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레오 사운드
한 사람은 미술가고, 한 사람은 문학가다. 그간 둘은 언어 (소리/문자)의 물성을 미술로 그리고 문학으로 구현하는 것에 흥미를 느껴왔는데, 비로소 공통 관심사에 대한 대화를 주고받고자 한자리에서 만났다. ‘언어 시대의 도래’나 ‘난독’이니 ‘오독’이니 하는 관념적 주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쉬이 넘기는 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이 마치 스테레오 사운드 같다.
“독자는 결코 난독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소설가 김태용
소설집 <풀밭 위의 돼지>, <포주 이야기>와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벌거숭이들> 등을 펴냈다. 2008년 한국일보문학상, 2012년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자끄 드뉘망이란 이름으로 시집 <뿔바지>, <자연사>, <겨울말>을 냈다. 사운드 아티스트 류한길, 로위예와 함께 사운드 텍스트 그룹 ‘A.typist’에서 활동하며 비정기적으로 공연도 하고 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실험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작품이 오히려 더 문제가 돼야 한다”고 말하는 미술가 구동희
사진,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며 2010년 두산 연강상 미술 부문, 2012년 에르메스 미술상을 수상했다. 최근 시청각에서 개인전 <밤도둑>, 2014 올해의 작가상 등 국내외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기초입체조형 수업을 담당한다.
자꾸 소리에 빠져
김태용(이하 김)/ 요샌 개인적으로 소리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는데, 전시를 보러 갈 때도 작품의 외형보다는 사운드에 좀 더 집중하곤 해요. 언젠가 동희 씨 전시에도 소리를 사용한 적이 있죠? TV 아침 프로그램 <아침마당> 같은 데 나오는 아줌마들 음성을 따와 튼….
구동희(이하 구)/ 아마 PKM갤러리에서 한 전시일 거예요. 개별 작품은 아니고 ‘Extra Stimuli, 추가적 자극’이란 제목으로 몇 개의 오브제를 보여줬죠. 사과 상자에서 자장가가 나온다든가, 아침 방송에서 방청객 아줌마들이 동의하는 인위적 소리를 ‘원산지’라는 작품에서 나오게 해 주거니 받거니 하게 했어요. 그냥 작고 조용한 전시였죠.
김/ 맞아요. 근데 그런 소리를 가져와 전시장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주니 공기 중에 떠도는 소리가 굉장히 물질적으로 느껴졌어요. 그 소리가 슬픔과 기쁨, 분노 같은 감정의 일반적 자극을 넘어서는 것 같기도 했고요. 작품에 음악과 소리를 자주 쓰는 편인가요?
구/ 오래전엔 무분별하게 쓰기도 했어요. 음악 하는 이와 협업해 갖다 쓴다든가, 그게 아니면 진짜 ‘몰입’의 체제로 가기 위해 인위적 사운드를 붙이기도 했고. 근데 결국 나중에 보면 그게 굉장히 통속적인 몰입 장치란 생각이 들어 빼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그냥 ‘현장음’ 위주로 고르는 것 같아요. 그게 객관적 판단도 용이하고요. 그거랑은 다른 얘기지만, 좀 더 전에 작업한 ‘비극 경연 대회’라는 비디오 작품은 그냥 사람 목소리를 쓰기도 했어요.
김/ 그 작품 저도 봤어요. 우리가 문지문화원 ‘사이’에서 융·복합인지 뭔지로 협업할 때 제게 보내주셨죠.
구/ 그땐 촬영 전부터 아예 직업 배우들을 불러 (맘껏 울라고) 좀 무례한 제안을 했어요. 10명이 넘는 배우를 한 장소에 모아 각자 물리적으로 가장 빨리 우는 동시에, 우는 이유에 대해 말하도록 기술적 전제를 뒀죠. 각 참여자가 판단하기에 더 이상 못하겠다 싶으면 프레임 밖으로 퇴장하게 해 끝까지 남은 이가 자동으로 승자가 되는 걸 촬영했고요. 근데 실제 영상에서 보인 건 그들의 울음소리와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적 눈물이 다예요. 실은 그게 집합적 소음이나 다름없거든요. 너무 많은 이가 동시에 정면을 보고 울며 말하니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진 그냥 시끄러운 거죠. 아무리 뭐라고 각자 얘길 해도 분절적이고.
김/ 근데 전 그게 소리 ‘자체’라는 감정적 느낌보다는 소리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해했어요. 배우들도 상당히 과잉 연기를 했잖아요. 물론 진짜 자신의 슬픈 과거사를 떠올리며 얘기한 이도 있겠지만. 어쨌든 전 그걸 ‘소리’로 느끼기보다 당시의 상황과 표정, 이미지에 그들의 소리가 되레 먹힌다고 생각했거든요. 자극적인 동시에 폭력적이었다고 할까? 사람들이 카메라와 싸우는 것 같고, 옆 사람과도 싸우는 것 같은 불쾌한 느낌.
구/ 아무래도 개인이 무시된 채 ‘상황’만 펼쳐져서 그런 거 아닐까요? 감상자 입장에서 ‘거리’가 생긴 거죠. 배우들끼리도 일종의 합의된 경쟁 구도다 보니 몰입해야 하는데 옆 사람이 내는 소리를 ‘간섭 매체’라고 판단하는 거고요. 아무튼 그런 건 차치하고, 당시 작업을 그냥 커다란 덩어리로 보자면 그 자체가 기가 막힌 이상한 상황이긴 해요. 그리고 그 와중에도 마지막에 남은 최후의 1인이 실토하는 스토리는 자연히 듣게 되죠. 근데 그땐 아무리 허구라도 상대적 공감대가 형성되긴 해요.
김/ 사실 전 그걸 보며 사람들이 자신의 슬픔을 드러내기 위해 옆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을 예로 들면, 작가는 비극적 인물을 만들어 독자의 몰입과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한편으론 그 인물의 비극 때문에 주변인이 얼마나 괴로운지, 그게 얼마나 값싼 폭력이 될 수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하거든요.
구/ 근데 그것도 정형화되면 좀 웃길 것 같은데요? ‘통속성’이라는 게 생기니까.
김/ 어쨌든 감정 표현 도구로서 소리를 넘어 저는 소리 자체를 문장으로, 서사의 발화 형식으로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어요. 사람의 목소리, 어조, 생활 소음을 문장으로 구현하려는 고민도 하죠.
구/ 사람 목소리를요?(웃음)
김/ 네.
구/ 전 이야기가 재미있다면 제가 직접 쓰거나 말하는 것보다 일단 들어보는 게 좋아요. 공기 중에 곧 사라져버릴 소리나 구전을 통해 왜곡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는 건 좀 부담스럽거든요. 문학계에 몸담은 분들은 그게 생업이니 어떨지 모르겠지만.
김/ ‘문학계’라는 말이 좀 웃기지만, 요즘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글이 종종 눈에 띄긴 해요. 그게 전 우리가 사용하는 매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요. 카톡이나 트위터, 페북의 글도 사실 전부 ‘말’이잖아요. 문자로 보이지만 구술의 한 표현을 문자 언어로 착각해 기록하고 읽는 거죠. 그래서 순간적으로 그때의 상황에 맞게 말을 던지듯 쓰면서 모두들 작가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고요. 아무튼 논리나 흐름에 따라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 엄청나게 떠돌고 있는 것 같아요.
구/ 듣고 보니 그러네요.
김/ 요새 사람들이 좋아하는 각종 강연, 낭독회도 마찬가지겠죠. 책을 빌미로 작가와 명사를 만나 교양을 쌓는 것 같지만 실은 그게 아니죠. 아, 저 강의를 들으면 나도 현대 교양인으로 살 수 있겠다, 동시대 세계에 동참하고 있다,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구/ 맞아요. 테드(TED)형 인문학!
김/ 거기에 빠지면 결국 텍스트를 읽지 않게 돼요. 실제로도 요샌 사람들이 긴 글을 읽지 않으려 하잖아요. 이해와 내적 독서 경험은 줄어들어도 언어에 대한 집착은 훨씬 강해진 것 같아요. 보이는 언어, 들리는 언어가 더 주목받는 거죠.
구/ 미술은 오히려 언어의 의존도가 엄청 높아졌어요. 현대미술도 단순히 ‘언어’만 뚝 떼어놓고 보기보다 작품의 맥락뿐 아니라 내용의 해석, 주제에 대한 접근, 작가의 글쓰기 등 여러 면에서 ‘의미화’해 소개하죠. 근데 전 오히려 그런 강박 때문에 보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더 혼란에 빠지는 것 같아요. 아무튼 최근엔 미술에서도 ‘언어 정보 과잉’의 느낌은 분명 있죠.
김/ 맞아요. 현대미술이라는 것도 문맥이 중요해지면서 텍스트 의존도가 높아졌으니까요.
구/ 근데 시각언어는 좀 다른 면이 있어서 작품에 메시지가 따라오거나 텍스트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도 있는데, 그럴 땐 그 문자의 모양이나 맥락의 배치 등 조형 양식도 굉장히 중요하게 인식되요.
김/ 보이는 글자 자체의 물질성이죠?
구/ 네. 글자 자체를 어떻게 질료화하는지도 중요하죠.
2013년 PKM갤러리에서 열린 구동희 작가의 전 중 ‘Jangsu Apple’
사진 김상태
난독과 오독의 사정
김/ 그런데 미술에서도 ‘난독’이라는 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사실 전 문학에선 그게 불가능하다고 봐요. 오직 오독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죠. 독자 입장에서 뭔가 아주 열심히 ‘잘못’ 읽기를 한 뒤, 제 나름대로 지식과 정서의 깔때기로 언어와 이미지를 걸러 이해하려는 행위가 전 상당히 흥미로워요. 문학이란 공통된 이해와 합의를 위해 읽는 게 아니죠. 독자는 결코 난독을 하지 않아요. 사실 ‘난독은 없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원래 독서나 글쓰기 자체가 오독의 과정이니까.
구/ 조금 어려운 얘긴데요?
김/ 가장 최근에 낸 제 소설 <벌거숭이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아주 통속적인 상황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거든요. 아버지가 집으로 다른 여자를 데려온 것 같고, 어머니는 없는 것 같고, 새엄마랑 또 다른 누가 성행위를 하는데, 그걸 ‘나’는 보고 있고. 전 이렇게 통속극 같은 상황을 만들어놓고 이야기를 진행시켜요. 근데 그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전형적 서사 방식과 다르게 극이 전개되죠. 소설의 구조상 보통 A 다음에 B가 나오고, 다음에 C가 나오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근데 전 A 다음에 갑자기 F가 나온다든가, 다시 A를 가져와 쓰는 구조를 취하죠. 기존 서사의 통념이나 기술적 방법을 하나씩 빼거나 역전시키면 전혀 다른 게 나타나는데, 전 그런 작업 방식에서 재미를 느끼고 글쓰기의 한 방법을 배우죠. 그런 맥락에서 독자가 저의 ‘낯설게 하기’를 놓치는(혹은 읽어내는) 건 일종의 ‘참여’가 되는 거죠. 그런데 미술도 읽는다는 개념으로 가면 그렇지 않나요? 현대미술에서도 종종 ‘난해’나 ‘실험’이라는 말로 작품에 대한 이해를 오히려 막아버리지 않나요?
구/ 아니, 그보다 조금 전에 얘기한 부분 때문에 김 작가님의 소설을 문학계에서 ‘실험적’이라고 한단 말이죠?(웃음)
김/ 그게 그렇게 이어지나요?(웃음)
구/ 문학사적 계보 위에 얹는 거죠?
김/ 맞아요. 잘 읽히지 않는 작가들을 모아 ‘실험적’이라고 해요. 근데 사실은 그게 다 같은 ‘실험’이 아니거든요. 읽히지 않는 방식도 다양하다는 말이죠. 인물의 의식에 집착한다든가 이미지 묘사에 공을 들여 읽히지 않는 소설도 있고, 저처럼 형식적으로 ‘서사적 빼기’를 해 그런 소설도 있고.
구/ 근데 문예지에서도 그런 얘길 해요?
김/ 해요.
구/ 아무리 관용적으로 수식한다 해도 그건 좀 웃긴데?(웃음)
김/ 아무튼 문제는 그게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건 어려우니까 읽지 마세요’라는 일종의 표식이 된다는 거죠.
구/ 맞아요. 미연에 정리해 차단하는 부분이 있죠.
김/ 전 사실 ‘실험’이란 말을 좋아하지만, 그렇게 매도되는 건 화가 나요. 물론 현대미술도 마찬가지일 테지만요. 어떤 특정 작품을 두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네? 오히려 읽는 게, 보는 게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버리긴 좀 그러니 그럼 이건 ‘실험적’, 저건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거죠.
구/ 근데 따지고 보면, 문학이든 미술이든 실험성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작품이 더 문제가 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웃음)
김/ 저는 농담처럼 말해요. “모든 게 실험이다.” 하지만 어떤 실험이냐가 중요한 건데, 추상적 언어로 작품을 가둬버리죠.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 가령 어떤 문예지 같은 데서 특집을 하게 되면 이 작가 넣고, 저 작가 넣고 하다 심심한데 실험적인 사람 하나 넣어야지 하면 ‘김태용’ 이렇게 되는 거죠. 계보학과 카테고리에 묶이면 다들 안심이 되나 봐요.
구/ 그러니까 대체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스토리텔링 중심의 서사를 쓰지 않는 작가를 그렇게 부르는군요?(웃음)
김/ 그런가? 그렇지요.(웃음) 사실 전 글을 쓰면서 ‘소설에서 스토리라는 게 과연 뭘까?’라는 질문을 계속 하는 것 같아요. 그런 기초적 물음이 글을 계속 쓸 수 있게 하는 것도 같고요.
구/ 스토리라는 건 지금 사실 나라에서도 문화 콘텐츠 육성의 일환으로 대유행인데, 그걸 제대로 못 좇고 있나 봐요.
김/ 맞아요.(웃음) 지금 전 국민이 스토리텔링 열풍이죠, 사실은.
구/ 한마디로 저마다 ‘사연’을 만들어야 하죠.
김/ 음악도 사연이 있어야 하고, 오디션 프로에라도 나가려면 개인사가 있어야 하죠. 사람들이 그런 것에 빠지니까. 한편으론 문학이든 미술이든 다 사는 게 지루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누가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해도 몰입이 되지 않잖아요. 아, 그리고 전 화이트 큐브 안에서 영상 작품을 계속 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요. 다들 그냥 쓱 보고 지나가죠. 아니면 중간부터 보거나, 계속 루프가 되니까.
구/ 그건 맞아요. 전 제 작품도 잘 안 봐요.(웃음) 생각해보면, 책을 정독하지 못하게 된 시기랑 영화관을 잘 안 가게 된 시기랑 맞아떨어져요. 이전엔 내용과 상관없이 거의 문자 중독처럼 깨알 같은 글씨도 다 읽었는데 이젠 집중이 잘 안 되거든요. 다른 매체의 등장이 몰입을 방해하기도 하고.
김/ 그래서 말인데, 미술이나 다른 예술도 그렇지만, 독자나 관객이 한참 그걸 보다 끊고, 지겨우면 나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근데 문학은 늘 첫 문장부터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적 독서 의식이 있는데, 그거 정말 필요 없다고 봐요. 더 이상 선형적 서사는 어떤 영향을 주지 않죠. 사실 펼쳐서 읽고, 궁금하면 다시 앞으로 갈 수도 있는 건데 말이죠. 전 그게 참여라고 보거든요. 사실 작품을 제대로 안 보거나 아예 보지 않는 것도 참여거든요. 작품에 대한 태도의 문제가 중요하겠지만 아주 강력한 참여죠.
구/ 잠깐 다른 얘기 하나 할게요. 아까 오전에 뉴스에서 본 건데, 앞으론 4D 극장의 체제를 전시를 보는 메커니즘에 도입한다는 얘길 하더라고요.(웃음)
김/ (웃음)
구/ 전 사실 무서워요. 이상한 기계 같은 걸 쓰고 깜깜한 데 들어가 뭘 하자는 건지. 뭔가에 집중하기 위해 사람 신체에 계속 재료를 갖다 붙여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니, 참.
김/ 문득 하나의 감각기관을 상실한 이들이 결국 인류의 구원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보는 능력, 듣는 능력, 말하는 능력을 상실한 이들은 오히려 즉각적 몰입이 차단되고 다른 감각으로 전이하는 능력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 이들이 오히려 축복받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거죠. 창작자란 온 감각을 여는 사람이 아니라 감각을 차단시킬 줄 아는 감각의 불구자가 아닐까….
구/ 아니, 그게 아니고 신체는 소모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기 때문에 임시로 용도를 변경하는 것도 어떤 예술의 창작 방법으로 나오지 않을까요? 눈으로 봐야 할 걸 적극적으로 귀로 듣는다든지 하는 거.
김/ 우리가 ‘사이’에서 협업할 때 제 글을 읽고 동희 씨가 전시장 바닥에 귀 모형을 붙인 게 생각나네요.(웃음) 언젠가 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데 “아, 여기선 소리가 들리네”라고 말하게 되는 시대가 진짜 올 순 있겠죠. 어떤 평면적 작품을 보고 있는데 정말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해봐요. 그렇게 되면 미술 감상법도 바뀌거나 사라질 테고. 근데 4D 시대의 끝엔 모든 매체의 궁극이 그렇듯 결국 포르노로 끝날 것 같아요. 그게 최종 답일 것 같아요.
구/ 초자극적인?
김/ 뭐, 인터넷도 어떻게 보면 포르노 때문에 발달한 거고, 최상의 초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최종 목표는 결국 ‘쾌감’이니까요. 육체적인 거든, 정신과 육체의 동시 쾌감이든, 결국 그걸 구현해버리면 끝이 아닐까 생각해요.
김태용 작가가 활동하고 있는 사운드 텍스트 그룹 A.typist의 아르코미술관 공연 현장
계속되는 감정 표현의 시대
김/ 아까 PKM갤러리 전시 얘기하다 생각난 건데, 동희 씨도 아침 방송이나 드라마 같은 걸 자주 보세요?
구/ 제 경우는 그걸 하도 기가 차서 보거든요. 근데 나이가 드니 그 심정이 이해가 가긴 하더라고요.(웃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가 그런 드라마를 보겠다고 외출 중에 시간 맞춰 집에 오는 걸 전혀 이해하지 못했거든요.
김/ 어떤 부분이요?
구/ 재벌가 가족부터 핏줄의 비밀, 질투, 오해 등 등장인물들이 눈을 희번덕거리면서 버럭버럭 고함을 지르는 것들이죠.
김/ ‘의외의 반전’도 있고.
구/ 그러니까 이 패턴은 왜 늘 여기서 지속되는가에 관한 의문? 근데 이게 갈수록 강도가 세지는 거예요. 그러다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혹시 ‘현실’이 더 셀 수도 있지 않을까? 전 사실 20대 초반까지 드라마를 현실과 ‘분리’해 생각했거든요. 저건 그냥 드라마야, 혹은 소설이야, 그러면서요. 근데 나중에 크고 보니 실제로 주변에서 (드라마와) 유사한 실화들이 보이더라고요. 더 나이 들면 그런 데이터가 쌓여 강도가 세지 않은 것엔 놀라지도 않게 될 거 같고. 나중엔 그냥 재밋거리처럼 보이겠죠.
김/ 사실 어떤 집안이나 드라마 같은 이상한 사건이 하나씩은 있죠. 한데 드라마는 그걸 너무 감정적으로 노출시키니 ‘감정의 과잉’ 상태가 되는 거고. 근데 정말 왜 그럴까요? 이런 과잉.
구/ 그건 그냥 ‘국민성’ 아닐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과 ‘화’가 많아서 그런지 ‘표현’하는 걸 정말 좋아하잖아요. 제가 TV를 보는 이유도 그래요. 어쩜 다들 그렇게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감정도 풍부할까?
김/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고 손쉬운 표현 매체가 발달해 그런 거겠죠. 시대가 좀 팍팍해지더라도 그 욕구는 줄지 않을 거 같아요.
구/ 가끔 이런 경우도 있어요. 예술가들은 아무래도 표현 욕구가 더 강하잖아요. 종종 친한 예술가 친구들 앞에서 “앞으로 표현 한 번 더 하면 -1점” 이런 얘기도 하고.(웃음)
김/ 다들 감정 표현을 너무 열심히 하려는 경향이 있죠. 그러다 보니 미술이나 문학, 연기 같은 걸 공부하려는 학생도 계속 느는 거고요.
구/ 맞아요. 어쨌든 문학을 하고 싶어 하고, 미술을 공유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줄지 않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김/ 근데 정말 나쁘지 않을까요?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문학병’, ‘예술병’ 환자가 넘쳐나고 있지만, 자가 치료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길 바랄 뿐이죠.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상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