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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동네 서점

LIFESTYLE

독서 문화의 실핏줄인 동네 서점이 다시 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놀랍게도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이다.

서울 한남동의 작은 바 ‘초능력’ 안에 자리한 김경현 시인의 ‘다시 서점’

동네 서점이 다시 늘고 있다. 지난 10년,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에 밀려 구조 조정을 겪은 이들이 최근 특성화를 무기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독립서점’ 앱 개발사 퍼니플랜의 ‘독립서점 현황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전국 동네 서점은 362곳으로 2017년 257곳에 비해 30% 증가했다. 새로운 동네 서점들은 다시 문을 닫지 않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했다. 흐름을 주도하는 몇몇 서점의 유형은 이렇다. 책과 술을 함께 팔거나, 장르 소설을 전면에 내세우거나, 동물 관련 콘텐츠에 집중하는 경우. 아, 하나 빠뜨린 것이 있다. 바로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은 대개 시집을 전문으로 한다. 아니, 그런데 누가 요새 이런 곳에서 시집을 사느냐고? 모르는 소리. 지난 몇 년 사이 시가 부쩍 인기를 얻고 있다. 박준이나 황인찬, 김소연 등 젊은 시인의 시가 방송과 SNS에서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또 이는 김소월이나 한용운 같은 근대 시인까지 소환, 복간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한데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은 대체 어떤 공간일까? 시인이 운영하는 대표적 서점으론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이 있다. 2016년 여름 경의중앙선 신촌역 앞에 문을 열었다가 지난해 11월 혜화동으로 이전한 서점으로, 시집을 전문으로 취급한다.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로 등단한 그가 북 큐레이터가 되어 손님들에게 시집을 추천한다.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요.” 서점을 열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에 짧게 대답한 그는 사실 10년간 출판사 편집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망막 손상으로 하던 일을 그만뒀고, 시집 전문 서점을 열고 나서야 오랜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왜 서점 이름이 ‘위트앤시니컬’이냐고? 하재연 시인이 그를 일컬어 “위트 있는 시인”이라고 한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우연히 탄생한 이름이다. 작명 에피소드에서부터 재치가 느껴지는 이곳은 여느 동네 서점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1953년 문을 열어 70년 가까이 명맥을 잇고 있는 동양서림 2층 창고 자리에 둥지를 틀어 포근함마저 느껴진다. 공간은 39.7㎡(12평)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큰 집에 있는 다락을 자기만의 공간으로 꾸며놓은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유희경 시인은 이 좁은 공간이 ‘공동체’ 역할을 하면 좋겠다고 말한다.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야기, 책을 읽는 사람이 줄고 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상황일수록 책을 읽고 취향을 공유하는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는 것. 위트앤시니컬은 현재 유희경 시인의 말처럼 시 창작 워크숍과 낭독회 등을 주기적으로 열어 시를 사랑하는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시를 중심으로 한 지역 공동체랄까.

김태형 시인이 서울 문래동 골목에 문을 연 ‘청색종이’에선 주기적으로 인문학 강좌를 연다.

서울 한남동에도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이 있다. ‘다시서점’이다. 김경현 시인이 운영하는 이곳은 작은 바 ‘초능력’ 안에 있다. 낮엔 서점으로, 밤엔 바로 변신하는 공간. 김경현 시인이 서점을 차린 계기는 동네에 서점이 적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어릴 때 작은외삼촌이 서점을 운영하셨는데, 그 모습이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한 게 컸어요. 그래서 이곳을 서점이 사라지는 시대에 ‘다시 서점을 하자’라는 취지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 어떤 위치, 어떤 방식으로든 서점이 운영되길 바라는 마음이 곳곳에 담겼죠.” 2014년 문을 열어 본점인 한남점과 서울 강서구의 신방화점 두 곳을 운영하는데 한남점은 시집 위주로 서가를 꾸렸고, 신방화점에서는 다양한 독립 출판물을 접할 수 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서점은 김태형 시인의 ‘청색종이’다. 서울 문래동 골목길에 자리한 청색종이는 김태형 시인이 동명의 독립 출판사로도 운영하는 곳이다. 27년 차에 접어든 중견 시인 김태형은 2015년 문래동 골목에서 출판사 자리를 알아보다 우연히 지금의 공간을 발견했다. “오래되고 멋진 이곳의 천장을 마주한 순간 여기서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서점을 열어 사람을 만나는 일을 해야겠다고 말이죠. 사실 출판 일은 책상 하나만 있으면 되잖아요. 지금은 이곳에서 출판 일도 하고 제가 만든 책을 직접 팔며 독자와 만나고 있어요. 여러모로 운영에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시집 1000여 권이 자리한 이곳은 시집 전문 서점인 만큼 희귀한 시집도 만날 수 있다. 낡은 목조 천장과 마당에도 지붕을 씌운 독특한 분위기를 띠는 이곳은 자랑거리도 많다. 출간한 지 50년이 넘은 시집의 초판본, 절판한 시집 등 중고책 시장에서도 구하지 못하는 희귀본이 즐비하다는 것. 그 때문에 책 수집가나 문인들도 자주 찾는다. 매주 월요일 인문독회나 시 창작, 독서 모임 등 문인이 참여하는 여러 강좌를 통해 책과 가까이하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또 ‘출판사에서 직접 배우는 인디자인’이라는 제목으로 독립 출판물 제작을 위한 초급 과정 원 데이 클래스도 운영한다. 골목길의 작은 서점이 못하는 게 없다.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서울 대학로 동양서림 내에 위치한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

이 밖에도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은 곳곳에 있다. 간판 아래에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자신의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는 니체의 말이 적힌 김이듬 시인의 ‘이듬서점’(경기도 고양시 장항동)을 비롯해 시인 유진목과 시사만화가 손문상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겸 서점 ‘손목서가’(부산시 영도구 영선동4가)도 시를 좋아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시인이 문을 연 서점은 대형 서점에선 보기 어려운 다양한 독립 출판 서적을 만나는 것은 물론 편안한 쉼터이자 독서 모임, 낭독회, 저자와의 만남 등이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이를 통해 각 지역의 문화와 소통하는 공동체 구실도 한다. 서점에서 워크숍에 참여하고 취향이 비슷한 친구를 사귀거나, 그곳에 있는 시인과 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문화를 향유하는 일은 분명 이전에 할 수 없던 경험이다. 물론 현실은 시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상당수 서점이 경영난을 겪는다. 유희경 시인의 위트앤시니컬만 해도 비싼 임대료에 밀려 얼마 전 신촌에서 대학로로 이전했다. 하지만 시인이 운영하는 서점이나 시집의 인기는 당분간 잔잔하게나마 이어질 듯하다. 온라인 서점에선 내가 택한 책만 보기에 책과 ‘깊게’ 만날 여유가 없지만, 이들 서점에선 다른 시집을 눈으로 보고 좋아하는 시인과 마주하며 시에 대해 사색할 수 있기 때문. 지금 동네 서점, 특히 시인이 운영하는 작은 서점은 시나 독립 출판물 등 자신의 문학 정체성을 확인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