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열전
수묵화가 돌아왔다. 그간 중국 컨템퍼러리 아트의 변방에 있던 수묵화는 2013년 한 해 동안 제 빛을 발했다. 베이징의 메이저 갤러리들이 앞다투어 블록버스터급 수묵 전시를 선보였다. 수묵에 집중하는 젊은 작가들이 나타나 주목받는 것은 치바이스, 우창숴 등이 활약한 근대 이후 참으로 오랜만이다.
화선지에 물과 먹만으로 그리는 수묵은 중국의 전통 회화 기법으로 여러 왕조를 거친 유구한 역사 속에서 아시아 미술의 주된 도구가 되어왔다. 그러나 근대를 지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서양에서 유입된 유화에 회화의 주인공 자리를 내주는 듯 보였다. 서양 사상의 영향을 받은 중국 컨템퍼러리 유화는 개혁 개방 이후 1980~1990년 서양 컬렉터들의 각광을 받으며 베니스 비엔날레의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기점으로 폭발한 미술 시장 한가운데에 있었다. 중국에 형형색색의 유화 붐이 일 때, 수묵화는 변방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베이징에서 수묵화의 입지가 바뀌고 있다.
리진(Li Jin),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 수묵채색, 236×53(×8)cm,
2007 이 두 폭을 포함해 총 8폭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재수묵: 2000-2012 중국 당대 수묵 초대전
(再水墨: 2000-2012 中國當代水墨邀請展)
4월, 베이징 진르 미술관에 61명의 내로라하는 작가가 대거 모여들었다. 쩡판즈, 팡리쥔, 웨민쥔 등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컨템퍼러리 작가를 포함해 수묵 예술가 장위,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 구원다 등 다양한 장르의 작가가 한자리에서 만났다. 그간 공통 요소가 없어 보인 그들은 이번 전시에서 실험 수묵, 인상 수묵 등의 회화 작품과 영상, 설치 작품에서 수묵이라는 공통점을 보이며 총 200여 점의 작품을 선보였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팡리쥔, 웨민쥔 등 유화로 명성을 떨친 1세대 컨템퍼러리 작가가 수묵의 영역에 도전한 점. 그들은 한 장르에 매이길 거부하며 순수미술과 영화, 디자인 등 각각의 영역에 도전해 자신의 사상을 전달·확장하고 있다. 이번 전시 외에도 소카 아트 센터, 파크뷰그린 갤러리, 하이브 아트 센터 등 다수의 갤러리가 수묵을 주제로 크고 작은 전시를 열며 수묵의 부활에 동참하고 있다.
이런 수묵 부흥의 움직임은 중국 밖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에서도 경쟁적으로 특별전을 열었는데 크리스티는 2월과 5월 뉴욕과 홍콩에서 < Beyond Tradition-중국 동시대 수묵화전 >을, 소더비는 아시아 위크 기간에 뉴욕에서 < SHUIMO 수묵-중국 동시대 수묵전 >을 선보였다. 서양 미술 시장이 중국 동시대 수묵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옥션 결과는 성공적이었지만 정식 세일이 아닌 프라이빗 세일로 진행해 수묵 시장에 대한 조심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했다.
폴리, 가디언, 컨실 등 중국 로컬 옥션에서는 이보다 이른 2003년 처음으로 정식 수묵 세일즈가 시작되었으며, 2010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랐다. 지난 6월에 열린 폴리 옥션에서는 신수묵의 대표 작가인 리진과 쉬레이의 작품이 각각 신기록을 달성했다. 리진의 ‘민이식위천(民以食爲天)’은 320만 위안에, 쉬레이의 ‘다빈치에게 존경을 표함-천화경심(天花鏡心)’은 402만 위안에 거래되었는데 이는 각각 2008년과 2012년의 기록을 새로 쓴 것이다. 치바이스, 장다첸 등의 근대 수묵 작품을 구매하던 컬렉터들이 새로운 세대의 신수묵 작품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1 구원다(Gu Wenda), Study From Nature Series #6: Wind & Rain, 수묵 채색, 274×183cm, 2005
2 2013년 진르 미술관에서 열린 <재수묵> 전시 전경
3 2013년 폴리 옥션 창립 8주년 기념 춘계 옥션 현장
신흥 컬렉터가 사랑하는 신수묵
동시대 수묵은 특히 신흥 컬렉터층의 두터운 지지를 받고 있다. 동시대 수묵을 그리는 작가는 주로 1960~1970년대생으로 그들이 마주하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작품에 담는데, 이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신흥 컬렉터와 더욱 깊이 교감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컨템퍼러리 유화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 역시 수묵이 더욱 환영받는 요인 중 하나이며 고서화처럼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복잡한 감정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고전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도 수묵의 강점이라 할 수 있다. 옥션에서도 작가군이 풍부하고 유동성이 큰 수묵의 발전 가능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추세다.
그럼 중국은 왜 다시금 수묵에 집중하는 걸까? 지금 중국 미술은 전통문화를 어떻게 현대적으로 전환할 것인가 하는 난제에 직면해 있다. 서양을 뒤쫓고 모방하는 단계를 지나 중국 현대미술 깊숙이 존재하던 그들의 주체의식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동시대 수묵은 문화와 사상의 경계를 허물고 우창숴, 린펑멘 등 근대 예술가가 지속적으로 현대미술계 안에서 발전하게 하는 해결책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시장의 영향도 크다. 하루아침에 미술 시장의 전성기를 맞은 2008년 이후 유화 작품이 물밀듯 쏟아져 나왔고 서서히 그 거품이 꺼지자 투자자들은 새로운 목표가 필요해졌다.
이때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수묵이다. 또한 수묵은 갑자기 부상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배후에 오랜 기간 이어져온 학술적 힘이 내재되어 있다. “필묵은 영과 같다”라고 말한 우관중을 비롯해 1980~1990년대의 이론적 기초가 없었다면 지금의 수묵 열풍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공필화(工筆畵), 사의화(寫意畵) 등 수묵의 여러 화풍이 함께 가세해 신수묵 장르를 더욱 폭넓고 깊이 있게 만들고 있다. 1980~1990년대에 태어난 젊은 작가들도 수묵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중앙미술학원 석사 졸업생들이 모여 만든 ‘냉묵(Cold Ink)’이라는 작가 그룹이 대표적인데, 지난 8월 파크뷰그린 갤러리에서 수묵 선언을 제창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정식 미술 아카데미 교육을 받은 이들은 동서양이 만난 추상 수묵이야말로 전통의 현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이런 움직임은 최근의 수묵 동향이 반짝 열풍이 아님을 의미한다.
중국 작가들은 화려함을 벗어던지고 본연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보여주는 데 치중하던 것에서 벗어나 내면의 정신과 사상에 집중하고 있다. 수묵이 다시 중국 미술의 안주인 자리를 온전히 차지할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일본과 한국에 비하면 다소 늦은 출발을 보였지만 수묵 종주국인 중국 컬렉터들의 파워가 국제 미술계에서 점점 더 거세지는 만큼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수묵 예술도 밝은 미래를 보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주미정(C Comp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