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담은 와인
‘부르고뉴의 전설’로 불리는 도멘 비조의 와인메이커 장 이브 비조는 직관과 침묵, 기다림을 통해 와인을 빚는다. 컬트 와인으로 추앙받지만, 정작 본인은 ‘마시는 와인’을 만든다는 그의 양조 철학과 신념에 대하여.

도멘 비조의 주요 포도밭은 테루아의 개성이 뚜렷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와이너리는 어떻게 구성되며, 이들이 도멘 비조의 정체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도멘 비조의 포도밭 규모는 약 5만㎡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포도밭은 본 로마네고, 모레 생 드니, 에셰조, 마르사네 샤피트르, 레 비올레트 등을 비롯해 2022년부터는 코르통과 코트 드 본도 포함되었어요. 도멘 비조는 처음에 약 2만㎡ 규모로 시작했습니다. 은퇴 전 이 면적을 두 배로 키우는 것이 목표였는데, 30년 동안 와인을 만들며 그 꿈을 이룬 셈이죠.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데 꿈·전략·실무 세 가지 요소가 맞물려 작동하며, 각 포도밭의 개성과 특징이 방향을 이끌어줍니다.
당신의 양조 철학은 직관, 침묵, 기다림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되곤 합니다. 이러한 철학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신념에서 비롯되었나요? 1990년 네팔에 갔을 때의 경험이 큰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시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거든요. 와인은 병 속에 담긴 시간이고, 때문에 재촉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그저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철학이 더 명확해진 계기는 함께 일하는 에르베 비즐과의 대화 덕분이었어요. 그가 “퀴베 하나와 의자 2개만 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로운 와이너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을 때 제가 지향하는 양조 방식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죠.
자연 발효, 무여과, 노트 부재 등 기존 양조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접근 역시 도멘 비조만의 특별함을 부각하는 요소로 보입니다.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고, 점점 무언가를 덜하면서 형성된 양조 방식이에요.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글을 쓸 때 처음과 끝만 정하고, 그 사이에는 나 자신을 덜 담을수록 더 나은 작품이 된다”고요. 와인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포도알과 병 사이에 제가 덜 개입할수록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습니다. 와인은 제 창작물이 아니라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기 때문이죠.
가장 비조다운 와인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도멘 비조가 추구하는 와인이 궁금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비조다운 와인이란 고전적 스타일을 따릅니다. 밸런스, 섬세함, 정교함은 물론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균형’이 핵심이죠.
도멘 비조의 방향성을 잘 보여주는 와인을 소개해줄 수 있나요? 도멘 비조의 플래그십 와인으로 1년에 1000~1500병 생산하는 에셰조의 2005년 빈티지는 레퍼런스라고 할 만한 와인입니다. 단일 퀴베로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특징을 지닌 레 자셰의 경우 2014 빈티지를 언급하고 싶네요. 생산량이 매우 적은데도 굉장히 풍부하고 밸런스가 좋습니다. 최근에는 본 로마네 2019가 인상 깊었어요. 제가 만들고 싶은 와인을 화려하게 표현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미묘하게 다른 기후 조건 속에서도 비조다움을 유지하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탐색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포도 재배나 양조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기후에 맞춰 계속 바뀌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은 ‘목표’입니다. 어떤 스타일의 와인을 지향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그 본질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금까지 와인 생산 여정 중 가장 도전적인 해와 그로부터 얻은 통찰이 궁금합니다. 2018년이 가장 큰 터닝 포인트였어요. 우리가 알던 숙성, 양조, 포도 재배 방식이 모두 무너진 해였죠. 이후 모든 것을 다시 탐색하는 단계로 접어들었어요. 지금은 남부 프랑스의 건조한 지역에서 피노 누아가 어떤 방식으로 자라는지 실험하며,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입니다.
수십 년간 한결같이 포도밭을 지켜왔어요. 아침이면 당신을 밭으로 이끄는 열정과 동기부여는 어디에서 비롯하나요? 제가 포도와 와인을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예요. 아니면 너무 어리석어서 멈추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죠.(웃음) 아들이 도예를 하는데, 가끔은 도자기 만드는 과정과 와인 빚는 방식이 매우 닮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도예는 흙을 다루고, 굽고, 형태를 만들다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깨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죠. 이처럼 완성된 결과물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무한 반복이 와인에도 똑같이 적용되니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와인’은 무엇인가요? ‘마시는 와인’입니다. 언젠가 참석한 포럼에서 들은 말이 기억나네요. “좋은 와인은 넷이 마시는 와인이고, 더 좋은 와인은 둘이 마시는 와인, 최고 와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마시는 와인이다.” 최근 어떤 분이 마음에 둔 상대방에게 고백하는 자리에서 제 와인을 마셨고,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하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와인이 만들어내는 그 이상의 경험, 감정이 진정한 가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것만이 예술이 아니듯, 와인 역시 풍부한 맛과 향을 넘어 감동을 전할 때 정말 좋은 와인이 아닐까요.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사진 조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