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잡아두는
응축, 압축, 축약. 이전엔 표현되지 않은 잠재적 움직임을 조각으로 선보여온 김인배. 그가 자신의 작업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은 전동 공구 그라인더에 대한 단편적 생각을 늘어놓았다.

시간의 축을 타고 벌어지는 사건을 조각으로 만드는 김인배 작가와 그의 디월트 그라인더.
인간은 본래 말을 하는 것부터 자신의 생각을 통역하는 거라고 할 수 있잖아요. 얼마 전 전화 통화에서도 그라인더에 대해 많은 얘길 꺼내놨는데 김인배 작가에게 그라인더란 무엇인가요? 꼭 필요한, 그러나 위험한 도구죠.
그렇게 단순해요? 그라인더는 언제 주로 쓰세요? 절삭과 연마 작업을 할 때 써요. 절삭은 작업의 골조가 되는 단단한 쇠를 제가 원하는 크기에 맞게 잘라 조절하는 걸 말하고, 연마는 그라인더에 사포날을 끼워 거친 표면을 가는 걸 말해요. 둘 다 중요한 과정이죠.
조각의 표면을 매끄럽게 할 때도 쓰지 않나요? 아니요. 저는 필요로 하는 쇠에 처리해야 하는 단단한 것이 붙어 있으면 그라인더를 쓰지만, 그게 부드러운 거면 샌더기를 써요. 그라인더 하나로 얼버무리기엔 두 기계의 힘 차이가 크죠.
작업할 때 대략 몇 개의 공구를 쓰세요? 한 10개쯤 되는 것 같아요. 핸드피스부터 열풍기, 샌더기, 에어건 등.
요샌 외부에 작업을 맡기는 작가도 많잖아요. 심지어 작업실 없이 공장에서 작업을 완성하는 작가도 있고. 작품의 특성상 그런 공정은 불가능하시죠? 저도 외부에 맡기는 게 전혀 없진 않아요. 에디션 작업은 외부에 맡기는 편이죠. 한데 그것도 작업 초기부터 그런건 아니고, 어느 정도 입체로서 마감됐을 때 맡기죠.
실은 성격상 아무것도 외부에 맡기지 않는다고 할 줄 알았어요 . 모르겠어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요. 외부에 무엇을 맡기느냐 안 맡기느냐의 차이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업체에 뭘 맡긴다면 (결과물이) 잘 나오지 않았을 때 그걸 작품으로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대한 고민도 이루어져야죠. 작품이란 게 원래 모양만 잘 나온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럼 뭘 더 해야 하죠? 한 구상이 작품화될 때 표면적 완성도엔 신경 쓰지 않는 작가도 있지만, 그 반대인 사람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의 기준이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한데 그것과 별개로 전 뭘 맡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면 늘 업체랑 싸우니까.

그라인더를 처음 쓴 건 대학 수업 때였겠죠? 네. 대학교 1학년 조소 수업 시간에 처음 썼어요. 학교에서 단체로 사면 싸다고 해서 큰맘 먹고 보쉬 제품을 샀죠. 그런데 한 번도 못 써보고 도둑맞았어요. 사물함에 넣어놨는데 당시 뉴스에까지 난 ‘홍대 사물함 털이범’의 표적이 됐죠. 그때 충격을 받아 한동안은 어떤 공구도 사지 않은 게 기억나요.
한데 지금은 공구도 많고, 디월트의 제품도 여러 개를 쓰고 있어요. 이유가 있나요? 대학 졸업 후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 공구를 사려는데 디월트 제품이 가장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매장에 가서 이것저것 손에 쥐어봤는데 디월트가 그립감이 참 좋더라고요. 제가 손이 커서 기계를 잡을 때 꽉 찬 느낌을 좋아하는데, 디트월 제품이 대체로 그랬어요.
한 번쯤 원래 용도 외에 다른 용도로 그라인더를 써보기도 했나요? 네. 전압을 낮춰주는 슬라이닥스를 이용해 그라인더 날이 도는 속도를 임의로 느리게 해서 써본 적이 있어요. 날이 천천히 돌게 해 미세한 작업을 하려 했죠. 그라인더는 원래 날이 도는 속도를 조절할 수 없거든요. 근래 들어 속도를 조절하는 그라인더가 나왔다는 얘길 듣긴 했지만요.
그렇게 임의로 속도를 늦춰 돌리니 작업이 잘되던가요? 아니요. 날이 조금 돌다가 망가졌어요.(웃음)
한데 왜 그런 단순한 기능을 기계에 넣지 않았을까요? 아마 그걸 쓰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아서겠죠. 목공 쪽 사람들이야 그라인더 외에도 공구가 많고, 공사장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날의 힘만 세면 될 테니까요. 특별히 그런 기능을 만들 필요가 없었겠죠.
미술인을 위한 공구는 아니다, 이 말이죠? 맞아요. 그라인더의 세계에서 작가는 늘 소수예요. 그라인더를 쓰는 전체의 1%나 될까요?
그간의 작품에 대해 이런 말이 더러 있어요. “작품 속 불필요한 소재를 생략하고, 조각의 움직임과 순간을 포착하는게 뛰어나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제 작품이 순간을 포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지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그게 ‘순간’이 아니거든요. 제 기준에서 순간은 상대적 개념이에요. 일례로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하루 정도는 순간일 수 있겠죠. 물론 제가 만든 조각이 정지되어 있기 때문에 ‘순간’으로 표현되고, 제가 남들이 흔히 다루지 않는 걸 조각으로 만들고 그것이 전체를 이루는 구성상의 개념 때문에 ‘순간’으로 표현되는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전 그런 개념을 따로 정해두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이상하게 들릴 때가 있어요. 사실 제 작품엔 그 ‘순간’이 되게 이상하게 들어가 있거든요.
어떻게 이상하게요? 이를테면 어느 한 찰나를 찍은 사진을 보고 그걸 작품으로 옮기는 게 아니라, 순간을 보는 ‘기간’이 다른 거예요. 시간의 여러 축을 타고 벌어지는 모습을 멈춰 있는 조각으로 옮기는 개념이죠. 그래서 그 순간이 흔히 말하는 그 ‘순간 ’이 아니란 말이죠.
그럼 ‘순간’이란 말을 쓰면 안 되겠네요. 하지만 순간처럼 보이니까요.
이렇게 개념 하나로 긴긴 이야기가 나오는 주제에 대해 미술과 관련되지 않은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기도 하나요? 이런 이야긴 하면 할수록 작품에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시도는 많이 하는 편이에요. 한데 전부 (대답이) 따뜻하진 않더라고요.(웃음)
직장인처럼 매일 작업실에 출근하시잖아요. 그럼 작업실에서 혼자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시간도 많을 것 같은데, 그런 작업이 주로 스케치로 이루어지는 편인가요? 아님 시뮬레이션까지 가나요? 예전엔 스케치로 끝났지만, 요샌 만들어보는 게 조금 늘었어요. 이전엔 스케치와 작품 사이의 모형이 없는 게 작업 과정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입체’라는 작은 시뮬레이션 과정이 들어가도 되는 시기가 온 거죠. 작업의 흐름상 그래요. 그래서 요샌 작은 모형을 조금 만들고 있어요.
시뮬레이션 작업에도 공구를 쓰세요? 무게를 제법 싣는 축을 만드는 작업이라면 쓸 수 있죠.

다시 그라인더 얘기로 돌아와, 자주 쓰는 물건일수록 편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 쓰는 그라인더는 어때요? 그라인더 얘기로 한정한다면 불편한 건 따로 없어요. 그보다 좀 더 안전하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요? 쓸 때마다 뭔가 위태위태하세요? 이미 충분히 안전하긴 하지만 워낙 강하게 칼날이 도는 기계라 언제든 사고가 날 수 있거든요. 사실 그라인더의 경우 외형만으로도 위험하단 느낌이 들어요.
자주 사용하긴 해도 위험하다는 생각은 늘 하는군요? 그래서 되도록 잘 안 쓰려고 하긴 해요. 필요하지만 가능한 한 안 쓰려고. 기능이야 좋지만 되도록 안 쓰려고요.
그런데 이렇게 뭔가를 안 쓰려고 하는 사람과 그것에 대한 얘길 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아니요. 역설적이지만 자명한 예술의 세계니까요.(웃음)
디월트라는 브랜드를 사람에 비유한다면 어떤 이미지일 것 같아요? 글쎄요. 아무래도 섬세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아요. 그냥 해야 하는 걸 하는 그런 느낌? ‘스탠더드’가 너무 끝까지 떨어지진 않는 사람? 평균 체형이긴 한데, 체구는 좀 있을 것 같아요.
‘인간 말종’은 아니란 거죠? 네, 큰 사고는 안 쳐요. 하지만 맡은 일은 끝까지 잘해내는 사람. ‘대기만성’형 같은 느낌.
앞으로 어떤 조각을 하고 싶으세요? 사실 요새 되게 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뭔가를 ‘압축’하는 작업인데 잘 안 되고 있어요. 얼마 전에 뭔가나 하 나오긴 했는데, 여러 개를 조금 더 효과적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까부터 느꼈는데 작업 하나하나에 많은 생각이 응축돼 있는 것 같아요 . 앞으로 그게 점점 단순하고 단단해질 거란 생각도 들고요. 결국 나중엔 작고 단단한 공 같은 심플한 조각을 만들 것도 같고. 그것으로 된다면야 마음이 편하고 좋겠죠. 근데 제가 공 하나를 만들고 남들 앞에서 떳떳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아직은 무리일 것 같아요.
가까운 시일 내에 볼 수 있는 김인배 작가의 전시가 있나요? 9월에 하이트컬렉션에서 그룹전이 있어요. 그때 새 작품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김인배
갤러리스케이프의 <차원의 경계에 서라>전을 시작으로 아라리오갤러리 천안의 <요동치는 정각에 만나요>전,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점·선·면을 제거하라>전 등을 통해 생동하면서도 정지해 있는 것에 관한 조각 작업을 선보여왔다. 예나 지금이나 껍데기나 관습을 벗어나려는 독창적 움직임과 태도에 관심이 많다.
디월트(Dewalt)의 5인치 소형 그라인더(DWE8110S)
720W의 강력한 소비 전력으로 1만2000rpm의 고속 절단이 가능한 전동 공구. 184mm의 슬림한 본체 둘레로 작업의 피로감을 줄이고, 공기냉각 시스템으로 발열을 최소화한다. 미세한 절삭 날이 있어 사용하기 까다롭지만, 익숙해지면 꽤 볼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섬세하진 않지만 할 일은 꼭 해내는 사람, 말하자면 ‘대기만성’형 공구 디월트 그라인더. 이전에 비해 부쩍 그라인더 사용이 늘었다는 김인배 작가는 오는 9월 그룹전에서 신작을 선보인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