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멋쟁이
이 시대 남자들이 기준으로 삼을 만한 진짜 멋쟁이는 누굴까? ‘멋진 옷을 입어서 멋쟁이가 아니라, 멋쟁이가 입는 옷이 바로 멋진 옷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 남자 중의 남자를 소개한다.
보통 여자는 미모, 남자는 사회적 직위와 개인의 가치 척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남자들도 멋은 중요시해왔다. 1701년 프랑스 화가 이야생트 리고(Hyacinthe Rigaud)가 그린 루이 14세 초상화는 화려한 모피로 만든 장엄한 군주의 예복 차림에 멋스러운 가발을 쓰고, 허리에는 프랑스의 국부 샤를 마뉴의 중세 칼을 찬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무겁고 장엄한 군주의 의상 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려 스타킹 신은 긴 다리를 노출시키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 길고 곧게 뻗은 다리는 여성이 아닌 남성미의 상징이었다. “짐은 곧 국가다”라고 큰소리친 루이 14세도 미모를 과시하고 싶은 유혹에 빠졌다는 말이다. 남자에게 ‘멋 부리기’는 조심스럽다. 아주 오랫동안 멋 부리기를 남자답지 못한 태도로 해석해왔기 때문이다. 남자가 외모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모습이 드러나면 주변 사람들의 적개심을 부르기도 했다. 남자의 패션 경향을 표현하는 댄디, 테디 보이, 그리저 같은 용어도 멋 부리는 남자들을 욕하는 용어였다. 1990년대에 갑자기 남성용 화장품과 패션 분야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여전히 ‘멋 낸 것’이 드러난 남자에겐 ‘메트로섹슈얼’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남성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치부할 정도였다. 오늘날에도 고위 공직자, 전문직이나 대기업 종사자 등은 튀는 옷으로 멋 부리는 것이 암묵적 금기 사항이다. 그래서 영국의 왕세손비 케이트 미들턴이나 미국 대통령 영부인인 미셸 오바마는 공식 석상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의 패션 감각을 뽐낼 수 있지만 영국의 캐머런 수상,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등이 패션 감각을 드러낸 옷을 입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는 모습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여전히 남자들에게 튀는 옷은 쉽게 용납되지 않는다. 댄디한 것과 포피시(foppish, 제비 같다)는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렇다면 ‘남자의 멋’의 핵심 요소는 무엇일까? 남자들 중에는 전혀 멋을 부리지 않아도 자태나 행동에서 멋이 좔좔 흐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껏 멋을 내도 전혀 멋이 풍겨 나오지 않는 사람도 있으니 그 요소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의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
18세기 파리에 카르투슈(cartouche, 총알)라는 별명의 도적이 살았다. 카르투슈는 거리의 소매치기로 성장해 당대를 주름잡은 파리의 두 조직 폭력 단체를 한 손에 거머쥔 전설적 인물이다. 그는 그토록 악명 높은 범죄자였지만 여성들에게는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멋진 남자였다. 파리의 여성들은 카르투슈에게 마차가 털리거나 강도를 당하면 화를 내는 대신 마치 유명 연예인이 자기 집을 방문하기라도 한 것처럼 카르투슈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카르투슈는 한 공작의 집을 털기 위해 몰래 집 안으로 침입했다. 들어가보니 공작부인 혼자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 안에 여자 혼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카르투슈는 공작부인에게 “집을 털러 왔지만 샴페인을 곁들인 식사나 한 끼 하고 떠나겠다”고 말했다. 공작부인과 함께 즐겁게 저녁식사를 한 후 음식은 정말 훌륭했지만 남편이 구두쇠여서 싸구려 샴페인만 마시는 모양이라는 농담을 던지고 유유히 떠났다. 며칠 후 공작부인은 카르투슈가 보낸 고급 샴페인 한 상자를 선물로 받았다고 소문 내고 다녔다.
또 한 번 카르투슈는 엘렌 드 쿠르테네라는 한 귀족 여성의 집에 침입했다. 굴뚝을 타고 집 안으로 침입한 그는 벽난로에서 나오다 그 옆에 서 있는 여주인과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도 전혀 놀라지 않고 유유히 나와 굴뚝에서 묻은 잿가루가 카펫에 떨어진 것을 스스로 치우며 가택 침입을 사과하고 “밖으로 나가는 방향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물은 후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집에서 나왔다고 한다. 또한 가택 침입을 사과하는 의미로 금화 2000냥 가치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고 그 집 안주인은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이런 일화를 많이 남긴 카르투슈의 유명세는 하늘을 찔렀고, <삼총사>의 저자 알렉상드르 뒤마는 나중에 그에 대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엔 사진이나 비디오 기술이 없어 파리 여성들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면서도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는 악명 높은 도둑이었지만 여자에 대한 깍듯한 매너를 지켜 파리 사교계의 전설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이미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아 그가 딱히 멋을 부리는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의 태도와 행동을 멋과 유행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다.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그의 말투나 어록에서 나온 말이 프랑스 은어 중에 사용되고 있다. ‘남성의 멋’ 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영국 소설가 오스카 와일드를 빼놓을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 역시 런던 사교계에 많은 일화를 남겼다. 오스카 와일드는 소설로 많은 돈을 벌긴 했지만 무분별한 소비생활로 항상 무일푼이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지식인이라 영국 최고 귀족의 사교 파티에 늘 초청을 받았다. 한번은 타고 갈 마차를 대여할 돈이 없어 파티장까지 걸어갔다. 당시의 런던 거리는 도둑과 폭력배 그리고 전염병이 들끓어 부자가 마차 없이 걷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길을 걷는 그의 옆을 스쳐 가던 마차 한 대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한 부유한 사업가가 마차 문을 열더니 “아니, 오스카 와일드 선생님 아니십니까. 유명하신 예술가께서 파티장까지 걸어가서야 되겠습니까. 제 마차에 함께 타시지요”라며 친절을 베풀었다. 오스카 와일드가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사업가는 끈질지게 설득해 그를 마차에 태웠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을 자신의 초고가 마차에 태운 사업가는 그에게 쉬지 않고 돈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성공담을 늘어놓았다. 와일드는 파티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사업가는 놀라서 “아니, 왜요? 저도 그 댁 연회에 가는 길인데요”라고 되물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무일푼의 예술가가 파티장에 걸어서 가는 것은 멋이지만, 당신 같은 졸부의 마차를 얻어 타고 가는 것은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부자를 마차에 두고 내린 후 매연과 범죄자로 가득한 런던 거리를 걸어 파티장으로 향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멋쟁이로 꼽힌 카르투슈와 와일드 그리고 루이 14세의 공통점은 자아(ego)가 강한, 요즘 말로 하면 ‘멘털 갑’이라는 것이다. 사실 루이 14세의 옷차림은 그가 왕일지언정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멋진 것이 아니라 당시 남자들이 금기시하던 괴상한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 역시 당시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별난 차림이었다. 그런 것을 멋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왕이나 유명 소설가라는 타이틀, 오스카 와일드의 경우 잘생긴 외모 등도 작용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기이한 옷차림을 하고도 당당하게 ‘뭘 봐?’라고 말하는 듯한 배짱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남자의 멋에는 항상 약간의 까칠함이 내포되어왔다.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딘을 1950년대 남자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은 아마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영화일 것이다. 존 트래볼타는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라는 아버지 세대의 압박과 ‘춤바람 난 남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 까칠하게 맞서면서 춤에 대한 열정을 좇는 젊은 캐릭터를 열연해 멋진 1980년대 남자의 표상이 되었다. 사회와 기성세대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해 무난하게 살아가는 남자는 옷을 아무리 잘 입어도 멋쟁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까칠함이란 거센 세상 풍파에 부딪혀도 자기만의 결을 무너뜨리지 않는 용기를 말한다. 얼핏 철없어 보이지만 사실 세상의 거센 물결과 맞서 자기 색채를 지켜낸다는 것은 남자의 가장 어려운 정신적 과제이며 상상을 초월한 정신적 강인함과 내공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알아봐주고 인정해준다. 오스카 와일드는 막 자본주의가 싹터 돈이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던 시대에 돈보다 자존심을 더 중요시했다. 도적인 카르투슈 역시 어떤 경우에도 자기가 생각하는 ‘여성에 대한 도리’를 지켰다. 이들처럼 세상의 흐름에 무조건 수긍하고 따르지 않는 까칠함이 바로 영어로 ‘애티튜드(attitude)’라고 부르는, 남자의 멋을 만드는 그 무엇이다.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은 미국 빈민가 출신 래퍼 이지-E와 그의 친구 아이스 큐브, 닥터 드레 등 웨스트코스트 랩 창시자의 생애를 그렸다. 이들은 미국에서 가장 험악한 빈민가 출신으로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는 백인 매니저를 만나 부유한 백인 동네 녹음실에 작업하러 갔다가 도둑이라는 누명을 쓸 정도로 인종차별의 처절한 피해자였다. 그들이 입은 헐렁한 바지와 거꾸로 쓴 모자는 저렴한 중고품, 또는 부모님이 구세군에서 얻어온 것으로 그런 탓에 그들은 늘 나이에 맞지 않게 큰 옷을 대충 입었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적 억압에 굴하지 않고 NWA(Niggers with Attitude)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했다. 경찰의 흑인 탄압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F*ck the Police’라는 곡을 발표해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인기를 얻자 그들이 디트로이트에서 공연을 시작하기 전, 경찰들이 몰려와 만약에 경찰 비하 발언이 담긴 곡을 부른다면 공연 중에 체포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대 위에서 경찰이 금지시킨 노래를 불렀고 경찰은 경고한 대로 무대 위로 올라와 그들을 체포했다. 공연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그 사건 이후 그들은 미국의 흑인을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그들이 입고 있던 저렴한 중고품이나 구호품인 헐렁한 바지와 야구 모자는 순식간에 힙합이라는 스타일 아이콘이 되어 전 세계로 팔려 나갔다. 이 사례는 남자의 멋의 근원을 확실히 보여준다. 즉 ‘멋진 옷을 입어서 멋쟁이가 아니라, 멋쟁이가 입는 옷이 바로 멋진 옷이 된다’는 것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패션은 워낙 추한 것이라 사람들이 6개월에 한 번씩 다 바꿔버린다”면서 “유행은 오고 간다. 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여기서 오스카 와일드가 말하는 스타일은 최신 옷이나 액세서리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그만의 독특한 언행을 보이면 남들은 “저게 그 사람 스타일이야”라고 말한다. 원래 스타일은 라틴어로 글솜씨를 뜻하는 단어였다. 그 사람이 쓴 글의 내용이나 글씨체에서 풍기는 분위기,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의 생각의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다. 멋있는 남자란 자기 생각이 확고하고 그런 생각을 사회나 시대가 방해해도 밀어붙일 수 있는 사람, 남이 뭐라 하건 입고 싶은 옷을 입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을 지닌 사람이다. 나는 남자답게 사는 방법이 궁금할 때마다 단테가 쓴 이 시구를 떠올린다. “사람들은 웅얼거리라고 놔두고, 네 갈 길을 가라. 폭풍에도 꿈쩍 않고 산꼭대기에 서 있는 성처럼 우뚝 서라.”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영화 <이유없는 반항>

영화 <카르투슈>
조승연 <이야기 인문학>, <공부 기술>, <그물망 공부법>, <비즈니스 인문학> 등 총 16권의 책을 출간하고 EBS <세 계 테마기행>, KBS2 <여유만만> 등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며 지금은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면서 동양 언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오리진보카’ 대표로, 세계에 수출할 영 어 어휘 학습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조승연(세계 문화 전략가) 사진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