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초월한 서사를 담은 손 짓
국립무용단의 신작 <미인>의 안무를 맡은 정보경의 몸짓에는 시대를 초월해 흐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스며 있다.

Mnet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에서 한국무용 코치로 활약하며 무용수들에게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정보경이 4월 3일부터 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무용단의 대형 신작 <미인>의 안무가로 나섰다. 방송을 통해 대중적으로 얼굴을 알렸지만, 무용계에서 그의 존재감은 꽤 오래전부터 독보적이었다. 2007년 <절벽 아래 집>으로 데뷔한 후 2010년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액트 페스티벌’에서 동양인 최초로 그랑프리를 받으며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고, 전통과 현대가 조화로운 감각적 작업을 통해 ‘컨템퍼러리 한국무용의 창시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런 그가 안무를 맡은 <미인>의 지향점은 한국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정의해 독창적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 신윤복의 ‘미인도’가 연상되는 무대를 시작으로 산조 살풀이, 칼춤, 북춤, 부채춤, 탈춤 등 11가지 춤이 70분간 빠른 전개로 펼쳐진다. 평창 동계 올림픽 개회식부터 연극 <맥베스>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한 양정웅 연출가와 ‘K-패션의 선구자’라 불리는 서영희 스타일리스트 등 한국 예술계의 어벤저스를 방불케 하는 창작진이 참여하는 이 작품에서 정보경은 전통적 움직임과 가락, 현대적 미장센과 사운드를 유연하게 넘나드는 몸짓을 선보인다. 공연을 한 달여 앞둔 초봄, 작업에 한창인 그를 국립극장에서 만났다.

작품 준비로 한창 바쁠 것 같아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현장 작업을 시작한 지 보름 정도 되었어요. 매일 바쁘게 디테일을 매만지며 안무를 다듬고 있습니다. 얼마 전 아이를 출산해 이제 120일 정도 되었는데, 100일 막 지나고 국립무용단과 작업하기 위해 공연장에 나왔으니 제겐 복귀작인 셈이에요.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저 역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더라고요. 이런 점에서 <미인>은 제 인생의 새로운 막과 다름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잘 해내고 싶고, 기대도 됩니다.
<미인>은 어떤 작품인가요? 소개 부탁해요. ‘한국적 미를 동시대적 시선으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무용수의 몸을 통해 탐구해나가는 작품이에요.
안무를 구상하며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요? 이번 작품을 위해 젊은 단원부터 나이가 많고 경력이 오래된 단원까지 많은 분과 함께 작품을 만들고 있는데요. 이처럼 다양한 연령대의 무용수와 한자리에서 작업할 수 있는 것은 국립무용단이기에 가능한 특별한 매력이라고 생각해요. 밖에서 작업할 때는 아무래도 비슷한 연령대의 무용수, 제 움직임을 잘 이해하는 친구들과 작업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이런 현장에서 작업하며 요즘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미인’이란 무용수 몸에 켜켜이 쌓인 시간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하는 점이에요. 제가 디렉팅하는 내용을 뛰어넘어 무용수마다 각자 몸에서 흘러나오는 고유한 이야기가 있거든요. 처음에는 집단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의 아름다움에 좀 더 포커싱했다면, 지금은 그 안에서 굳이 만들어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개개인의 아름다움을 잘 담아내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여성 무용수만으로 무대를 구성한 점도 특별하게 다가와요. 여성의 신체만이 전할 수 있는 양면성, 연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무언가를 내재한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작품에 ‘흑자’라는 젠더리스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그가 모든 내용을 설명해주거든요. 그래서 무대 전체의 이미지는 여성 무용수의 움직임만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2023년 <넥스트 스텝 Ⅲ: 안무가 프로젝트>에 이어 국립무용단과 또 한 번 협업을 진행 중인데요. 국립무용단과 함께하는 작업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국립무용단은 미래의 고전을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곳에서 하는 모든 일은 언젠가 전통이 되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겠죠. 그런 작업을 함께 한다는 게 늘 영광이고, 제 작업에도 큰 원동력이 됩니다. 이번 작품 역시 단순히 잘 보존된 오래된 것을 무대 위에서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동시대 시각으로 확장하고 재해석해 새로운 방향으로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어요.
컨템퍼러리 한국무용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통과 현대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업을 이어왔어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노하우가 있나요? 본질을 놓치지 않는 것. 제 춤의 시작점, 제 몸을 이루는 뼈와 살, 내뱉는 숨결마저 한국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거든요.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지 않으면서 주변을 감싼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노하우라면 노하우인 것 같아요.
한국무용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요? ‘몸의 흐름’이라고 생각해요. 한국무용의 큰 특징인데, “기운이 순환한다”고 이야기하거든요. 예를 들어 한국 춤을 추는 무용수들은 땅을 딛고 가만히 서 있어도 멈춘 게 아니라 어떤 기운이 계속 움직이는 듯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어린 시절 외국 무용단에서 활동하고 싶어 해외에 나간 적이 있는데, 오디션에서 저를 택한 안무가들이 하나같이 한 말이 “네게서 느껴지는 몸의 흐름은 이곳 무용수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그 경험이 제겐 굉장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줬죠. 한국무용의 매력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해요. 끊임없이 순환하는 에너지요.
앞으로 계획과 언젠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일단 4월에 <미인> 공연이 있고, 하반기에는 서울예술단과 작업이 예정돼 있어요. 10월부터 11월까지는 솔로 공연으로 유럽 투어가 잡혀 있고요. 그러고 나면 한 해가 다 갈 것 같아요. 제 인생 목표가 ‘행복하게 살자’예요. 언제 가장 행복한지 떠올려보면, 커튼콜을 받을 때더군요. 최선을 다해 작품을 준비한 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저를 바라보며 박수를 쳐줄 때 정말 큰 보람과 기쁨을 느끼거든요. 지금껏 이어온 한국 춤 컨템퍼러리를 계속 이어가면서 멋진 모습으로 오랫동안 무대 위에 서고 싶어요.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사진 조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