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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자회상

LIFESTYLE

소셜 미디어 속 낯선 이의 사진을 포착해 시대의 자화상을 그리는 아티스트 세라 볼의 작업 속으로.

Sarah Ball Studio, 2023. Copyright Alban Roinard. Courtesy Sarah Ball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London and New York. Photo by Alban Roinard.

과감한 컬렉팅과 아낌없는 후원으로 이 시대 페기 구겐하임으로 불리는 베스 루딘 더우디(Beth Rudin DeWoody). 부동산 재벌이자 뉴욕 휘트니 미술관 및 LA 해머 미술관 이사회 멤버이며 큐레이터로도 활발히 활동하는 그녀가 한꺼번에 초상화 여섯 점을 소장하며 주목한 작가가 있으니, 바로 영국의 세라 볼(Sarah Ball)이다. 2021년 미술 전문 플랫폼 아트넷(Artnet)이 선정한 프리즈 뉴욕의 떠오르는 스타 아티스트 6인에 포함되더니 VIP 오프닝 단 몇 시간 만에 작품이 매진되어 빅 컬렉터조차 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현재 대영박물관, 브루클린 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 작품이 소장된 것은 물론, 여러 나라를 넘나드는 개인전도 연이어 잡힌 세라 볼을 한국 최초로 <노블레스>가 인터뷰했다.

Declan (In Simone Rocha with Eddie), Oil on linen, 250.5×200.4cm, 2023. Private Collection. Copyright Sarah Ball. Courtesy the artist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London and New York. Photo by Todd-White Art Photography.

2022년 프리즈 서울에서 당신의 작품 ‘가베(Gabe)’를 처음 보았습니다. 페어는 매우 성공적이었고,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로 북적댔죠. 하지만 ‘가베’ 앞에 서자 주위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와 저, 서로에 대한 응시만이 존재했습니다. 완벽한 침묵 속 이 경이로운 경험은 2023년 ‘핀(Fin)’과 ‘키릴(Kirril)’ 앞에서 다시 재현되었고, 결국 인터뷰 요청으로 이어졌죠. 나중에 당신이 그린 인물이 모두 낯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당황했습니다. 내적 친밀감 같은 게 엿보였거든요. 우선 제 작품과 교감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인물에게 느낀 친밀감은 교감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는 대상은 대부분 소셜 미디어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진이거나 거리에서 처음 만난 낯선 인물입니다. ‘외모’를 통한 각기 다른 독특한 자기표현이 저를 즉각적으로 매료시킨 인물들이죠. 사진을 작품에 써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는 단계가 있지만, 따로 만나지는 않습니다. 작품을 통해서만 관계가 형성된다고 할 수 있어요. ‘엘리엇(Elliot)’, ‘데클란(Declan)’, ‘엠마(Emma)’ 등 인물은 여러 해에 걸쳐 수차례 그렸는데, 그 과정에서 ‘변화하는’ 그들의 ‘현대적 자아’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고 또 어떤 방법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지, 자신의 정체성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혹은 상호작용하지 않는지 등 제 작업은 자아가 정체성과 맺는 현재 진행 중인 관계를 탐색하는 여정입니다.
작품 제목은 어떻게 짓나요? ‘엘리엇’이라는 제목은 여러 번 등장하기도 해서요.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도 있는지? 특정 인물을 선호하진 않습니다. 실제 그림 속 인물의 이름을 바로 제목으로 붙이고요. 엘리엇은 동명이인입니다. 때로는 입은 옷이나 착용한 액세서리를 제목에 붙이기도 합니다. ‘핑크 엘리엇’이나 ‘시몬 로샤를 입은 데클란’처럼요.
작품에서 의상이나 헤어스타일, 메이크업 등 인물의 세부적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그들의 확고한 취향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니까요. 제가 소셜 미디어에 올라온 사진이나 거리에서 즉석 촬영한 사진을 그대로 사용하는 이유도 그들이 평소 자신을 어떤 모습으로 드러내고 싶어 하는지 작품에 표현하고자 했기 때문이에요. 개인의 고유성이 두드러지는 낯선 인물은 기존 사회적 범주에 딱히 들어맞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현대적 의미의 자아가 얼마나 ‘모호’하고 ‘복잡’한지, 그 ‘보편성’을 제 작품에 표현하고자 합니다.

Emma, Oil on linen, 200×160cm, 2024. Private Collection. Copyright Sarah Ball. Courtesy the artist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London and New York. Photo by Todd-White Art Photography.

당신이 스스로를 초상화가로 분류하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개별 인물을 똑같이 묘사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정체성이 인종, 성별, 성적 지향 등에 따라 얼마나 복잡하고 분류하기 모호한지를 조명하고 싶은 거군요. 그러한 정체성을 가진 인물의 미묘한 심리적 상태가 관람객에게 전달되는 것까지가 작업의 주제고요. 올해 초 열린 뉴욕 개인전 <틸티드(Tilted)>에서는 실물보다 훨씬 큰 사이즈의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그로 인한 효과, 그리고 주로 상반신만 그리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러한 형식이 마치 인스타그램 사진처럼 보입니다. 맞습니다. 가장 큰 작품 사이즈가 2.5×2m인데요. 손가락으로 쓱쓱 넘기는 일상적 휴대폰 사진을 거의 영화 스크린 규모로 확대함으로써 정체성에 대한 관람객의 인식에 질문을 던지고 재해석하게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스케일에서 나타나는 구상과 추상의 상호작용에도 큰 흥미를 느꼈고요. 보는 위치에 따라 구상과 추상이 왔다 갔다 하거든요. 한편 작가로서는 소재로서 리넨의 성질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거칠고 성긴 표면이 얇은 한 겹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느껴지려면 엄청난 양의 물감을 층층이 쌓아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표면에 깊이가 생기고 인물의 형태가 서서히 나타나는 과정을 더할 나위 없이 즐기고 있습니다.
리넨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매끈한 표면, 그리고 배경과 인물의 부드러운 연결은 상상을 초월한 반복적 붓질과 시간의 산물이군요. 당신의 작품에 영향을 준 작가들이 궁금합니다. 15세기 플랑드르 초상화 형식과 특유의 정적인 요소에 늘 이끌렸습니다. 영국 튜더 시대의 회화에서도 영향을 받았고, 더 최근의 영향으로는 그웬 존(Gwen John)과 루치안 프로이트(Lucian Freud)의 초기작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무런 단서를 발견할 수 없는 텅 빈 듯한 배경, 초현실적이며 시대를 초월한 느낌, 관람객이 나머지를 채우도록 유도하는 지점 등이요.
덕분에 관람객은 작품의 인물과 직접 연결되어 얼굴 뒤 숨은 서사까지 읽을 수 있고요. 작품 속 인물은 한결같이 독창적이면서 개성을 강조한 스타일을 추구하고 사회적 규범이나 전통적 성 역할에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데, 현대판 ‘댄디’로 불러도 될까요? 저는 종종 앤드루 솔로몬(Andrew Solomon)의 ‘댄디(Dandy)’와 수전 손태그(Susan Sontag)의 ‘캠프(Camp)’ 개념을 언급하곤 합니다. 솔로몬은 사회의 일반적 기대에 맞추지 않고 세련된 복장, 정교한 언어, 예술적 취향 등을 통해 자신만의 자율성을 유지하는 사람을 일컬어 댄디라고 정의했어요. 외적인 스타일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방식까지 포함하는 개념이죠. 1960년대 손태그는 대량 소비 시대의 댄디즘이 캠프에서 발견된다고 했는데, 캠프는 인위적이고 과장된 스타일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두 사람 모두 전통적 미의 기준에 도전하는 태도를 강조했어요. 저는 우리 시대 ’현대적 댄디즘‘을 정의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시대적 정치·사회·문화의 변화에 반응하는 유동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미지 과다 공유 시대에 댄디즘은 하나의 ‘집단적 운동(movement)’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추구와 관심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Von, Oil on linen, 200×160cm, 2023. Collection×Museum, Shanghai. Copyright Sarah Ball. Courtesy the artist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London and New York. Photo by Todd-White Art Photography.

캠프라면 가수 레이디 가가나 드래그 퀸인 루폴(RuPaul)이 떠오르지만, 당신이 그린 인물은 이들처럼 사회적 파급력이 막강하지 않으면서도 삶의 비범한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러한 인물을 표현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아요.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요? 제 작업실은 영국 남서부 콘월 세인트 아이브스의 어촌 마을에 있어요. 19세기 어업이 쇠퇴하면서 프랜시스 베이컨 등 예술가들이 몰려든 곳이죠. 일주일에 5~6일은 무조건 이곳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붓을 들지 않아도 작업실에 머무르는 것이 중요해요. 바다와 해변이 내다보이는 커다란 통유리창 틈으로 가끔 모래바람이 불어오기도 하지만, 미묘하게 변하는 빛과 영국 모더니즘의 산실이던 역사가 깃든 이 특별한 공간에서 가끔 해변을 걷는 일 외에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그림이 원래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해도 해결하지 않고는 작업실을 떠나지 않습니다. 저는 고집이 센 편이에요. 여간해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죠.
언제나 작품이 당신보다 더 많은 곳을 바쁘게 여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네요. 최근에는 제 작품 ‘엠마’가 파운데이션 카르미냐크(Fondation Carmignac)의 그룹전 [The Infinite Woman]에 포함되어 남프랑스 프로방스를 방문했습니다. 2025년 10월에는 상하이 롱라티 파운데이션(Longlati Foundation)에서 개인전을 치를 예정이죠.
기차를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그때는 비행기를 타야만 하겠네요. 언젠가 카메라를 든 당신을 서울 거리에서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지, 또 사진 속에는 어떤 인물이 담길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Seyon, Oil on linen, 160×160cm, 2020. Private Collection. Copyright Sarah Ball. Courtesy the artist and Stephen Friedman Gallery, London and New York. Photo by Todd-White Art Photography.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김지은 (아나운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