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의 발자취를 따르다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와인의 선구자 로버트 몬다비와 캐나다의 아이스 와인을 대표하는 이니스킬린. 도전, 혁신, 장인정신이 공존하는 현장에서 고귀한 땀방울이 빚어낸 신의 물방울을 맛보았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의 상징적인 아치형 입구
로버트 몬다비가 이룩한 캘리포니아 드림
미국 와인의 아버지, 캘리포니아 와인의 거장, 나파밸리의 황제.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 1913~2008년)를 수식하는 말이다. 1966년 그가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세웠을 때 목표는 아주 단순했다. 훌륭한 프랑스 스타일 와인을 만들자. 그리고 우리 와인을 알릴 수 있게 테이스팅 룸을 만들고 투어 가이드를 갖춘 관광 마케팅을 실시하자. 40년이 지난 지금 이 와이너리는 연간 240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는 특급 와이너리가 되었고, 매년 10만 명이 찾는 와인 관광 명소로 발돋움했다. 로버트 몬다비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당시 20여 개에 불과하던(그마저 질 낮은 저가 와인을 만들고 있었다) 이 지역 와이너리가 4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나파밸리 하면 신대륙 와인의 최강자로, 보르도에 견줄 만한 레드 와인 산지로 인식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부인할 수 없다. 그가 이룩한 전설 같은 이 이야기를.
1 2011년 오크빌 퓌메 블랑
2 2010년 오크빌 카베르네 소비뇽
3 포도밭에서 와이너리 입구를 바라본 모습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85km, 29번 국도를 따라 달리면 나파밸리 지역의 중간쯤에서 오크빌 사인과 함께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를 만날 수 있다. 두 팔 벌려 환영 인사를 하는 성 프란체스코 동상 뒤쪽으로 작은 분수가, 그리고 아이보리색 삼각형 벽체 아래 컴퍼스로 그려놓은 듯 선명한 아치형 정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몬다비 와인 라벨에도 그려 넣은 이 와이너리의 상징으로, 캘리포니아에 와인 문화를 처음 전파한 스페인 선교사를 기리기 위해 스페인풍으로 설계한 것이다. 입구를 지나니 온전히 푸른 포도밭이다(10월 22일에 방문했다). 이 밭의 이름은 투칼론(To Kalon). 1860년대부터 이 자리를 지킨 유서 깊은 포도밭으로 그리스어로 좋다(the good)는 의미다. 무엇이 좋을까. 카베르네 소비뇽이 자라기에 참 좋다.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산이 서리와 찬 바람을 막아주는 데다 산에서 쓸려 내려온 자갈이 많은 토양이라 배수가 잘된다. 막 수확을 끝낸 시점이었는데 투어 가이드가 올해는 기후가 좋아 조금 일찍 포도를 땄다며 2013년산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잘 익은 투칼론의 포도는 지금 주스 상태로 발효와 침용을 거치며 술이 되기 위한 화학작용을 겪는 중이다. 그 여정을 따라 양조장에 들어섰다. 1999년 새로 지은 이 건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대형 프렌치 오크통. 로버트 몬다비는 와이너리 설립 당시 스테인리스스틸 발효 탱크를 지역 최초로 도입해 캘리포니아 와인 산업에 획기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컴퓨터로 온도 조절이 가능하고 위생 관리가 쉬워 와인의 품질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을 지으면서 옛날 스타일인 오크통 발효 방식으로 회귀했다. 카베르네 소비뇽 같은 레드 와인의 경우 컬러와 플레이버를 살리기 위해 좀 더 따뜻한 온도에서 발효시켜야 한다. ‘열을 유지’하는 측면에선 오크가 더 유리하다는 것을 많은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고. 지하로 한 층 내려가면 수백, 어쩌면 수천 개에 달할지도 모를 오크통이 줄 맞춰 늘어선 셀러의 장관이 펼쳐진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는 100% 프렌치 오크만 사용한다. 전부 프랑스에서 온 것으로, 일반적인 신대륙 와인이 추구하는 강한 타닌과 오크 향, 강건함이 아니라 집중력 있으면서 부드러운 맛을 내기 위해서다. 우리가 흔히 쓰는 표현인 ‘벨벳 같은 타닌’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다.
1 프라이빗 다이닝 공간
2 오크 숙성실
3 오크빌 투칼론 포도밭 푯말
셀러를 가로질러 안쪽으로 들어가면 로버트 몬다비의 첫 빈티지부터 최신 빈티지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라이브러리가 있다. 역사의 숨결을 느끼며 시음 잔을 채웠다. 첫 잔부터 세다. 2011년 오크빌 퓌메 블랑. 로버트 몬다비의 탄생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딱 5000케이스만 만들었는데 전 세계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출시했단다. 본고장인 미국에도 내년 출시 예정이라니, 새삼 한국 시장의 위상을 실감했다.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에서 퓌메 블랑이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 1970년대 초반까지 나파밸리의 소비뇽 블랑은 단맛이 강한 저급 와인이었다. 하지만 로버트 몬다비는 루아르 스타일의 드라이한 소비뇽 블랑을 시도했고, 퓌메 블랑(smoked white)이라 이름 붙였다. 퓌메 블랑의 첫 빈티지가 1977년. 당시로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컨셉이었지만 곧 나파밸리의 새로운 유행이 되었고, 로버트 몬다비의 성공 사례 중 하나로 지금까지 회자된다. 신선한 시트러스 과일 향에 열대 과일의 달콤함, 미네랄, 허브 향이 어우러진 산뜻한 풍미가 인상적이다. 기존의 나파밸리 퓌메 블랑(오크빌 퓌메 블랑은 오크빌 지역에서 난 포도만 사용한다)보다 농축된 느낌으로 여운도 길다. 2010년 오크빌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두 번째 잔을 채웠고, 이어서 2010년 오크빌 카베르네 소비뇽 리저브를 시음했다. 이 둘은 훌륭한 대조군이었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힘이 좋고 집중력 있는 고전적 스타일인데, 여기에 리저브가 붙으면 우아함과 복합미가 더해지는 것이 흥미로웠다. 2010년은 약간 서늘한 해로 산미가 높아져 알코올 함량이 낮지만 신선한 느낌이 더 강하며 잠재력은 여느 해 못지않게 풍부하다는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나파밸리에서 최고급 와인을 만들겠다는 로버트 몬다비의 꿈을 반영한 것이 바로 이 리저브 와인이다. 보르도산 특급 와인과 견줘도 밀리지 않는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아직 영한 빈티지라 타닌이 강해 섬세한 속내와 겹겹이 퍼질 풍성한 향내를 경험할 순 없었지만 언젠가 깨어날 수년 후를 기대하게 했다. 로버트 몬다비의 소망처럼 활짝 피어날 그때를.
한겨울 손으로 수확한 아이스 와인 포도
캐나다의 혹독한 겨울이 준 선물, 이니스킬린
캐나다 온타리오 주에는 2가지 명물이 있다. 첫 번째는 나이아가라 폭포. 그리고 달콤함의 절정, 아이스 와인이다. 캐나다산 와인 하면 생소한 사람이 많겠지만 그것이 아이스 와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중에서도 이니스킬린(Inniskillin)은 독보적이다. 캐나다 아이스 와인은 몰라도 이니스킬린 아이스 와인을 모르는 이는 흔치 않을 테니(적어도 면세점에서 한 번씩 구경해봤을 테니) 두말하면 무엇 하리. 영국의 저명한 와인 평론지 <디캔터>에 따르면 와인 전문가에게 알파벳이 연상시키는 와인 관련 단어를 물어본 결과 B는 ‘Bordeaux(보르도)’, Y는 ‘Yquem(이켐, 샤토 디켐)’ 그리고 I 하면 ‘이니스킬린’이 떠오른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상징적 브랜드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이니스킬린은 전 세계 61개국에서 판매하고 있으며, 특히 면세점에서는 모든 종류의 와인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으로 유명하다. 이니스킬린의 선전에 힘입어 이 지역의 와이너리가 지난 30년간 160여 곳으로 확장, 발전했다. 캐나다 아이스 와인 역사를 주도한 이니스킬린의 찬란한 역사는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 출신 사업가 도널드 지랄도(Donald Ziraldo)가 오스트리아인 와인메이커 카를 카이저(Karl Kaiser)와 손잡고 개척자 정신으로 이 와이너리를 시작했다. 유러피언 포도 품종을 들여와 이 지역에서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 지역에 위치한 이니스킬린의 브래 번 이스테이트(Brae Burn Estate)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일은 잘 영근 비달 포도를 한 알 떼어 맛본 것이었다. 껍질이 두껍다. 유럽에서 왔지만 북미산과 접목한 하이브리드 품종으로 껍질이 추위로부터 보호해주는 이른바 ‘재킷’의 역할을 해준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근대 4대 건축 거장으로 손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초기작을 연상시키는 1920년대 창고 건물이 보이고, 포도밭 그리고 그 뒤로 산자락이 펼쳐진다. 눈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그 건너편은 온타리오 호수로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의 기후는 아이스 와인을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포도의 당을 응축시키는 풍부한 일조량과 적은 강수량, 그리고 겨울에는 찬 바람이 몰아쳐 포도의 숙성과 수확에 도움을 준다. 아이스 와인을 만드는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0월에 이미 포도가 농익지만 이 포도를 수확하지 않고 혹독한 겨울 추위에 그대로 방치한다. 새 떼나 곰, 고라니 등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보호망을 쳐주는 정도가 배려의 전부다. 이 과정에서 포도는 자연적으로 탈수되면서 진한 맛과 향, 당분, 산을 축적하게 된다.
캐나다의 하이 퀄리티 아이스 와인은 영하 8℃ 이하에서 포도를 수확하도록 엄격히 규제하고 있다(이 기준을 준수해야 품질 인증 마크 VQA를 달 수 있다). 이니스킬린은 법규보다 더 까다롭게 품질을 관리한다. 3일 연속 기온이 영하 10℃ 아래로 떨어질 때 포도를 수확해 아이스 와인의 퀄리티를 확실히 보증한다. 자연 상태에서 언 포도를 손으로 수확하며, 같은 날 해가 뜨기 전에 압착을 진행한다. 온도가 올라가면 얼음이 녹아 당도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돌멩이처럼 딱딱한 포도송이를 압착하는데, 10~15%의 얼지 않은 고농축 과즙만 모아서 발효 과정을 거쳐 아이스 와인을 만든다. 수분을 제외한 진액만 추출하다 보니 아이스 와인 375ml 한 병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포도의 양은 테이블 와인의 10배 이상이다.
1 비달 아이스 와인. 옆에 놓인 것이 리델사의 아이스 와인 전용 잔이다.
2 이니스킬린 브래 번 이스테이트의 겨울 풍경
독일의 아이스바인(eis wein)이 아이스 와인의 원조 격이지만 현재 캐나다가 최대 생산국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높이는 데 이니스킬린이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84년 첫 빈티지를 출시한 이니스킬린(1983년산이 나올 뻔했으나 새들의 공격으로 수확에 실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비달이 1991년 보르도 빈 엑스포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에도 매년 높은 평가를 받으며 명성을 입증해왔다. 흡사 보물 창고 같은 지하 셀러에서 이 전설적인 빈티지를 만날 수 있었다. 비달은 황금빛 꿀색이지만 진한 캐러멜색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시간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니스킬린의 아이스 와인은 스파클링, 비달, 리슬링, 비달 오크 에이지드, 카베르네 프랑 등 총 5가지다. 스파클링은 환영주로 리셉션에서 즐기고 본격적인 시음은 나머지 4가지 와인으로 실시했다. 시음 전 테이블 위 전용 잔에 먼저 눈이 간다. 리델사 제품으로 소테른 잔과 소비뇽 블랑 잔의 디자인을 절묘하게 결합한 것. 다이아몬드형으로 와인잔을 돌려 흔들면 공기와 빠르게 접할 수 있고,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 향을 모아준다고 한다. 2012년 비달부터 한 모금 머금었다. 신선한 과일 향, 그중에서도 복숭아와 꿀의 달콤함이 입안을 감미롭게 적신다. 2년간 숙성한 체다치즈를 곁들여 먹으니 치즈의 고소한 풍미가 배가된다. 이니스킬린의 아이스 와인은 일반적인 디저트 와인과 달리 신선한 산미가 살아 있어 음식과도 페어링하기 좋다. 이 비달 와인에는 랍스터 크림수프나 푸아그라 같은 크리미한 텍스처의 음식이 잘 어울릴 듯하다. 두 번째 잔은 2012년 리슬링. 비달보다 시트러스 향이 강하다. 더 달게 느껴지지만 실제 당도는 비달보다 리슬링이 낮다고. 매콤한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니 한식에 곁들여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일었다. 2011년 오크 에이지드 비달은 버터스카치와 오크의 바닐라 풍미를 더한 흥미로운 와인이었고, 2012년 카베르네 프랑은 딸기와 장미의 뉘앙스가 번지는 그야말로 여성을 매혹시킬 만한 매력이 철철 넘쳤다. 단맛이 강한 데블스 푸드 초콜릿 케이크를 함께 먹는데도 결코 풍미가 뒤처지지 않았다.
위에 소개한 와인은 모두 현재의 와인메이커 브루스 니컬슨(Bruce Nicholson)의 작품이다. 카를 카이저가 2006년 은퇴하고 도널드 지랄도는 다른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니스킬린은 컨스텔레이션 브랜즈에 편입되었다(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도 2004년부터 컨스텔레이션 브랜즈에 속해 있다). 주인은 바뀌었지만 와인은 바뀐 게 없다. 개척자의 도전정신과 장인의 손길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자연이 허락하는 한 이니스킬린 아이스 와인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서 사랑의 묘약 같은 변치 않는 달콤한 한 방울을 선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취재 협조 신동와인, 컨스텔레이션 브랜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