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순정은 바래지 않는다

LIFESTYLE

소설 <당신>에서 노년의 절절한 순애보에 대해 쓴 소설가 박범신의 문장에는 나이를 무색하게 하는 젊음이 있다. 푸른 감수성과 열정을 지닌 작가와 나눈, ‘문학이 곧 사랑이고, 사랑이 곧 권력’인 이야기를 전한다.

 

박범신 작가를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평창동에 자리한 그의 자택. 강추위가 지나가고 바람 느낌이 조금쯤 가벼워진 날이었다. 논산 집필실과 서울 집을 오가며 생활한다는 그는 일행에게 흔쾌히 자택의 서재를 공개하겠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는 최근 소설집 <러브 레플리카>를 출간한 윤이형 작가와 함께했다.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해 2014년 제5회 젊은작가상, 2015년 제6회 젊은작가상과 제5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한 그녀는 작년 교보문고에서 기획한 행사 ‘10인의 한국 작가’에서 ‘박범신이 주목한 젊은 작가’로 꼽히기도 했다. 당시 박범신은 그녀를 두고 “예민한 감성과 남다른 통찰을 지녔으며 형식의 진부함을 넘어서려는 젊은 작가다운 모색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고 평했다.
지난해에 칠순을 맞은 박범신은 자신의 문학 인생 42년을 총망라한 7권의 중·단편 전집을 펴냈고, 이에 맞춰 그의 제자이자 문학평론가인 박상수는 스승의 문학 인생사를 담은 <작가 이름, 박범신>을 엮어 그의 방대한 문학 연대기를 정리했다.또 1999년 발표한 소설 <침묵의 집>을 전면 개작해 <주름>을 출간했으며, 신작 <당신>까지 펴내 작년 한 해 동안 총 10권의 책이 나왔다. 그는 42번째 장편소설 <당신>에서 저물어가는 인생을 젊고 뜨거운 문장으로 그렸다.
치매에 걸린 70대 노인의 사랑에 대해 쓴 박범신과 미래적이고 낯선 방식으로 사랑의 감정을 파고든 윤이형의 대화는 서서히 달아올랐고, 자연스럽게 깊어졌다. 서재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문학에 대한 사랑, 인간에 대한 사랑,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사랑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윤이형(이하 윤) 선생님의 <당신>을 읽으면서 놀라웠어요. 주인공들은 노년인데 저보다 젊은 사람이 느껴져 소름이 돋는 순간이 있었죠. 노년과 청년이 어떻게 공존 가능하죠?

박범신(이하 박) 개인의 문장은 결정돼 있는 것 같아요. 작가가 전략적으로 어떤 문장을 선택해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니죠. 내 문장의 감수성이 젊은데 그걸 피할 수 없어요. 소설을 쓰면서 바로 그 부분이 딜레마였지. 노년에 걸맞은 문장을 써야 소설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써보니 그게 안 됐어요. 불가능했어. 마치 1980년대처럼 담백한 리얼리티가 있는 문장을 써보려고도 했지만 우선 내가 재미없고, 나 자신이 반영되지 않으니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냥 써버렸지. 일흔 넘은 노인에게 젊은 옷을 입힌 셈이 됐어요.

그런데 전혀 이상하지 않고, 인간이란 존재가 그럴 수 있겠다 싶었어요.

언제나 내겐 전 생애의 나이가 다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백 살이 넘을 때도 있고 여전히 스무 살일 때도 있어. 돌아보면 고등학교 때가 지금의 나보다 인생을 더 잘 이해하기도 했죠. 다만 불편한 건 세상에는 나이에 합당한 문화적 양식 같은 게 정해져 있다는 점이지. 기본적으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땐 일흔의 나이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만, 글을 쓸 때는 내 안의 모든 나이를 경험해요.

<당신>은 순애보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셨어요. 아내에 대한 헌사도 붙이셨고요.

오래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해요. 수십 권 중에 한 권쯤은 아내에 대한 헌사를 붙이고 싶었죠. <당신>의 출판기념회를 할 때 아내에게 참석하라고 해서 헌사를 읽었는데, 뒷자리에 있어서 표정을 못 봤어. 끝나고 나서도 아무 말 안 하더라고. <은교>가 영화화되면서 러브 스토리에 초점을 맞췄지만 사실 그 소설이 연애소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늙어가는 고통과 그것에 대한 반역의 마음을 그린 작품이지. 하지만 <당신>은 사랑 이야기가 맞아요. 젊은날 사랑을 완성했다고 해도 변할 수 있는데, 이건 죽음을 배경으로 한 순애보야.

선생님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많은 사람이 위로를 얻기도 하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이 세상에 에로스가 멸종됐다고 생각해요. 삶의 조건이 삭막하고 오해도 많고, 피도 눈물도 없이 무참한 것이 많은데 이런 세상과 싸우는 전략으로 사랑이란 게 아직 유효하다고 생각하세요?

내 무기가 바로 작가로서 에로스가 아닌가 싶은데, 에로스보다는 순정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나한텐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순정이 있고, 70년을 살았지만 무뎌지지 않았어. 그게 강력하게 세상과 맞짱 뜨는 내 무기야. 사랑은 권력이에요. 물론 삶의 전략도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죠.

두려움 때문에 소설을 쓴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늘 견딜 수 없고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을 때 온 몸을 던져 한 작품을 쓰고 빠져나오는 것 같아요. 이번 소설을 쓰신 다음에는 두려움이 좀 해소됐나요?

평상심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누가 글을 쓸까 싶어. 추락과 상승을 거듭하고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존재가 작가야. 나도 그렇지. 감정에서 추락과 상승을 거듭하는 건 우울증인데,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나는 죽음을 가까이 느꼈어요. 그런데 글을 쓰면서 그걸 이겨낼 수 있었어. 다른 방법은 일시적이야. 그러니까 난 살려고 쓰는 거지. 불안정한 상태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앞으로 나아가요. 어떻게 보면 그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는 게 소설이지.

저는 오히려 글을 쓰면서 우울한 때가 있었어요. 쓰면서 자꾸 욕심이 생기고 마음대로 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독자를 좀 무서워하는 편이라 독자가 뭐라고 하면 이걸 고쳐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어요. 이제는 괜찮아졌지만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어느덧 그 에스컬레이터에 몸이 실려 있으니까. 그냥 가는 거야.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지나온 길에 절벽이 있었고 개울도 있었고 위험한 짐승도 있었구나 느끼지. 하지만 정작 글을 쓸 땐 자아도취에 빠져 황홀감을 느낄 때도 있어요. 그런 것도 필요하지. 윤이형 작가의 <러브 레플리카>를 읽었는데, ‘어른이 되어가느라 지금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보다 한 개인으로서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힘듦을 토로하는 작품으로 보였어.

전 사실 어른이 아니라는 사실이 힘들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아닌 것 같아요.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지만 의지할 것을 잃어버리고 비로소 단독자로 서는 게 어른이 되는 거야. 나이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쿤의 여행> 같은 작품은 여실하면서 상징적이었어. ‘쿤’에 대해서도 미주알고주알 설명하지 않고 여백을 남겨 미학적 성과를 거둔 작품이지. 작가가 자기 문장을 하나 갖는 것은 놀랍고도 강력한 힘이자 에너지야. 윤이형의 소설을 보면서 10년 후, 20년 후 어떤 작가가 될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어요.

그렇게 젊은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으시는 줄 몰랐어요.

많이 읽으려고 노력해요. 난 젊을 때 문단을 잘 몰랐어. 시골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처음엔 문단이란 게 있는지도 몰랐지. 요즘 젊은 작가들은 그걸 모를 수 없는 문화적 환경에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론 좀 안타까워요.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문장을 따라갈 수 있을까. 어쩌면 젊은 작가들에겐 그게 짐이란 생각도 들고. 제자들에게도 종종 얘기해요. 많이 팔리고 안 팔리고를 떠나 글 쓰는 건 놀라운 일이고, 나도 모르게 독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일이라고.

글쓰기가 주는 행복이 있는데, 전 그게 아주 외로운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쓰실 때 더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나요? 그런 생각으로 스스로 전선을 허문다든지 독자들에게 어필하려는 노력을 하신 적이 있는지 궁금해요.

난 먼저 스스로에게 어필해요. 내 본질과 내 욕망이 그 어떤 독자보다 우선한다는걸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알았어. 의외로 난 독자를 그리 염두에 두지 않아. 그러니까 내 소설이 팔리는 건 스스로를 위해 복무하는 내 욕망과 감수성이 보편적 본질과 그리 멀지 않다는 얘기겠지. 오히려 독자는 관념적 존재예요. 책을 낸 후에야 독자가 보이지, 글 쓸 땐 멀리 있어요. 내 안에 숨어 있으면서도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처와 욕망이 내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걸 따라가요.

선생님은 너무 완벽주의인 것 같아요. 제 얕은 생각으로는 오랜 세월 계속 글을 쓰면 스스로에 대해 너그러워질 것도 같은데, 과거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 용납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지난해에 <주름>을 세 번째 개작해 내기도 하셨죠.

내가 자학적 성향이 있어요. 좋은 말로는 자기 성찰같은 거지. 항상 되돌아봐요. 내가 허위로 가득 차 있지 않았나 느끼기도 하고. <주름>은 아끼는 작품이라 개작했어요. 원래는 1700매 정도였는데 많이 줄였지. 내 소설은 행간을 좀 더 비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1993년부터 3년간 절필하신 적이 있죠. 절필 전과 후에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뭔가요?

젊은 시절에 신문 연재를 많이 했어. 세상의 변화에 따라 급급하게 기침을 토해내듯 썼다면, 절필하고 다시 글을 쓰면서 속에 쟁여놓은걸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좀 더 고민한 거 같아요. 좀 더 깊어졌다고 할까. 1996년 <흰 소가 끄는 수레>를 내놓으면서 다시 글을 썼는데, 작가의 고뇌에 대한 책이야. 이후 소설은 삶의 유한성에 대해 쓴 게 많아요. 머리는 흰데 가슴은 붉은 것에 대한 딜레마를 주로 반영했지. 절필 이후 내게 가장 큰 화두는 ‘갈망’이야. 불멸에 대한 욕망, 한계를 지닌 존재의 숙명과 고통이 지금도 여전히 날 사로잡고 있어요.

저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어요. 문장 자체를 쓸 수 없어서 일기조차 못 썼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런 시기가 지나가고 지금은 다시 쓸 수 있게 됐죠.

나이가 들면 그냥 보이는 게 있어. 윤이형 작가가 조심스럽게 한 발씩 문단에 자리 잡으려는 나름의 전략도, 문장 이면의 아픔도 다 보여요. 작가는 자신의 오장육부에 정직해야지, 감추고 살아남을 필요는 없어. 예술을 하는 우리는 가진 걸 솔직히 말할 줄 아는 용기가 있어야 해. 외롭고 힘들어도 이 사회에는 작가에 대한 관용과 기대가 여전히 남아 있어. 그러니 진실된 마음으로 정직한 글을 쓰면 존중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독자가 줄고 있잖아요. 특히 소설을 읽는 사람이 줄어서 아무리 용기를 내고 지키려 해도 젊은 작가들은 힘이 빠지기도 해요.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문예창작과 학생들과 많이 싸운 지점이 그거였어요. 난 문학을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강하거든. 그런데 학생들은 문학을 상대적으로 여겨요. 그렇게 갈팡질팡하고 비틀거리면 더 얻는 것이 없으니 악을 쓰면서 경주마처럼 가야해. 시작했으면 헌신해야지. 지금 트렌드에 비춰보면 촌스러울 수도 있지만 나한텐 문학순정주의 같은 게 있어요. 그런 걸 제자들에게 많이 요구하는 교수였죠. 그런데 요즘은 진지하면 개그가 되어버리는 시대잖아. 장엄한 순정주의에 매료되어 쓰다가 죽자고 생각하는 게 웃기는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트렌드만 따라가면 내가 작가라고 우길 만한 내적 근거가 없어지잖아.

한 인간으로서 선생님께서 지금 바라보고 있는 지점은 어디인가요?

나이 드는 건 한마디로 고독을 견디는 일이에요. 그것과 맞서나가는 게 고통이 될 테고. 지금은 삶의 테두리를 서서히 좁히려고 노력해요. 이번에 상명대학교 석교수를 사임했어요. 문학상 심사도 안 하고 외부 강의도 줄이고 있지. 지금 내가 믿고 있는 것은 문장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경우에도 내 문장과 순정을 확실히 믿고 그 힘으로 살아가려고 해요.

 

오후 햇살이 비치던 서재에 서서히 어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저녁 무렵. 자신의 문장을 믿고 계속 나아가겠다는 박범신은 3월부터 또 다른 작품을 연재할 예정이라고 했다. 가제는 ‘유랑’이라고. 동남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난민의 이야기다. 여름 즈음엔 그의 작품 <고산자>를 영화화한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개봉할 예정이니 올해도 다양한 방식으로 대중과 만나는 셈이다. 지난해에 그는 “작가 생활 42년이 한 번의 열렬한 연애처럼 흘러갔다”고 고백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 연애에 대한 열정은 앞으로도 사위지 않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뜨겁고 치열하며, 또 황홀할 거라고. 인터뷰를 마친 뒤 품은, 박범신에 대한 근거 있는 확신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