드레이 서반이 11월 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하는 국립창극단 신작 창극 <춘향가>의 연출을 위해 서울에 왔다. 창극의 세계화를 위해 국립극장 내 국립창극단이 추진 중인 ‘세계 거장 시리즈(World Master’s Choice)’ 작품 중 하나다. 일흔한 살의 외국인 연출가는 우리의 춘향이를 사랑의 이상을 믿는 ‘영웅’이라 표현했다.

태어나 처음 들은 판소리는 어떠했나요? 포르투갈 전통 음악 파두(fado)처럼 들렸습니다. 둘의 물리적 거리는 멀지만, 감성은 어딘가 비슷하죠. 난생처음 듣는 신기한 소리였음에도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국립창극단에서 당신에게 <춘향가> 이전에 <흥부가>의 연출을 제안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데 <흥부가>는 재미없다고 거절하셨다고요. <흥부가>를 거절한 건 개인적 선택이었습니다. 두 작품 다 훌륭했지만 <춘향가>에 좀 더 끌렸죠. ‘심히 한국적이지만은 않다’라는 게 <춘향가>에 대한 첫인상이었습니다. 전 한국적 작품을 올리려고 여기 온게 아닙니다. 한국적 작품은 한국 연출가가 저보다 훨씬 잘 만들겠죠. 전 한국인과 다른 시각으로 본, 이전에 없던 <춘향가>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여기 온 겁니다.
<춘향가>의 어떤 부분이 <흥부가>보다 덜 한국적이었나요? <춘향가>는 사랑이라는 이상을 믿는 일종의 ‘영웅’ 이야기였습니다. 춘향이는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죠. 우린 지금 이상과 영웅을 잃고 회의주의에 빠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춘향이 같은 영웅이 필요합니다.
창극은 한국에서 비인기 장르입니다. 심지어 젊은 친구 중엔 그게 뭔지 모르는 이도 있고요. 혹시 작품에 쓸 ‘비장의 무기’ 같은 게 있나요? 작품의 그림이 어느 정도 나온 후에야 그게 뭔지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사실 지금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공연이 임박했을 때 작품에서 조금 떨어져, 작품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그때 저와 배우 모두 작품을 납득할 수 있다면, 그건 필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될 겁니다.
무대에서 영상을 적극 활용한다던데, 영상을 쓰는 이유는 뭔가요? 관객에게 배우의 연기 외에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영상이 또 하나의 언어인 셈이죠. 영상은 무대 위 연기와는 다른 양상으로 흐르기도 합니다. 가령 춘향이 감옥에 갇힌 신에서, 배우의 모습과 달리 영상 속 춘향이는 흰머리에 주름 진 모습입니다. 관객은 영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 생각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죠. 전 이 작품이 극과 영상의 융합을 실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창극에 영상이라, 외국인 연출가라서가 아니라 확실히 다른 무대가 나올 것 같긴 합니다. <춘향이> 연출을 결정하기 전, 여러 편의 창극을 영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모든 작품에 한국적인 것이 담겨 있었죠. 하지만 그것들은 제가 다룰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하면 일종의 ‘클리셰’가 될 게 불 보듯 뻔했죠.
작품에서 향단이 역을 아예 삭제하셨습니다. 그 또한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서인가요? 향단이는 춘향이만큼이나 한국인에게 친숙한 캐릭터입니다. 향단이는 적어도 제겐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방자와의 로맨스도 중간에 끊기고, 원작에서도 어느 순간 소식을 알 수 없는 캐릭터로 나오죠. 그리고 작품을 현대식으로 고치다 보니 향단이는 제 공연에서 더더욱 필요 없는 존재가 됐습니다. 정치가의 아들몽룡은 돈이 많아 방자 같은 비서를 둘 수 있는데, 가난한 춘향이가 향단이를 비서로 두는 건 어딘가 말이 안 되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해학적 요소는 버리지 않으셨겠죠? 물론입니다. 판소리엔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비극과 희극이 교차합니다. 얼마 전, 무대에 설 배우들과 즉흥 연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전 그들에게 <춘향가>의 전통적 텍스트는 지우고 오늘날의 상황에 맞게 즉흥으로 <춘향가>를 표현해달라 했죠. 대사와 연기가 낯선 데다, 극 특유의 풍자적 상황 때문에 웃겨서 혼났습니다. <춘향가>에서 유머가 차지하는 부분은 중요합니다.
그간 서양의 많은 고전을 남다른 시각으로 현대화했습니다. 왜 연극이 현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연극은 지금 이 순간 무대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100년이나 500년 전도 아니고, 심지어 5분 전도 아니죠.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만약 관객과 무대 위 배우들 사이에 직접적 연결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 작품은 죽은 거나 다름없습니다. 제 얘긴, 굳이 고전에 모던한 외관을 씌우자는 게 아닙니다. 고전과 현대극 사이에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는 얘기죠. 무대 위에서 시간은 멈춥니다. 우린 늘 그 틈에(고전과 현대극의 연결 고리) 있어야 합니다.
그간 ‘스타일’을 갖지 않는 연출을 지향한다고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스타일을 갖지 않으려는’ 그 시도 자체가 스타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스타일은 제게 감옥과 같은 겁니다. 마치 ‘넌 인생을 어떤 스타일로 사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죠. 옷차림이나 행동에는 스타일과 취향이 필요하지만, 예술에서 스‘ 타일’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게 하는 하나의 어휘로 작용할 뿐이죠. 스타일의 나쁜 점이 바로 그겁니다. 사람들이 그 스타일을 존경해버리면, 그는 늘 같은 걸 다시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영어권 국가 출신인 당신이 현장 연출에서 가장 애먹는 건 역시 ‘언어’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 질문을 들으니, 몇 해 전 일본의 연습실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 전 한 유명 배우의 연기가 흡족하지 않아 그에게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했죠. 그러자 현장에 있던 이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일본어도 모르는 제가, 그 배우가 제대로 연기하지 않는 걸 알아본 거에 놀란 거죠. 사실 연출 할 때 언어는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닙니다. 배우들의 몸과 움직임에서 그들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니까요.
당신의 불같은 성격에 대해 말하는 글을 여러 편 읽었습니다. 심지어 스태프들도 당신을 꺼린다고요. 궁금합니다. 연출가의 절대적 권위가 연극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믿는지 말입니다. 전 자아 도취와 허영심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연극은 집단 예술이니까요. 집단의 모든 구성원이 성공적인 무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죠. 전 배우에게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게 나쁩니까? 배우들은 평범해선 안 됩니다. 평범한 배우는 여러모로 위험하죠.
50여 년 전인 대학생 때 첫 연극 연출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가치관이 있나요? 지금 전 20대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정치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너무도 많은 ‘미국’을 발견하며 그렇게 됐죠. 물론 예전과 같이 여전히 바뀌지 않은 가치도 있습니다. 바로 ‘호기심’과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세계적 연출가인 당신도 아직 못 이룬 꿈이 있나요? 매일 새로 시작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습니다. 가장 중요한 꿈을 아직 못 이뤘고, 여전히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내년에도 물론 바쁘게 공연을 올리시겠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극 한 편을 연출할 겁니다. 루마니아에서도 몇 가지 프로젝트를 해야 하고요. 물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극 수업도 계속 해나갈 겁니다.

안드레이 서반 (Anderi Serban)
루마니아 출신의 재미 연출가로 연극과 오페라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다. 새롭고 혁신적인 연출로 이름난 그는 세계적 권위의 ‘보스턴연극비평가협회상’과 ‘루마니아 우수문화상’ 등 주요 연극상을 휩쓸기도 했다. <아가멤논>, <벚꽃 동산>, <트로이의 여인들>이 대표작. 특히 <트로이의 여인들>은 1997년 뉴욕 라마마(La MaMa) 극단 소속 배우들을 데려와 우리나라에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1993년까지 루마니아 국립극장에서 총연출가를 역임했고, 미국 예일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프랑스 파리 컨서버토리 등에서 강의했다. 현재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연극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