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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명가의 조건

FASHION

올해로 모습을 드러낸 지 176년이 된 스위스 워치메이킹의 자랑, 파텍필립. 지난 5월 <노블레스>는 제네바를 비롯한 스위스 시계 산업의 중심지를 찾아 파텍필립의 시계가 완성되기까지 과정을 세세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이들이 최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하이엔드 시계 명가가 되는 과정은 이렇다.

2015년 신제품 애뉴얼캘린더 5905P

더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

손으로 하나하나 홈을 파내고 자리를 찾아가는 케이스 측면의 다이아몬드

100년도 넘은 엔진 터닝 기계는 여전히 케이스의 아름다움을 위해 사용한다.

조립 전인 플레이트와 여러 부품

파텍필립의 명예회장 필립 스턴(왼쪽)과 그의 아들이자 현재 CEO인 티에리 스턴

플랑레와트의 파텍필립 매뉴팩처 전경

시계를 공부하고, 시계에 대한 다양한 소식을 독자에게 알리는 일을 하며 늘 궁금한 것이 있다. 바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세계 유수의 경매시장에 등장하는 파텍필립 시계의 낙찰가다. 일례로 1933년 제작한 회중시계 1점(No.198.385 더 헨리 그레이브스 슈퍼컴플리케이션, 24개 기능을 지닌 시계)은 1999년 소더비 경매에서 1100만 달러(약 123억 원)에 낙찰돼 시계 경매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했고, 15년이 지난 2014년 같은 경매에 다시 등장했을 때엔 그보다 훨씬 높은 232만3700스위스프랑(당시 약 240억 원)에 주인을 찾아 자신의 기록을 경신했다. 어디 그뿐인가. 2002년 앤티쿼럼 경매에 등장한 월드 타임 모델(1939년, 41개 도시의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플래티넘 소재의 손목시계)은 45억 원을 기록하며 손목시계 경매 부문 최고가로 남아 있다. 게다가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시계 경매의 순위를 살피면 10위권 모델 중 절반 이상이 항상 파텍필립 모델이다. 도대체 파텍필립의 어떤 점이 전 세계 시계 애호가를 매료시킨 걸까?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왜 사람들은 길고 긴 시계 역사 중 고작 170여 년밖에 되지 않은 파텍필립을 ‘최고의 시계’로 생각하는가다. 한 해의 시계 생산량이 5만8000개에 달함에도 손에 넣기 위해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몇 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시계. 수많은 궁금증과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파헤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파텍필립의 매뉴팩처 투어에 나섰다.

소수의 매뉴팩처에서만 구사하는 스플릿세컨드 크로노그래프 5370 모델

통합 매뉴팩처의 위엄
현재 파텍필립의 매뉴팩처는 워치메이킹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여러 도시에 분산해 있다. 1996년 건립한 제네바 근교 플랑레와트에는 본사와 워크숍(부품의 가공 및 무브먼트 조립, 시계를 완성하는 곳)이 자리해 있고, 제네바에서 2시간 거리인 상티미에에는 다이얼 공방인 카드랑 플뤼키거(Cadrans Fluckiger), 라쇼드퐁에는 케이스와 폴리싱, 젬 세팅 공방이 한데 모여 있는 매뉴팩처가 있다. 예상했듯 각각의 공방에서 제작한 부품은 플랑레와트로 집결하고, 워치메이커의 손을 거쳐 시계의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수치상 정보를 간략하게 나열하면, 현재 파텍필립은 4만9000개의 기계식 시계, 9000개의 쿼츠 시계를 생산하며, 18개의 베이스 무브먼트를 가지고 55가지 다채로운 시계의 심장을 만들고 있다. 이를 위해 만드는 부품의 가짓수는 1만 개, 그 수는 1500만 개에 달한다. 제네바를 비롯한 여러 공방에선 2000여 명의 직원이 최고의 시계를 만들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다.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한국의 프레스 팀은 이틀에 걸쳐 앞서 언급한 공방을 하나하나 살폈다. 모든 시계 매뉴팩처가 그렇듯 파텍필립에서 일하는 이들은 철저한 분업을 통해 시계를 완성한다. 바늘구멍보다 작은(핀셋으로 집기도 불가능한!) 부품을 다듬는 직원, 순백의 그랑푀 에나멜링 다이얼을 완성하기 위해 세밀한 붓으로 염료를 바르는 장인, 100년이 훌쩍 넘은 엔진 터닝(기요셰) 기계로 부품에 정교한 조각을 새기는 장인, 각 공방에서 만든 수백, 수천 개의 부품을 매뉴얼에 맞춰 조립하는 워치메이커까지! 수작업이 전부던 시절에야 워치메이커 한 명이 책임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시계를 완성했겠지만, 수만 개의 제품을 만들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는 기계화와 분업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그들은 최첨단 기계의 도움을 받음에도 작은 부품 하나 다루는 데 옛 장인 이상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갖고 작업에 임했다. 취재 중 흥미롭게 다가온 사실이 있다. 이들은 시계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새 기술, 새 기계 도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장인의 손’을 통한 수작업만을 강조하는 여느 매뉴팩처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현재 이들은 레이저 커팅을 통해 다이얼에 부착할 인덱스를 완성하는데(보통 CNC 작업을 통해 완성) 시계업계에선 ‘유일하다’(그들의 표현) 했다. 그 차이는 눈이 아닌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고. 즉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최신 기술이 필요한 분야엔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얘기. 반면 이들은 신소재 상용화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 많은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선보인 실리콘 소재(항자기성에 마모가 적고 윤활유가 필요 없지만, 금속 소재에 비해 형태를 잡기 어렵다)에 대해 ‘거의 완성 단계’라 이야기하는데, 새로운 것을 빠르게 선보이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완성도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장인과 그들이 구사하는 숙련된 손맛은 시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거친 금속의 표면을 윤이 나게 하는 폴리싱 작업이나 화려함을 더하는 젬 세팅, 페를라주, 기요셰 등 장식 기법을 통해선 장인의 힘과 능력 그리고 무한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파텍필립 매뉴팩처링의 섬세함은 플랑레와트의 휠(톱니바퀴) 가공 공방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보통 휠 하나를 완성하는 데 20가지 공정을 거치는 반면, 이곳의 휠은 40여 가지 공정을 거쳐 완성한다고.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그 답은 디테일의 차이에 있었다. 심지어 작은 톱니바퀴의 톱니 하나까지 광을 내는 광경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모든 부품 하나하나가 폴리싱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이 파텍필립의 시계가 시계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이유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정성스레 다듬는 것. 이것은 미적 감각을 더하는 장인정신 외에도 시계를 안정적으로 또 정확하게 구동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또한 최신 기계로 만든 작은 부품은 일일이 검수 과정을 거치는데, 기계가 아무리 정확하게 깎아낸다 한들 원자재의 품질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부품은 가차 없이 폐기합니다.” 매뉴팩처 투어를 맡은 본사의 전문 가이드 알렉세이 마크로브의 설명이다. 다이얼과 케이스에 숨은 부분까지 섬세한 연마 과정을 거치는 것, 그것이야말로 파텍필립이 특별한 점이다.
무브먼트 제작 과정은 아쉽게도 보안상의 문제로 창문 너머로 지켜봐야 했다. 새하얀 가운을 입고 제네바의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창 아래에서 작은 부품 수백 개를 하나하나 채워나가는 워치메이커의 온화한 모습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부터 백발이 무성한 노장까지 한결같았다(에디터의 눈에는 하나같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 가운데 보기 힘든 인물을 만날 수 있었다. 파텍필립의 자랑이자 1989년 창립 15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시계 칼리버 89를 조립한 마스터 장인 폴 뷔클랭(Paul Buclin)이 그 주인공! 참고로 칼리버 89는 개발 기간만 9년, 33개의 컴플리케이션 기능을 위해 1728개의 부품을 조립한 현존하는 가장 복잡한 시계 중 하나다. 에디터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짓는 모습에서 뭔지 모를 오라를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전 세계 60여 개국에 판매하는 이들의 제품 수리를 맡고 있는 서비스 센터 부서. 보통 매뉴팩처를 방문할 경우 서비스 센터를 찾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이곳을 무척 심도 있게 소개했다. “우리는 창립 당시의 옛 시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생산한 모든 시계를 수리할 수 있습니다. 선조들이 이룩한 대규모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생산한 부품이 소진된 경우엔 매뉴얼에 맞춰 다시 제작합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건 시계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기 때문이죠.” 단순한 수리(repair)가 아닌 복원(restore, 멈춰버린 시계에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도 이곳에서 진행한다.
이틀에 걸쳐 공장 곳곳을 살피고 나니 투어에 나서기 전 파텍필립의 부사장 이브 카바디니가 진행한 프레젠테이션 내용이 퍼즐 맞춰지듯 정리됐다. 파텍필립은 스위스 제네바에 남은 유일한 가족 기업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운명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고, 투자와 개발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작은 부품 하나를 어떻게 만들고 갈고닦을 것인가도 모두 자신의 생각과 힘을 통해 결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책임감을 갖고 제품을 완성할 수밖에! 이들은 또한 제네바 주에서 생산한 최고 품질의 시계를 가리는 ‘제네바 실’ 인증 대신에 2009년부터 자체 품질 인증 마크인 ‘파텍필립 실’을 채택했는데, 이는 매뉴팩처 자체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의 결과가 아닐까? 시대를 초월한 미학을 중시한다고 한 그의 얘기도 각 공방과 그곳에서 일하는 장인의 손맛을 통해 증명됐다. 이쯤 되니 매뉴팩처의 비밀을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굳은 결심은 무한한 찬사와 감동으로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시계가 고장 났을 때 수리는 가능하지만, 그보다는 처음부터 고장 나지 않는 시계를 만들기 위해 기본기를 탄탄하게 잡으려 하는 그들의 생각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파텍필립이 세계 최고의 시계메이커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건 다른 데 있지 않았다. 시계 기업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는 것, 거기에 답이 있었다.

페를라주 작업 과정. 일정한 힘, 균일한 간격이 부품의 아름다움을 결정한다.

현미경을 통해 수공 인그레이빙 작업 중인 장인

칼리버 89를 제작한 마스터 장인 폴 뷔클랭의 카리스마

살아 있는 시계의 사원 – 파텍필립 뮤지엄
시계 명가의 조건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가 있다. 제네바 시내에 있는 파텍필립 뮤지엄이 그곳으로 176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진귀한 히스토리컬 피스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창립 당시 선보인 회중시계부터 실제 살아 있는 듯한 인물을 표현한 미니어처 페인팅 시계, 첫선을 보인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양새를 유지하고 있는 초창기의 칼라트라바 모델까지! 그뿐 아니다. 이곳은 파텍필립의 작품 외에도 500여 년 시계 역사를 한데 아우른 시계 컬렉션을 연대별로 정리했고, 그 수만 2000점이 넘으니 전 세계 시계 애호가를 매료하기에 충분하다. 바쁜 매뉴팩처 취재 일정에도 이곳을 찾은 건 분명 잘한 일이었다. 제네바를 여행할 독자라면 이들의 홈페이지(www.patekmuseum.com)를통해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것.

제네바에 위치한 파텍필립 뮤지엄

파텍필립의 프리 플로팅 폴리싱 공법은 금속에 탁월한 광택을 부여한다.

현존하는 가장 복잡한 시계인 칼리버 89

런던의 풍경을 그리자유 에나멜링 기법으로 완성한 칼라트라바 모델

런던 대전시를 기념해 출시한 퍼페추얼 캘린더 모델, 오픈이 가능한 백케이스 덮개에 런던을 새겼다.

빅토리아 여왕의 시계 No.4536. 장 아드리앙 필립이 특허 받은 스템 와인딩 시스템을 적용한 작품이다.

진주 브레이슬릿이 화려한 빅토리아 여왕의 시계

로열 룸의 모습. 파텍필립의 보기 드문 시계가 가득이다.

창립 175주년 기념작인 그랜드마스터 차임

조립 시연 중인 워치메이커

런던에서 마주한 파텍필립의 특별한 전시
스위스에서의 일정을 뒤로하고 <노블레스>를 포함한 기자단은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난 6월 7일, 10일간 여정으로 막을 내린 ‘파텍필립 워치 아트 대전시 런던 2015’를 관람하기 위해서다. 이미 매뉴팩처와 뮤지엄 방문을 통해 브랜드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은 덕분에 기대가 컸다. 전시를 진행한 곳은 현대미술을 주로 다루는 런던의 사치(Saatchi) 갤러리. 지하를 제외한 건물 전체를 이용한다는 소식에 ‘그 드넓은 공간을 어떻게 채울까’ 하는 의문은 전시를 보는 즉시 단번에 해결됐다. 전시 공간의 웅장함에 비례해 그곳을 채운 시계의 향연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대전시(grand exhibition)’란 이름을 붙인 것이 충분히 이해될 정도! 2개 층, 총 21개 공간을 분야별로 나누어 전시했으며, 각각의 공간은 파텍필립이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었다. 특히 파텍필립은 이번 전시에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를 재현한 로열 룸(Royal Room)을 별도로 마련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영국 왕실에서 그 당시 판매한 빅토리아 여왕의 시계 No.4197과 No.4536 모델을 대여했기 때문. 특히 4536 모델은 시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발명으로 꼽히는 스템 와인딩 시스템(별도의 키가 아닌 용두로 태엽을 감고 시간을 조정하는 방식)을 도입한 시계로, 파텍필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인 장 아드리앙 필립(Jean-Adrien Philippe)의 작품이다. 이 밖에도 이들이 현재 선보이는 전 컬렉션을 전시한 공간, 컴플리케이션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 다양한 아트 기법을 도입한 시계를 소개하는 공간,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상영 공간 등을 구성해 관람객이 잠시도 파텍필립의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에디터의 눈을 사로잡은 건 전시 후반부에 마련한 이들의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2점으로, 밀레니엄 시대를 기념해 퍼페추얼 캘린더, 스카이 차트, 그랑 소네리 등 총 21개 기능을 탑재한 스타 칼리버 2000 모델과 지난해에 창립 175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그랜드마스터 차임이 그 주인공! 사진으로만 보던 걸작을 마주한 당시의 전율이 원고를 쓰는 지금까지도 생생하다(그리고 다시 볼 기회는 없을 것 같다!). 파텍필립의 역사에 기념비가 될 만한 이 전시가 멀고 먼 런던에서, 그것도 10일간만 진행하는 것이 무척 아쉬울 뿐. 언젠가는 서울에서도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에디터 이현상 (ryan.lee@noblesse.com)
사진 제공 파텍필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