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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욱이 말에서 내려온 날

LIFESTYLE

1983년 처음 말을 탄 송상욱은 아직도 현역 승마 선수다. 무려 32년간 말 위에 있었다.

송상욱은 다리를 절었다. 왼쪽 새끼발가락 끝에 티눈이 생겨 그렇다고 했다. 승마 선수도 그런 작은 티눈 때문에 고생하느냐고 묻자 멋쩍게 웃었다. 그는 더운 날씨에도 승마복을 완벽히 갖춰 입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게 안쓰러워 사진 촬영 전까지라도 승마 부츠는 벗고 있으라고 권했지만 손사래를 치며 낯을 가렸다. 굳이 분류하자면 낯을 가려 상대에게 예의를 갖추는 쪽이었다. 볕이 쨍쨍한 오후 2시. 과천 야외 마장엔 송상욱 외에 다른 선수는 보이지 않았다. 저편 나무 그늘 한쪽에 자리를 잡자 그제야 그의 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검게 그을린 그의 이목구비 위로 가식 없는 장난기가 보기 좋게 포개졌다.
운동선수는 보통 큰 경기의 우승 소식으로 이름을 알린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 더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된다. 그리고 그 존재감이 한 단계 뛰어오르는 건 더 이상 어떤 대회의 메달리스트로 기억되지 않고, 어떤 대회에 나가 어떤 성적을 보여도 늘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순간이다. 송상욱이 바로 그렇다. 그는 지난 30여년간 승마 선수로 살아왔다.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말을 향한 열정만으로 선수 생활을 버텨온 진정한 ‘노력파’다. 심지어 지난해엔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한국 승마에 금메달 2개(종합마술 개인전·단체전)를 안겨줬다. 이런 그를 우린 어디까지 알고 있나?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말에 올랐다. 부산승마협회의 승마장에서였다. 난생처음 자신의 몸보다 곱절은 큰 말을 보고 지레 겁먹었지만, 이내 말의 깊고 진한 눈망울에 빠져들었다. 눈앞에 있는 말이 곧 자신의 친구가 되리라는 걸 느낌으로 알았다. 이후 말을 찾는 시간이 급격히 늘었다. 말이 보고 싶은 마음에 새벽같이 일어나 집에서 차로 수십 분 거리의 승마장까지 걸은 적도 많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말을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그건 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작은 속삭임에도 늘 ‘흐흐흐흥’ 하며 반갑게 응답했다.
지난 30여 년간 그는 단 하루도 말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 말은 그가 승마를 그만둔 적이 없음을 뜻한다. 중학생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함께하던 말을 판 적도 있고, 몇 배나 비싼 말을 타는 대학교 동료들과 경쟁하며 서럽기도 했지만 그는 좋아하는 말과 함께한다는 보람으로 모두 이겨냈다. 성인이 되어 상무 부대에 입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마(自馬)가 없어 입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가능성을 알아본 부대 감독의 (적금 통장까지 깨는) 노력으로 그는 군 생활 중에도 계속 말을 탈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전부 그가 말에만 집중하고 매진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중2 때 처음 승마 선수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태극 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겠다고 혼자 고함도 질렀죠.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심리적으로 위축돼 일부러 극한의 꿈을 꾼 것 같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돈이냐 명예냐’ 하면서 끝을 보자는 마음가짐은 분명히 있었어요.(웃음)”
물론 당시 그가 꾼 꿈은 우주 저 멀리 안드로메다성에서나 이뤄질 법한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을 고작 2년 앞두고서야 비로소 국제 규모의 승마장을 건립한 승마의 변방 중의 변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수백 년 전부터 말을 타온 유럽 국가의 선수를 상대로 대회에서 승리한다는 건 상상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서울 올림픽 개최 직전엔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제대로 된 가축 방역 규정이 없어 승마 경기만 따로 떼어내 다른 나라에서 대회를 치를 뻔한 것. 다행히 뒤늦게 방역 규정을 세워 올림픽 사상 희대의 굴욕적인 일은 면했지만, 그의 꿈이 당시 국내 승마 산업의 실정과 맞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한 소리가 ‘너 말타서 뭐할래?’였어요. 어려서부터 같이 말을 타던 선배들도 거의 다른 길을 걷고 저 혼자만 남았으니 겁이 나기도 했죠. 올림픽 성적이 문제가 아니었어요. 세계 수준에 비해 너무 뒤처져 있는 게 문제였죠.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오직 말 때문이었어요.”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 승마 종합마술 개인전 및 단체전에서 2관왕을 차지한 송상욱 선수

1997년 그는 첫 실업팀으로 삼성전자승마단에 들어갔다. 말과 혼연일체가 된 자세로 장애물을 넘는 장애물 종목 선수로 좋은 컨디션을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덧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독일의 세계적 승마 선수이자 코치인 파울 쇼케묄레의 초청으로 톱 랭커들만 모인다는 국제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는 당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세계적 승마 대회의 문을 두드리기엔 실력이 너무 부족했다. 그가 대회에서 함께 뛴 선수들의 점프와 지구력은 그냥 그들의 DNA에 박혀 태어난 것이었다. 그는 당시 ‘이게 국제 경기구나’ 하며 수준의 차이를 실감했다. 하지만 기죽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선 ‘그래도 열심히 하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작게나마 자라고 있었다.
한편 그는 처음 출전한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20년간 함께해온 선배를 낙마로 잃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마음의 빚이 컸다. 당시 장애물 종목 대표로 대회에 출전한 그는 가슴속에 선배의 이름을 새기며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맹세했다. 그러나 단체전 은메달에 그치며 이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이후 주 종목을 종합마술(마장마술, 장애물 비월, 크로스 컨트리의 3종목을 겨뤄 메달을 가르는 종목)로 바꾼 뒤 출전한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선 7위에 머물렀다. 모든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문제투성이였다. 말을 고르는 것부터 컨디션 등 모든 게 살짝 어긋난 해였다. 그는 이후 4년간 이를 갈았다. 그리고 지난해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28년 만에 한국 승마에 금메달을 안겼다. “사실 지난 대회는 정말 철저히 계획하고 분석한 것이 잘 맞아떨어져 이뤄낸 성과였어요. 이렇게 노력한다면 앞으로 5년 뒤 열리는 도쿄 올림픽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 같아요.”
나무 그늘조차 쩍쩍 갈라질 것 같은 뜨거운 날씨에 시작한 인터뷰는 서서히 그 열기가 시들해져갈 무렵 끝났다. 어떤 의미에서 그와의 인터뷰는 대화라기보다 한 스포츠 선수의 짧은 전기를 기록하는 것에 가까웠다. 데뷔 33년 차 현역 승마 선수이자, 평생 말과 사랑에 빠진 노력파.
송상욱은 현재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틈틈이 대학원에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언젠가 선수 생활을 마치는 날이 오면,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후진 양성에 힘쓰겠다는 계획이다. 자신이 10년 만에 몸에 익힌 테크닉을 후배들이 5년 만에 알 수 있도록 똑 부러지게교육하겠다는 것. 문득 승마는 여느 스포츠와 달리 선수의 나이가 그리 큰 문제는 되지않는다고 한 그의 말이 떠오른다. 60세의 현역 선수도 유럽에는 흔하다고. 그의 나이 올해로 43세. 아직 60세가 되려면 20여 년이나 있어야 한다. 그의 오랜 현역 생활을 앞으로도 기대해본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박용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