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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남자들에게

MEN

타고난 감수성을 억지로 짓밟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이다.

터프한 남자들의 세상인 미국 영화에도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진 못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녀와의 사랑에 성공하는 마음 여린 남자 주인공이 의외로 많이 등장한다. <빽 투 더 퓨쳐>, <조찬 클럽>, <웨딩 싱어>,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에는 한 여인을 연모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먼 발치에서 주변을 맴돌며 애태우는 남자 주인공이 나온다. 관객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그 남자의 순정을 알아주고 두 사람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게 된다. 이런 공식은 우리나라에서 더 잘 통한다. 영화 <건축학개론>의 남자 주인공이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공들여 만든 모형을 들고 가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그 남자의 절절한 아픔에 감정을 이입한다. 그건 어쩌면 그것이 거의 모든 세상 남자의 내면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미국의 한 여성용품 브랜드 광고는 이 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광고는 7세가량의 여자아이에게 “여자처럼 뛰어봐”라고 말했는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 못지않게 힘차게 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여자처럼 공을 던져봐”라고 말해도 메이저리그 선수 같은 포즈로 힘껏 공을 던진다. 그런데 고등학생 정도의 여자아이에게 “여자처럼 뛰어봐”라고 말하자 마치 예쁜 드레스를 더럽히기 싫은 공주님처럼 어색하게 뛰고, “여자처럼 공을 던져봐”라고 하자 공이 얼마나 나가건 아랑곳하지 않고 예쁜 포즈로 힘없이 던진다. 이처럼 여자는 성장 과정에서 학교교육과 사회생활을 통해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받아들이고 인간 본연의 강인함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명료하게 그린 것이다. 그러나 남자도 마찬가지다. 여자아이들이 강인함을 포기하도록 교육받는 것처럼 남자아이들은 소심함을 포기하도록 교육받는다. 나는 어릴 때 낯선 사람과 말 나누기를 무척 두려워했다. 어린 내가 가장 싫어한 것이 어머니가 슈퍼마켓에서 뭔가를 급히 사오라고 심부름시키는 것이었다. 나는 낯선 슈퍼마켓 아저씨에게 말을 거는 것이 정말로 무서웠다. 하지만 주변 어른들은 내게 “남자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렇게 약해빠졌느냐”라는 핀잔만 했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중학교에서는 1년에 몇 번씩 학생들을 모아놓고 댄스파티를 여는데, 남학생은 여학생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마음에 드는 상대에게 댄스 파트너가 되어달라는 신청을 해야 한다. 물론 미국 중학생들도 그 나이에는 이성에게 다가가는 걸 어색해하기 때문에 댄스파티장은 일단 남학생과 여학생이 끼리끼리 모여 있는 어색한 분위기다. 그러다 상대적으로 좀 더 용기 있는 한 남자아이가 먼저 여학생 진영으로 가서 파트너가 되어주길 청하면 다른 남학생들도 어슬렁거리며 뒤따라가 각자 파트너를 구한다. 소심한 나는 같이 춤을 추고 싶은 여학생이 눈에 들어와도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다 음료수만 마시고 다시 남학생 진영으로 돌아오곤 했다. 마음에 드는 여학생 앞에 서면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현상은 고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지속된 것 같다. 이때쯤에야 여성은 자신에게 대범하게 다가와 활짝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걸고 농담도 던지는 남자를 훨씬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타고난 감수성의 꽃밭을 억지로 짓밟고 반대쪽으로 대범하게 걸어가는 방법을 연습했고, 그렇게 해서 겨우 이성 교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리라. 본래의 감수성을 버리고 나서야 남자다운 남자가 될 수 있었던 순간이 있을 것이다.
성인이 된 남자들은 대학과 사회생활을 거치면서 처음 본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농담을 던지고, 건배를 제의할 줄 아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와 명예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대범하게 행동하려 하지만 사실은 남자들도 알고 있다. 자신의 내면에서는 본능적 수줍음이 억제되고 있다는 것을.
심리학자 카를 융은 임상시험보다는 신화의 세계를 분석한 시대의 학자였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인간에 대해 더 총체적이고 예리한 분석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오늘날의 심리학자들은 어떤 사람이 말을 많이 하거나 사람을 잘 사귀면 외향적,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조용한 사람은 내성적이라고 분리한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 외향성과 내향성을 이해하려 했다. 융은 내성적인 사람을 ‘아폴로적 인간’, 외향적인 사람을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라고 불렀다. 아폴로는 사유하는 신이다. 아폴로의 주 관심사는 세상을 깊은 생각에 비추어 보며 자기 이상과 비전에 집중하는 것이다. 아폴로는 자기 이상과 신념이라는 주관을 통해 세상을 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자기 생각 속에 머물 때 더 마음 편한 신이다. 그에 비해 디오니소스적 인간은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기 때문에 햇볕, 바람, 사람과의 접촉, 좋은 냄새와 맛 같은 것에 끌린다고 융은 분석했다. 하지만 융은 이 둘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고 둘 모두 우리 내면에 동시에 들어 있는 모습이라고 봤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과, 사유와 생각을 통해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것. 둘 다 모든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이것을 쉽사리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자본주의사회는 네트워크를 통해 가치를 창출하는 사회다. 두 사람이 물건이나 돈,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몇 명이 각자의 장점을 모아 협력에 성공하면 가치가 창출되고 돈과 명예가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 내면에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면은 크게 칭송받는다. ‘저 사람 사교적이다’, ‘저 사람 마당발이다’, ‘저 사람과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대화가 아주 재밌다’ 같은 평가는 한 사람이 끊임없이 외면을 향해 뻗어나가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회 풍토의 방증이다.
하지만 사람은 디오니소스적인 동시에 아폴로적이다. 아쉽게도 아폴로적인 부분에 사회적 가치는 없다. 남들이 다 고개를 숙이고 일에 열중할 때 내 눈에만 들어오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당장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만 타인의 비웃음을 살 것 같아 억누르게 된다. 자본주의사회는 점점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는데, 객관적이라는 것은 외면에서 들어온 정보를 조합한다는 뜻이다. 내 마음속에서 충동적으로 일어난 생각, 즉 내 ‘주관’은 객관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보로서 가치가 없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 확실해 드러내기가 두려운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점점 내 아폴로적 요소는 내면 깊숙이 가라앉아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정말 믿는 친구와 나누고 싶은 것은 바로 내 주관이고 내 사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것을 드러내놓고 말하는 것은 왠지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않을 것 같아 상대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하는 기대를 갖게 되고, 그런 기대가 무너지면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남자의 소심함은 사실 강요된 사회성에 의해 우리의 마음속 한구석에 찌그러져 앉아 있는 아폴로의 모습이 아닐까.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겸 소설가 알레산드로 보파는 <너는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은 짧은 단편을 모은 우화집이다. 소설의 주인공 비스코비츠는 매 챕터마다 다른 종의 동물 수컷으로 등장한다. 한 편에서는 수컷 개미로, 다른 편에서는 수컷 엘크로 등장하는 식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수컷 엘크의 스토리를 가장 흥미롭게 읽었다. 엘크는 암컷의 발정기가 되면 수컷들이 뿔로 힘을 겨루는데 여기서 승리한 수컷은 모든 암컷을 거느리게 되고, 나머지 수컷은 아예 짝짓기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 승자 독식의 잔혹한 번식 구조를 이어가고 있다. 그해의 싸움에서 패배한 비스코비츠는 돌에 뿔을 갈며 훈련해 그다음 해에 챔피언이 된다. 하지만 막상 암컷들을 거느리며 사는 것도 쉽지 않다. 끊임없이 새끼들을 돌보고, 늑대를 쫓고, 암컷들을 보살피다 결국 생을 간신히 유지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우리 남자들 내면에도 비스코비츠처럼 날카롭게 뿔을 갈고 다른 수컷 엘크를 제압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강박이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그 연약한 모습을 숨기려 들다 보니 내면은 더욱 소심해진다. 남자의 20대와 30대 초는 뿔을 가는 엘크와 흡사하다. 옛날 사람들은 그 이후의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수명이 짧아 그 이후까지 사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100세 시대, 인생이 길다. 인류의 평균수명이 길어져 그 시절과 비교하면 인생을 두 번 사는 셈이다. 그래서 나는 첫 30년이 뿔을 가는 엘크의 모습이었다면 다음 30년은 조용히 세상을 명상하고, 아무도 없는 초원에서 하프를 연주하며 자기 감성을 선율로 풀어내는 아폴로의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고 살아도 될 거라고 생각한다. 30대 중반이 넘어서는 좀 더 감성적인 남자가 되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에디터 이기원(lkw@noblesse.com)
조승연 사진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