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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부름

LIFESTYLE

1983년 ‘못다 핀 꽃 한 송이’로 일약 인기 가수 대열에 합류한 김수철이 예전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음악은 국악이었고, 그래서 가요로 번 돈을 국악 앨범에 쏟아부으며 열악한 국악 시장의 문을 고집스럽게 두드렸다”고 고백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영화 <서편제>(1993년) 음악감독을 맡아 우리 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 성공하고, 젊은 연주자들이 전통 국악과 퓨전 국악 등 다양한 국악의 변주를 통해 국악을 대중화하려 각고의 노력을 함에도 국악은 여전히 너무 먼 그대다. 그런데 지난 1월 부임한 국립국악원 김해숙 신임 원장은 그 간극을 LTE의 속도로 좁혀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을 품게 한다. 마주 앉은 사람의 걱정마저 녹이는 환한 웃음이 그녀의 확신을 대신한다.

 

“바쁘시죠?“
“네. 조금요. 절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요(웃음).”
“2005년에도 국립국악원(이하 국악원)에서 일하셨지만 이번엔 원장으로 부임해서 느낌이 다르시겠어요.”
“예전에는 국악연구실장으로 연구실만 맡으면 됐지만 지금은 국악원 전체의 수장이라 서울 국악원 외에 지방에 있는 3개의 국악원까지 제가 맡고 있어요. 책임감이 막중하죠.”
“부임한 지 한 달이 지났는데, 어떠세요?”
“어차피 국악원은 저에게 익숙한 곳이에요. 친정이나 마찬가지죠. 중학교 때부터 가야금을 시작했고, 60세가 된 지금까지 쭉 현장에서 연주자와 교육자로 활동했기 때문에 늘 국악원 곁에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물론 연주자와 국악원 원장은 무척 다르지만 그냥 장소가 다르고 내가 해야 할 일의 성격만 달라졌을 뿐 궁극적으로 국악과 국악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다는 점은 같아요. 그래서 전 제가 이곳에 온 걸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어요. 시대적 부름이라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국악과에 진학한 후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해숙 원장.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전통예술원 원장, 한국산조학회 회장 등을 지내고 이제 국립국악원 원장이 됐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 이전에 가야금 연주자다.

8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난 그녀는 거문고를 배우던 언니를 따라 국악중학교에 들어가서야 가야금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너도나도 예체능을 시작하지만, 1957년 서울대학교 음대에 국악과가 생긴 걸 보면 당시 상황은 분명 지금과 달랐다. “1957년이면 전쟁 끝나고 아무것도 없었을 때예요. 그때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겠다고 지원하는 학생이 없어서 서양 음악 전공에서 떨어진 2지망자를 받아 국악과 학생을 충당했을 정도죠.”

중학교라고 다르지 않았다. 숙명여자중학교 입시에서 고배를 마신 그녀가 2차 지망으로 입학한 국악중학교는 음악에 대한 약간의 흥미와 잠재적 재능만 있으면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학생이 등록금 없이 국비로 공부할 수 있고 개인 악기를 갖는 것은 사치던 당시, 악기까지 학교에서 제공하니 그녀에겐 그곳이 곧 천국이었다. 입학 후 그녀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고, 본격적으로 가야금을 시작한 후 오래지 않아 전국 여고음악경연대회 특상에 이어 5·16민족상 음악부 가야금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주목받는 연주자로 떠올랐다.

지금은 ‘숙명여자가야금연주단’을 비롯해 각 지역별로 부산가야금연주단, 대가야가야금연주단, 광주가야금연주단 등 여러 연주단이 존재하지만 김해숙 원장이 한창 공부할 즈음인 1980년대 가야금 연주단은 전무했다. 그래서 김해숙 원장은 김일균, 박현숙 가야금 연주자와 함께 1989년 ‘서울 새울 가야금 3중주단’을 창설했고, 그것은 국악원 아카이브에 자랑스럽게 ‘최초의 창작 가야금 3중주단’으로 기록되었다.

1 우면산 자락에 위치한 국립국악원
2 국립국악원에서는 농악과 줄타기 등 전통 연회 공연도 선보인다.
3 클래식 공연장과는 다르게 좌식으로 앉아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국립국악원의 풍류사랑방

김해숙 국악원 원장은 한창 가야금을 배우던 그때를 되돌아보며 지금은 참 세월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스마트폰 보급률 68%, 1인당 GDP 2만4000달러의 물질적 풍요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눈 깜짝할 사이 이뤄낸 상상 이상의 편리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국악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제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이 국악 하면 풍물놀이나 줄타기밖에 모르던 시절이라 어딜 가든 부정적인 시선과 질문을 받았어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싫어서 ‘빨리 전문 연주자가 되어 사람들의 저런 생각을 꼭 없애고 말겠어. 연주도 하고 이론 공부도 열심히 해서 국악에 대한 고정관념을 확 바꿔버려야지!’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나요. 심지어 국악을 한다고 하면 ‘기생들이 하는 거?’라는 반응도 많았어요. 그래서 제 선배들은 어릴 때 놀림도 많이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많이 나아졌다. 물론 TV 드라마나 사극에서 여전히 국악은 기생과 함께 등장하고 충분한 고증이나 확인을 거치지 않은 탓에 가야금을 위아래 바꿔 잡는 등 여전히 우스운 오류가 많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그 옛날보다 ‘귀명창’을 가진 대중이 많아졌다는 것. “연주자들이 흔히 ‘귀명창’이라고 부르는 관객이 있어요. 직접 소리를 하는 전문 소리꾼은 아니지만 들었을 때 저 소리꾼이 잘하는지 못하는지 귀신같이 알죠. 물론 좋은 연주와 나쁜 연주도 한눈에 구별하고요. 최고의 국악 연주를 골라 들으며 귀를 훈련시킨 국악 마니아들이죠. 귀명창이 많아지면 연주자도 무대에 함부로 못 서요. 반대로 귀명창이 없으면 연주자들이 유명세만 믿고 멋대로 행세합니다. 그래서 귀명창이 많아야 국악도 활기를 띠고 발전합니다. 어떻게 귀명창이 되냐고요? 많이 듣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국악원 공연을 많이 봐야 한다니까요(웃음).”

양재동 예술의전당 옆에 위치한 국립국악원은 우리가 미처 모르고 있던 국악에 관한 무수한 프로젝트를 실행하는 곳이다. 악기와 악보 연구, 학술회의 같은 연구 부문과 국악 동요제와 악기 전시, 태교 음악회 같은 진흥 부문, 그리고 우리가 백분 활용 가능한 공연 부문 이렇게 셋으로 나뉘어 조직적으로 움직인다. 특히 공연 부문에선 어린이 대상 참여형 국악 음악회 ‘국악으로 놀자’, 농악과 줄타기 등 전통 연희 공연을 선보이는 ‘별별연희 2014’, 그리고 시민을 위한 무료 공연 ‘문화가 있는 날’ 등 이렇게 다채로운 국악 공연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사나흘이 멀다 하고 남녀노소를 위한 다양한 퍼포먼스를 펼친다. “제가 그동안 외부에서 국악원을 바라볼 때 여러 아쉬움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국악원의 역사에 비해 그 안에서 만들어내는 레퍼토리가 다양하지 않은 것이 늘 안타까웠죠. 보이지 않는 한계가 있었어요. 그래서 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훌륭한 국악 작품을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할 생각이에요.”

그녀가 또 하나 관심을 보이는 건 바로 영재 교육이다. “중·고등학생을 위한 강습이나 강의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그보다 어린 꼬마들에게 우리의 노래와 춤, 국악의 어법을 정기적으로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릴 때부터 음악 어법을 몸으로 체득해야 무엇이 되든, 어디에 있든 국악을 즐길 수 있는 삶의 여유를 갖게 될 테니까요. 물론 교육받은 아이들이 국악인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요.”

현재 국악이 진학을 위한 방편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누구보다 섭섭한 그녀는 국악도 종국에는 K-pop처럼 이어폰으로도 즐길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한국예술종합학교 강단에 설 때도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당부했다. “너희의 무대는 한국이 아니다. 세계다”라고. “방방곡곡 뻗친 산을 모두 펴서 하나의 평지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자주 해요. 그 정도로 너무 좁은 땅이죠. 그에 반해 세상은 너무 넓어요. 그곳으로 나아가기도 정말 수월해졌죠. 국악을 들고 이제 우리도 세계로 나아가야 해요. 그러려면 우리 음악의 독특함만을 주장해선 안 됩니다. 세계에 통용되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시간이 걸리더라도 국악의 특수함을 잘 살려 시장을 개척해나가야 합니다.”

 

현재 해외에서 활동하는 국악인은 많지 않다. 아니, 미국에서 활동하는 거문고 연주자 김진희와 독일에서 활동하는 대금 연주자 유홍을 비롯한 몇몇 연주자 외에는 딱히 손가락에 꼽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수와 영역이 미미하다. 그렇기에 2012년 9월, 그녀의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 음반을 프랑스 국영 방송국인 라디오 프랑스를 통해 세계 63개 나라에 동시 발매한 것은 대단한 뉴스였다. 라디오 프랑스에서 2010년 10월부터 10년간 ‘한국 전통음악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로 결정했는데, ‘종묘제례악’ 전곡 연주에 이어 그녀의 음반을 두 번째로 선택한 것이다. “국영 라디오 방송인 라디오 프랑스는 오랜 세월 월드 뮤직의 본거지 역할을 해온 곳이에요. 라디오 프랑스를 통해 63개 나라에 동시에 제 음악을 알린 것도 영광이지만 그런 유서 깊은 방송국에 제 연주가 인류의 무형 유산으로 영원히 기록된 것도 큰 성과였지요. 무엇보다 한국 전통음악의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게 가장 기뻤어요.”

우리의 가야금은 일본의 고토, 중국의 쟁과 생긴 것은 비슷하지만 맨손으로 연주한다는 것, 그리고 명주실을 써서 능청능청한 농현(거문고, 가야금, 해금 등 현악기에서 왼손으로 줄을 짚고 본래 음 외에 여러 가지 음을 내는 수법)으로 소리를 내는 점이 다르다. 또한 가야금은 하프나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여음(소리가 그치거나 거의 사라진 뒤에도 아직 남아 있는 음향)을 가지고 음악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서양인에게는 익히 경험하지 못한 신기한 음색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산조가 주파주를 타고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앨범 판매 또한 늘었다. 3000장 초판이 소진되어 재판을 찍었으니 국악 앨범으로는 극히 보기 드문 성적이다.

해외에서 반응이 좋을수록 김해숙 원장의 마음 한편은 씁쓸하다. “여러 나라에서 전통 국악 공연을 해왔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관객이 참 잘 훈련되어 있구나 하는 거예요. 난생처음 들어보는 음악일 텐데, 음악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너무나 진지해 늘 감탄하곤 해요. 국내 공연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광경이죠. 그렇게 상반된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가 정말 5000년의 유구한 전통을 지닌 나라 맞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전통 국악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김해숙 원장은 그래서 요즘 젊은 연주자들이 양악과 국악을 제멋대로 섞는 퓨전 국악이 조금 걱정스럽다. 물론 국악이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녀도 중학교부터 대학원까지 12년을 꼬박 국악 전문 교육을 받고 세상에 나왔고, 나오자마자 자신이 12년 공들인 국악을 사람들이 멀게 느낀다는 걸 깨달았다. 관객이 있어야 그녀의 음악도 존재하는 법. 한국 최초의 가야금 3중주단도 그래서 구성했다. 그러나 그녀가 예나 지금이나 고집스럽게 지켜가고자 하는 건 관객의 눈높이보다 ‘정체성을 잃지 말자’는 초심이다. 그래서 서양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요즘 국악 연주자들에게 그녀는 이 한마디를 빼놓지 않는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이 국악을 살리는 길인지, 죽이는 길인지 잘 생각해라.”

국악고등학교 재학 시절, 욕심 많고 극성맞은 구석이 있던 그녀와 친구 몇몇은 당시 서울대학교 국악과의 김정자 교수를 찾아가 따로 과외를 받은 적이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진도 그다음의 진도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지금의 아이들이 너도나도 하는 선행 학습 정도였을 것이다. 주머니에 충분한 레슨비도 없이 의욕이 앞선 고등학생들을 참으로 열심히 가르친 김정자 교수는 “레슨비를 충분히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나에게 갚을 생각 하지 말고, 나중에 커서 네 재능을 사회에 환원해라.” 여전히 귓가에 맴도는 스승의 나지막한 격려를 따라 그녀는 국악원으로 왔고 독립 연주자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하던 그 열정으로 그녀는 힘찬 첫발을 뗐다. 그녀가 지나갈 그곳엔, 늘 그랬듯 한계는 없을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이보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