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의 반란
초록색 병에 든 희석식 소주는 오랫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었다. 하지만 그 아성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맛과 향을 차별화한 증류식 소주가 대거 등장하고 있어서다. 이들은 '프리미엄'을 표방하며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을 노리고 있다.

‘한국가양주연구소’의 통계에 따르면 증류식 소주는 2005년 불과 59억 원 규모의 시장이었지만 2014년에는 143억 원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물론 증류식 소주는 시장에서 워낙 낮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상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 시장이 꾸준히 커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을 증명이라도 하듯 2016년 ‘프리미엄 소주’ 시장은 꽤나 치열한 전장으로 변했다. 전국 각지의 술도가들이 잇달아 고급 증류주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하이트진로의 ‘일품진로’, 롯데의 ‘대장부’, 금복주의 ‘제왕’ 등 대기업도 줄줄이 이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갑자기 프리미엄 소주 시장이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를 분석하기에 앞서 역사적 배경부터 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증류주 시장은 외국에 비해 낙후돼 있었다. 이는 우리의 역사적 사건과 맥락을 함께한다. 우리 술은 조선 말기 일제의 ‘주세령(酒稅令, 주류를 제조법에 따라 나누고 세율을 달리 매긴 정책)’하에 탄압받았다. 일제는 당시 집집마다 빚던 전통술을 금지하고 약주, 탁주(막걸리), 소주로 단순 규격화했다. 해방 이후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식량 부족을 이유로 1965년 양곡관리법을 시행하고, 쌀을 사용한 술 제조를 금지하면서 우리 술은 또 한 번 명맥이 끊긴다. 주정에 물을 부어 도수를 맞추고 감미료와 향료를 넣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국민 술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이렇게 아픈 역사가 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역사와 전통, 품질까지 갖춘 한국 대표 술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희석식 소주와 위스키, 브랜디에 익숙해진 한국인의 입맛을 되돌릴 만한 술이 없다. 하지만 증류식 소주 시장을 오랜 기간 개척해온 ‘화요’와 2013년부터 리뉴얼한 제품으로 무섭게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 하이트진로의 ‘일품진로’는 증류식 소주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대중적인 희석식 소주의 바탕 위에 증류식 소주를 더하며 소비자의 선택지가 다양해진 것이다. 동시에 좋은 재료로 제대로 빚은 술을 맛보고자 하는 수요가 크게 늘어나면서 ‘프리미엄 막걸리’, ‘프리미엄 소주’ 등의 신조어를 요즘 핫 트렌드로 언급하곤 한다. 한때 열풍을 일으킨 과일 소주, 그 뒤를 이은 탄산주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식은 것도 한몫했다. 수입 주류를 다양하게 맛본 소비자의 입맛이 다변화되고 고급화된 상황에서 인위적인 맛과 향을 첨가한 술은 맛에 대한 감동을 지속시키지 못했으며, 술에 대한 호감 또한 빠르게 식게 했다. 게다가 최근 1~2년 사이 다양한 전통주를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특급 호텔, 주류 숍 등 고급 업장에서 취급하기 시작하면서 소비자의 관심 또한 점점 더 커졌다. 전통주 전문 유통 기업 부국상사에 따르면 “소득 수준이 올라가면서 저가 소주에서 고급 소주로 시장이 전체적으로 고급화되고 있는 단계이며, 전통주 중에서도 특히 고가의 프리미엄 소주 카테고리 제품은 매년 20~30% 선으로 빠르게 신장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궁금점이 생긴다. 그렇다면 프리미엄의 기준은 뭘까?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은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원료, 물, 숙성 방식, 제조 방식을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첨가물을 넣으면 안 된다는 것. 아직 법적 기준은 없지만 우리 전통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는 술은 그리 많지 않다. 근래 대기업에서 출시한 몇몇 제품도 숙성 기간과 세련된 패키지를 내세우며 ‘고급 증류주’를 자처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원료, 물, 숙성 방식, 제조 방식을 따져보면 프리미엄 소주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대대적인 물량공세를 펼치고 있는 ‘일품진로’의 경우 미국 쌀을 썼고, 액상 과당(감미료)이 들어갔다. 이쯤 되면 오히려 우리가 해외에서 배워야 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최근 뉴욕에서 한국식 전통 증류 소주 ‘토끼(Tokki)’를 출시한 미국인 브랜든 힐의 이야기를 참고하면 어떨까. 그는 초록색 병에 든 소주가 한국 시장을 점령한 것이 안타까워 직접 소주를 만든 사람이다. 그가 뉴욕에서 만든 ‘토끼’는 맨해튼의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정식’ 등에 납품하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는 “한국 전통의 주조 기술이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소주는 화학물과 감미료 대신 높은 가치를 엄격히 지키며 만들어야 하는 술”이라고 강조한다. 이 미국인이 만든 소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는 가격이 아니라 진정성과 격을 갖췄을 때 붙여야 한다. 그래야 이제 막 발돋움을 시작한 고급 증류주 시장이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마셔봐야 하는 증류식 소주 6
무작 / 홍천 예술주조
강원도 홍천에서 만드는 증류식 소주. 증류 후 2년 이상 숙성시킨다. 첨가제를 일절 넣지 않고 누룩과 쌀만으로 맛과 향을 낸다. 알코올 도수 53도로 꽤 강한 술임에도 목 넘김이 상당히 부드럽다. 입안에 향이 오래 남으며, 은은한 과실 향도 느낄 수 있다.
문경바람 / 문경 오미나라
문경바람은 사과가 주재료다. 일체의 인공 첨가물 없이 자연 그대로 발효해 증류, 숙성시켜 만든다. 문경의 지역색과 자연을 그대로 담은 술로 높은 도수임에도 서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사과의 풍미, 감미로운 목 넘김이 일품이다.
감홍로 / 이기숙 명인
이 술의 별명은 ’38 이북의 으뜸’. 관서 지방을 대표하는 소주로 골동반, 평양냉면과 함께 평양 3대 명물로 꼽힌다. 용안육, 정향, 계피, 생강, 감초 등 다양한 한약재가 어우러져 맛을 내는데, 한 모금 마시면 한약재에서 우러난 그윽한 향을 느낄 수 있으며, 오래 둘수록 향이 진해진다.
삼해소주 /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8호
서울시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4개의 술 중 하나다. 쌀이 많이 들어가고 증류로 얻는 소주의 양이 적어 고급술에 속한다. 여러 번 저온 숙성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맛과 향이 깊다. 마실 때마다 맛이 조금씩 바뀌며 세 번째 잔에서 그 맛과 향이 극대화된다.
풍정사계 동 / 청주 청원 전통술방화양
‘풍정’은 단풍나무 우물이라는 뜻. 동은 겨울을 의미한다. 국내산 쌀과 전통 누룩으로 빚은 술이다. 인공 첨가물을 가미하지 않아 자연스럽고 깔끔한 맛과 향을 자랑한다. 알코올 도수는 42도. 은은한 누룩 향이 나며 목 넘김이 깔끔하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산의 풍경이 연상된다.
Tokki 뉴욕 / Brandon Hill
‘Tokki’라고 쓰인 라벨을 보는 순간 제품에 대한 매력도가 급격히 상승한다. 백 레이블에 쓴 ‘달과 함께 마실 땐 혼자가 아니다’라는 문구 역시 애주가들을 열광하게 한다. 알코올 도수 23도로 높은 편이지만 한국 소주에 비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과실 향의 풍미가 훌륭하며, 목 넘김도 좋다.
에디터 | 이기원 (lkw@noblesse.com)
글 | 이지민(술 전문가, ‘대동여주도’ 대표) 사진 | 안재현 장소 협조 | 백곰 막걸리 & 양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