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 한잔
우리의 전통 증류식 소주가 주류 시장의 화두로 올라섰다.

왼쪽부터_ 추성주 조선시대 강호가도의 대가로 불리는 송순, 송강 정철 등이 즐긴 약주. 일제강점기에 자취를 감췄다 1994년 100년 만에 복원됐다. 증류식 소주 중 유일하게 한약재를 증류해 만들며, 최근 현대적 느낌으로 패키지를 바꾸어 선물용으로 각광받고 있다. 화요 엑스트라 프리미엄 화요는 증류식 소주의 열풍에 불을 지핀 주인공. 2005년에 출시한 이후, 증류식 소주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화요 엑스트라 프리미엄은 화요에서 선보이는 최고급 제품으로 위스키처럼 미국산 오크통에서 5년 이상 숙성시켜 부드러운 풍미와 목 넘김을 자랑한다. 미르 40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요리책 <산가요록>의 소주 제조법을 따른 쌀 소주다. 용인 백옥쌀로 술을 빚어 1년 이상 옹기에서 숙성시킨다. 다채로운 맛이 압권인데, 쌀 특유의 구수한 향과 감칠맛과 더불어 마지막엔 은은한 단맛이 퍼진다. 문경바람 사과를 으깬 뒤 발효시켜 동으로 만든 증류기에서 두 차례 증류해 만든다. 입안 가득 느껴지는 사과의 풍미가 일품으로 달콤쌉싸래한 맛 뒤로 민트 향이 살짝 스친다. 오크통 숙성 제품과 도자기(백자) 숙성 제품으로 출시해 선택의 폭도 넓다. 풍정사계 춘·하·추·동 국내산 쌀과 전통 누룩, 청주 청원의 좋은 물로 빚은 술이다. 인공 첨가물이 전혀 없어 깔끔하다. 42%에 이르는 알코올 도수는 물론 단맛이 거의 없어 주당들이 반길만하다.
TV를 켠다. 이탈리아 남자들의 한국 여행기가 나온다. 한국에 도착한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다름 아닌 소주를 사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이건 우리가 프랑스에서 와인을 찾고, 일본에서 사케를 마시는 것처럼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다. 심오한 표정의 이탈리아 남자들의 소주 품평회가 한참이나 전파를 탄다. 이후에도 그들이 반주로 소주를 즐기는 장면이 꽤 여러 번 등장했다. 한국 여행을 마친 그들은 어느새 소주가 그립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한국은 소주의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쩐지 이 장면이 조금 남세스러웠다. 그들이 한국을 여행하며 마신 소주가 하나같이 희석식 소주였기 때문이다. 과연 초록색 병에 담긴 희석식 소주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소주는 몰트위스키처럼 향으로 마시는 술이다. 고구마로 증류한 소주에선 은은한 단맛이 나고, 쌀로 빚은 소주는 구수한 끝 맛이 코끝을 감싼다. 증류식 소주 얘기다. 반면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를 넣든 쌀로 만들든 큰 차이가 없다. 희석식 소주의 맛을 책임지는 건 감미료와 향료다. 더욱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술이라고 하기엔 역사도 그리 길지 않다. 증류식 소주의 역사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고려엔 집집마다 가양주(家釀酒)가 있었고, 각 지방마다 대표 명주가 존재했다.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주류 문화는 크게 쇠퇴하고 만다. 법적으로 가양주를 만들지 못하게 한 것은 물론, 밀주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우리 술을 약주, 탁주(막걸리), 소주로 규격화한것도 이때다. 해방 후에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술 문화는 더욱 쇠퇴의 길을 걷는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고, 정부는 곡물로 술을 빚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그렇게 순곡으로 빚어 증류한 증류식 소주가 사라지고, 양조용 알코올인 주정에 감미료와 향료를 넣어 만든 희석식 소주가 등장했다. 이를테면 임시방편이었던 셈이다.
애석한 건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난 이후다. 기회가 있었기에 더 아쉽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증류식 소주의 명맥을 찾으려는 노력을 했다. 전 세계에 소개할 우리 전통술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같은 해에 주류 시장이 완전 개방되며, 대중의 관심은 온통 수입 위스키로 향했다. 그렇게 20여 년이 흘렀다. 그사이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스카치위스키를 소비하는 나라가 되었다. 스카치위스키로 시작된 수입 주류의 인기는 와인과 싱글 몰트위스키, 화이트 스피릿 등으로 이어져왔다. 하나같이 고급술이다. 같은 기간 정부의 가격 정책과 대기업의 물량 공세가 ‘콤보’를 이룬 희석식 소주는 ‘국민 술’ 반열에 올랐다. 90% 이상이 국내에서 소비되는 ‘참이슬’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에 이름을 올렸을 정도다. 하지만 전통주는 늘 뒷전이었다. 지난 2010년 일본에서 먼저 인기를 끌면서 국내서도 잠시 ‘막걸리 열풍’이 불긴 했지만, 금세 그 거품이 꺼졌고 대표 주종도 없는 실정이다. 그런데 최근 전통주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강남에 전통주를 다루는 바(bar)가 오픈하는가 하면, 특급 호텔에서도 전통주와 어울리는 디너를 선보이고 있다. 대표주자는 역시 증류식 소주다. 감소 추세로 돌아선 국내 주류 시장에서 증류식 소주만 유일하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더욱 눈에 띈다. 국세청의 자료에 따르면 증류식 소주는 2012년에 비해 2015년 200% 증가했고, 2017년에는 300% 이상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소비의 주체는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다는 소위 트렌드세터다. 이들은 증류식 소주에 토닉워터 등을 섞어 전통주 칵테일을 즐긴다. 그 덕분에 청담동이나 한남동 등의 칵테일 바에서도 심심찮게 증류식 소주를 이용한 칵테일 메뉴를 만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얼마 전, 아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정부가 전통주의 판매를 돕기 위해 규제를 완화했다는 소식이다. 특히 그동안 청소년 보호 등을 이유로 금지해온 온라인 주류 판매에서 전통주만은 예외로 두기로 했다. 이제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간단하게 전통 방식으로 생산한 증류식 소주를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와 주류 시장의 환경이 비슷한 일본에서는 2003년을 기점으로 증류식 소주가 희석식 소주를 압도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일본 소주를 말할 때 희석식 소주를 떠올리지 않는다. 취재 중 만난 한 주류 전문가는 최근 한국 전통 주류 시장을 보면 1990년대 후반 일본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7년이 소주 시장의 판도를 바꾼 원년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물론 아직 증류식 소주의 성공을 속단하긴 이르다. 어쩌면 막걸리처럼 잠시 유행으로 스쳐 지나갈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 우리도 한국을 대표하는 고급술을 가져야 할 때가 오지 않았을까. 이탈리아 남자들의 소주 품평회가 못내 아쉽기만 했던 이유다.
에디터 이승률(프리랜서)
사진 박원태 도움말 이지민(대동여주도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