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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STPI, 판화와 종이 예술 아지트

ARTNOW

21세기형 예술 공방, 싱가포르 타일러 프린트 인스티튜트(STPI)는 세계 여느 갤러리나 공방과 다르다. 판화 예술과 프린트 아트라는 특정 분야에서 확고히 자리매김한 STPI의 에미 유 관장과 STPI의 저력, 그녀의 커리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싱가포르 STPI에서 에미 유 관장

지난 5월 7일에 막을 내린 영국 작가 시라제 후시아리(Shirazeh Houshiary)의 개인전 에 전시된 ‘Migrant Series’(2015)

판화는 회화의 취약점인 일회성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복제 예술이자 기술이다. 나무, 금속, 돌 등에 형상을 그리고 판을 만든 다음 잉크나 물감을 칠해 종이나 천에 인쇄하는 회화의 한 장르로, 미술 사조에서는 판화의 가치를 꾸준히 언급하며 그 기술과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싱가포르 타일러 프린트 인스티튜트(Singapore Tyler Print Institute, STPI)는 판화의 가능성과 페이퍼 아트의 미학을 탐구하는 21세기형 예술 공방으로 특정 장르에 주력해 전문가를 양성하고 세상에 없던 새로운 작업을 선보인다. 4000m² 규모의 공간에 전시 갤러리와 조판(彫版) 작업실, 아티스트 레지던시와 스튜디오, 제지 공장이 들어서 있어 판화, 종이 예술과 관련된 것이라면 어떤 시도도 가능하다. 2002년 설립 후 10여 년 동안 세계 각국의 아티스트를 초청해 협업 작품을 완성하고 그 작품을 아트 바젤에서 선보이며 국제적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싱가포르 르네상스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출범한 이곳은 에미 유(Emi Eu) 관장의 창립 파트너인 미국 판화가 케네스 타일러(Kenneth E. Tyler)의 판화 공방을 모티브로 삼았다. 타일러는 20세기 중반 요제프 알베르스, 데이비드 호크니, 재스퍼 존스, 로이 릭턴스타인 등과 함께 혁신적 판화를 제작해 판화 예술의 부흥을 이끈 인물로 개인 소장품과 작업실 운영 방식을 고스란히 전하며 STPI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창립 당시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타일러의 공이 크다.
사실 운영 초기에는 어려움도 있었다. 20세기 초반부터 유럽의 피카소, 칸딘스키, 키르히너 등 쟁쟁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으로 판화의 세계는 절정을 찍은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STPI는 새로운 전략으로 아티스트를 초대하기 위한 명목을 만들어야 했다. 여러 시행착오 끝에 STPI가 국제 미술 시장에 판화 공방으로 굳건히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작가 레지던시(Visiting Artists Program, VAP)와 전시, 교육 프로그램 덕분이다. 그중 VAP는 매년 한국, 중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 다양한 국가에서 온 6~7명의 작가가 머무르며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들고 STPI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거나 세미나, 출판물 기획까지 다양한 활동을 하는 프로그램. STPI에 초대된 예술가 중엔 기존에 다른 장르의 작업을 해온 이들도 포함된다.
그들은 판화 미술과 페이퍼 아트 작업에 최적화한 STPI의 시스템을 통해 그동안 시도해보지 않은 창조적 작품을 완성한다. 지금껏 인도네시아 작가 크리스틴 아이 추(Christine Ay Tjoe), 미국의 서양화가 도널드 술탄(Donald Sultan), 필리핀의 현대미술 작가 제럴딘 하비에르 (Geraldine Javier) 등 60여 명의 세계적 아티스트가 이곳에 머물며 자신의 이름을 건 개인전을 열고 미술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혔다. 400m2 규모의 갤러리에서는 VAP에 참여 중인 작가는 물론 프랭크 스텔라, 앙리 마티스, 키스 해링 등 유명 작가의 대규모 전시를 열고 전문 퍼블리셔가 진행하는 워크숍 투어, 예술가와 큐레이터, 컬렉터가 주도하는 아트 토크, 인쇄와 조판 기술 워크숍인 교육 프로그램도 선보여 일반 대중의 흥미를 자극한다.
2009년부터 총괄 디렉터를 맡고 있는 에미 유는 STPI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아티스트와 퍼블리셔, 관람객의 관계를 강조해왔다. 그 덕분에 관람객은 아티스트의 작업실을 방문해 판화 작업 과정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창조적 경험을 할 수 있으며, 아티스트는 퍼블리셔에게 판화 예술과 프린트 아트에 대한 새로운 지식 그리고 전문 시스템을 배워 기존의 커리어를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녀는 STPI를 안착시킨 데 이어 2013년부터 아트 바젤 홍콩, 아트 바젤, 아트 바젤 마이애미 등 국제적 아트 페어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아시아의 명망 있는 미술 기획자로 남다른 행보를 이어가는 에미 유 관장에게 STPI의 차별화한 활동, 그리고 최근 국제 예술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들었다.

제인 리 < Freely, Feely >전에 전시된 ‘Awakening’(2015)
ⓒ STPI / Jane lee / Photo by Katariina Traeskel

서울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싱가포르에 자리 잡고 아시아 예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한국 자수계의 원로인 어머니 정영양 박사의 영향이 큽니다. 어머니는 한국전쟁 이후 자수를 연구하기 위해 아틀리에를 세워 젊은 여성에게 일터를 제공하고 기술을 가르치며 동양 자수 공예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셨어요. 이후 평생 수집한 세계의 다양한 전통 자수 작품을 기증하며 2004년 숙명여자대학교 정영양자수박물관을 개관했고, 2014년에는 미국 뉴왁 박물관(Newark Museum)에서 지정한 ‘명예의 날(Honoring Day)’ 주인공으로 한국인 최초로 선정되며 한국 자수의 예술성을 다시 한 번 조명하는 기회를 만드셨죠. 시대를 앞서 예술혼을 펼친 어머니의 열정은 제 어린 시절부터 정체성을 형성하고 미래를 그리는 데 귀감이 됐습니다.

그렇다면 STPI를 성장시키기까지 어떤 경험을 했나요?
중학생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어요. 예술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대학 졸업 후 4년 동안 이탈리아 베니스의 갤러리에서 일했을 때죠. 그곳에서 이탈리아 고전 작품과 유럽의 다양한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서양 미술에 대한 기본 지식을 쌓을 수 있었어요. 결혼한 후에는 다시 미국 NYU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하며 행정적인 부분을 익혔습니다. STPI를 창립한 2002년에는 AGAS(Art Galleries Association Singapore)의 부회장 자리에 올라 싱가포르 미술을 활성화하는 데 주력하면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죠. 2007년 잠시 프랑스 에르메스 재단 프로그램의 디렉터로 활동했는데, 프랑스 문화 전파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 슈발리에 훈장을 받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경험이라면 2009년 STPI의 관장직에 오른 뒤, 다년간 도전 끝에 2013년을 시작으로 매년 아트 바젤에 STPI의 부스를 마련하고 아트 바젤 홍콩의 선발위원으로 선정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 미술관과 갤러리는 많지만 STPI처럼 공방과 레지던시를 갖추고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곳은 드물어요. 이런 기관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STPI는 500톤 규모의 압축 가공 기계를 비롯해 펄프 제작 시스템 등 판화를 제작할 수 있는 전문 작업실과 다양한 재질의 종이를 만드는 공장을 갖추었어요. 작가들은 약 두 달간 이곳에 머물며 전문 교육을 받은 퍼블리셔에게 새로운 작업 기술을 배웁니다. 그리고 자신이 주력하는 장르에 이 테크닉을 접목하기 위해 개념적·기술적 접근 방식을 연구하죠. 전속 기간과 판화 예술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 우수한 제판 기계와 종이를 사용할 수 있는 기반 시설은 작가의 숨은 재능을 이끌어냅니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동시대 작가에게 꼭 필요한 특성화된 공간이라고 할 수 있죠.

STPI 레지던시에서 작업 중인 시라제 후시아리

STPI 핵심 프로그램인 VAP의 작가 선정 기준이 있나요?
STPI가 초대하는 아티스트는 판화와 페이퍼 관련 작가에 국한되지 않아요. 오히려 새로운 매체에 더욱 개방적이죠. 다른 분야의 작가와 작업하기 위해 STPI는 판화 작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제대로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고유의 방식을 고집하려 하지만 STPI의 전문 퍼블리셔팀이 아티스트에게 새로운 매체를 소개하죠. 이런 방식은 그들이 안정적으로 추구해온 기존의 습관을 버리게 하기 때문에 처음엔 당황하는 예술가도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생각해온 예술의 경계를 밀어내고 대체 가능한 다른 재료를 사용하도록 유도해요.

STPI의 숨은 조력자로 인쇄 전문가인 퍼블리셔를 꼽았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STPI가 정점에 서는 데 한몫을 한 것이 아티스트와 함께 새로운 기술을 연구하는 퍼블리셔의 협동 정신이에요. 이들은 릴리프 프린트(relief print), 리소그래피(lithography), 에칭(etching), 스크린 프린트(screen print), 제지(papermaking) 분야에서 오랫동안 기술을 연구하며 전문성을 갖췄어요. 아티스트와 함께 기술적·미학적 고찰을 통해 새롭고 혁신적인 판화 제작에 주력하면서 STPI를 판화 공방 이상의 창조적 공간으로 만들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혁신적인 작품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작가 서도호, 양혜규, 전광영 등이 STPI의 레지던시에 머무르며 활동했습니다. 그들의 작업에서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나요?
STPI의 VAP는 각 작가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고 생각해요. 특히 2013년 설치미술가 양혜규의 작품은 그녀의 이전 작품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평면 작업이었어요. 종이에 야채를 올려놓고 판화처럼 눌러 찍는가 하면 펄프에 다채로운 향신료를 섞어 ‘양념 종이’를 직접 만들기도 했어요. 각종 식자재와 양념을 작품으로 바라보게 한 것은 참신한 재료에 대한 갈증과 그것을 자신의 문법으로 형상화할 수 있는 작가의 내공 덕분이겠죠.

당신에게 한국 작가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아티스트의 출신은 그리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스튜디오와 갤러리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국경은 큰 의미가 없어요. 저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만드는 일원으로서 그들이 국경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거대한 범주에 속해 있다고 생각해요. 이곳에서 활동한 결과물은 일단 싱가포르에 전시되지만 STPI와 협업을 통해 언제든 자국과 세계에 있는 갤러리에도 소개할 수 있습니다.

STPI 워크숍 내부 전경

2015년 11월 7일부터 2016년 1월 2일까지 열린 서도호 작가의 < New Works >전

STPI에 몸담은 지난 10여 년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요?
2005년 미국의 현대미술가 애슐리 비커턴(Ashley Bickerton)과 진행한 협업 프로젝트를 꼽을 수 있어요. 그가 소속된 뉴욕 리먼 머핀에 전시한 협업 작품 중 하나가 <뉴욕 타임스> ‘Art & Culture’의 첫 장을 장식했죠. 그걸 보았을 때 느낀 기쁨을 잊을 수 없어요. 애슐리와 STPI 모두에게 놀랄 만한 사건이었으니까요.

당신은 아트 바젤 홍콩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3년 전부터 아트 바젤 홍콩의 선발위원과 아트 바젤 공동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아트 바젤 홍콩 선발위원회는 세계 각지에서 모인 10명으로 구성돼 있어요. 모든 멤버가 출신 지역 미술 사업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사람이죠. 우리는 매년 두 번씩 모여 행사 참여를 희망하는 갤러리의 신청서를 검토해요. 아트 바젤 홍콩이 글로벌 아트 플랫폼으로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최상의 작품을 가려내죠. STPI의 관장으로서 세계적 아티스트를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것이 임무라 생각하고, 또 그것을 원하고 있어요. 컬렉터와 예술 단체, 예술가들이 교류하는 국제적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최근 아트 바젤 홍콩에서 STPI가 큰 성과를 얻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2013년 아트 바젤 마이애미를 시작으로 매년 국제적 아트 페어에 참가했어요. 지난 3월에 열린 아트 바젤 홍콩에서 한국 작가 서도호와 양혜규, 영국의 시라제 후시아리(Shirazeh Houshiary), 싱가포르의 제인 리(Jane Lee) 등 많은 작가의 작품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현재는 6월에 있을 아트 바젤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카르스텐 횔러(Carsten Holler), 리크릿 티라바니야(Rirkrit Tiravanija), 양혜규 등 뛰어난 아티스트의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에요. 올해는 특별전 ‘아트 바젤 언리미티드’ 섹션에서도 STPI를 만날 수 있어요. 그곳에서 독일학술교류처(DAAD) 레지던시 소속인 싱가포르 작가 호 추 니옌(Ho Tzu Nyen)의 필름 작품 ‘The Nameless’를 공개하려 합니다.

올 하반기 그리고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올여름 갤러리에서는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 출신 작가 헤리 도노(Heri Dono)의 개인전과 재불 중국 화가 자오우키(Zao Wouki)의 특별전을 계획 중이에요. 8월 영국 출신 작가 제이슨 마틴(Jason Martin), 필리핀의 알프레도 앤 이자벨 아퀼리잔(Alfredo & Isabel Aquilizan) 전시와 9월 오타케 신로(Shinro Ohtake) 전시에서 있을 연례 모금 행사도 기대해주세요.

에디터 임해경 (hklim@noblesse.com)
사진 제공 싱가포르 타일러 프린트 인스티튜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