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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간 여성 미술가

ARTNOW

전통적 가부장 제도에서 여성이 창작 활동을 하는 것에는 치열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계에 굵직한 기록을 남기며 자신만의 미술 세계를 구축한 여성 화가들이 있다.

나혜석,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60×48cm, 제작연도 미상
ⓒ 정월 나혜석기념사업회

나혜석, 무희, 캔버스에 유채, 41×32cm, 1940
ⓒ 국립현대미술관

작업실에서 천경자 화백

미술이 사회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미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부터 이데올로기, 자본, 유통, 매스미디어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사회현상이 미술 혹은 미술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여성 미술가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치므로 이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국제적 명성을 누리는 한국 미술가 중에선 여성의 비율이 높은데, 이 역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여성이 거리낌없이 창작 활동을 하게 된 걸까? 현재는 ‘여성’이라는 성 자체를 작품의 의미를 드러내는 방편으로 활용할 정도로 여성 미술가들의 활동이 활발하지만 이런 상황이 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88 서울 올림픽 이후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개방적으로 바뀌면서 세계 여행의 자유화, 월북 작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는데 바로 이 무렵 남녀의 고정된 성 역할이 무너지며 여성 미술가의 활동이 증가했다. 물론 서양의 페미니즘 미술 이론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지만 사회 변화 또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난 20~30년간 여성 미술가의 활동은 비약적으로 증가해 더 이상 여성이라는 사실이 창작 활동에 핸디캡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 이르기 전, 여성 미술가로 사는 것은 녹록지 않았다. 집안에서 어머니로, 며느리로, 아내로 소임을 다하며 창작 활동을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많은 제약이 따랐다. 더구나 전통 사회에서 서화(書畵)는 오롯이 남성의 영역이었던 만큼 조선시대 여성 화가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흔히 거론하는 신사임당 역시 ‘율곡 이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그의 재능이 곁가지로 부가될 뿐이다.

박래현 화백과 그의 남편 김기창 화백 ⓒ (재)운보문화재단

박래현, 영광, 화선지에 채색, 134×168cm, 1967

한국에서 여성 미술가로 대가가 되기까지
여성에게도 전문 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면서 여성 미술가가 등장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다. 당시 미술 교육을 받으려면 유학을 떠나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나혜석(1896~1948년), 박래현(1920~1976년), 천경자(1924년~2015년) 같은 대가가 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도쿄여자미술학교 출신이다. 이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팽배한 사회에서 피나는 노력과 대가를 치르고서야 대가(大家)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현재 가장 많은 연구가 이루어진 작가는 단연 나혜석이다. 그러나 생전에는 그에게 귀 기울이는 이가 없었고, 결국 길에서 행려병자로 죽음을 맞이해 무연고자로 처리됐다. 그가 선각자였음을 깨달은 것은 작고한 지 거의 한 세대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 발표한 미술평론가 이구열의 책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1974년)를 통해서였다. 나혜석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 만삭의 몸으로 1921년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에 앞서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고희동·김관호·김찬영 같은 남성 화가가 있었지만, 조선인으로서 서울에서 처음 유화 개인전을 연 미술가는 나혜석이다. 여성도 전문적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개인전을 연다는 나혜석의 인터뷰 기사가 당시 신문에 실렸다. 남편 김우영이 중국 단둥으로 발령이 나면서 개인전 직후 중국으로 떠났고, 단둥에 머물면서도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출품했다. 이를 두고 당시 남성 작가들은 야심이 앞섰다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혜석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존재 이유였다. “내가 그림 없이 어찌 살라고”, “그림을 제해놓으면 실로 살풍경”,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그림과 나를 따로따로 생각할 수 없다”라는 것이 그의 절절한 토로다(‘나혜석, 미전 출품 제작 중에’, 조선일보, 1926년 5월 20일).
나혜석은 세계 일주라는 특별한 기회가 왔을 때 1년 8개월 동안 세계를 여행하면서 현대미술의 실상을 직접 확인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행 직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아이들’과 ‘화가촌’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단순하고 표현적인 붓질로 그린 이 작품에 대해 당시 일간신문은 “양행(洋行)하고 온 후 도리어 시들어지는 꽃과 같이 빛도, 향기도 없어져간다”고 혹평했다. 이는 다분히 나혜석의 작품 자체보다는 이혼 같은 개인사를 염두에 둔 발언이다. 당시 그림을 평가하는 기준은 ‘얼마나 사실적으로 잘 묘사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계 여행 이후 나혜석은 개성을 강조한 주관적 표현을 ‘그림의 요점’으로 봤다. 시대를 앞서간 탓에 나혜석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는 평자도, 작품을 애호하는 후원자도 만나지 못한 채 허무하게 스러지고 말았다. ‘선각자’의 최후가 자못 처연하다.

박래현, 노점, 종이에 수묵 채색, 210×267cm, 1956

작품 앞에 선 윤석남 작가

나혜석과 거의 1세대 정도 나이 차가 나는 박래현 역시 선각자적 존재다. 미술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1956년에는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기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래현을 언급할 때는 이러한 수상 이력보다 청각장애자인 남편 김기창 화백을 보필한 현모양처의 면모가 더 높이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정작 박래현이 남긴 결혼 생활에 대한 고백은 그와 다르다. “혼자 살 것을 열 손가락이 모자라도록 맹세”해놓고도 결혼한 것에 대해 후회했으며, 김기창에게 프러포즈를 받았을 때는 “조그만 분노와 슬픔이 마구 소용돌이쳤고” 결혼식 당일에는 “경축의 음률이 흘러나왔을 때, 내 발등에는 큼직한 눈물이 거침없이 떨어졌다”라고 회고했다. 현모양처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내면화해왔음에도,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창작 활동까지 병행하는 것은 고통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는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브라질과 남미의 잉카 문명지를 여행한 후, 뉴욕에 1년간 머물다 판화를 공부하게 된다. 천, 실, 털실, 엽전 같은 물질을 작품에 도입해 태피스트리를 제작했으며 동양화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동판화, 석판화, 실크스크린, 메조틴트 등 다양한 판화를 작업했다. 한 분야의 중견 작가로 활동하다 전혀 다른 장르로 매체를 바꾸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인데, 장르의 개념을 뛰어넘어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의 기질에 더 적합한 표현 매체를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그는 한국 미술가 중 누구보다도 일찍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미술과 기술의 경계를 허물 수 있었다.
박래현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결혼해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기꺼이 감내하며 치열한 창작 활동을 통해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다. 그러다 보니 작품에서 여성의 정체성이나 가부장적 사회에서 겪는 여성의 고통, 성차별같은 여성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한국 미술에서 이러한 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다. 여성의 문제를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다룬 선구적 작가로 윤석남(1939년~)을 들 수 있다. 불혹의 나이에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은 윤석남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의 차별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다뤘지만, 사회를 비판하기보다는 여성의 위대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동시대 여성주의 작가와는 다르다.

윤석남, 무제, 캔버스에 유채, 1982

윤석남, 어시장 2, 혼합 재료, 2003

윤석남, 너와 29, 발끝으로 조용조용히, 혼합 재료, 100.5×53.5cm, 2013

그의 미술은 어머니 이야기로 채워졌다. 일제강점기의 막바지에 치른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현실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어머니 등이 그의 작품을 채웠다. 이는 윤석남의 어머니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나혜석이나 박래현의 경우처럼 여성이 결혼해 어머니가 되는 것은 분명 창작 활동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윤석남이 주목한 것은 여성이 생명과 구원을 줄 수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일례로 윤석남의 작품 중 ‘바리데기’ 신화를 다룬 것이 있는데, 바리데기가 자신을 희생해 부모의 생명을 구하고 그 보상으로 이 세상의 절반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자신의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생명을 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가 여성의 희생을 당연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이라는 존재가 사랑과 생명을 주는 구원자임을 강조한 것이다. 1025마리의 유기견과 함께 살아가는 이애신 할머니에 관한 작품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8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이 동물에게 저지른 죄악의 결과인 유기견, 이를 씻을 수 있는 존재는 이애신 할머니 같은 여성이다.
윤석남은 점차 인간중심적 사고와 행동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나아갔다. 2013년 작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라는 작품에는 인간이 제멋대로 사물을 명명하고 자연을 훼손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면서 문명을 발달시켰다고 자부하지만 이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사고일 뿐,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윤석남의 작품을 감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며 우리의 일상사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작업함으로써 관람자와 소통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가 작가로 데뷔한 1980년대 초반 우리나라 화단은 단색조의 추상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가 당시 주류 미술의 경향인 추상적 조형 언어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남성 중심의 주류 미술에 대한 저항 의지의 발로일 수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작가 자신이 선택한 조형 언어에 대한 신뢰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질문과 고민을 한시도 놓지 않았으며, 그의 시선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향해 있었다.
1921년 나혜석이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조선 여자는 그림 그릴 만한 천재가 많다”라는 도발적 발언을 했을 때는 ‘공상허언’쯤으로 들렸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김이순(미술평론가, 홍익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