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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없는 것들의 지극한 아름다움

ARTNOW

필요와 불필요, 쓸모와 무용함. 그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 미묘한 지점을 성실하게 탐구하는 헤르난 바스의 가장 사적인 회화.

 헤르난 바스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1978년 태어나 현재까지 그곳에 거주하며 작업하는 헤르난 바스는 회화를 기반으로 청소년기의 모험과 정체성, 초자연적 요소 등을 문학, 종교, 신화와 엮어내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성소수자 이슈, 정치, 오컬트 등 더욱 구체적인 사회적 · 문화적 맥락을 담아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현실과 허구, 고전과 동시대를 넘나드는 서사적 회화를 통해 관람객이 감정과 사고의 경계를 스스로 탐색하도록 유도한다.

삶과 예술의 경계에 놓인 사소하고 기이한 것들,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감정과 물건, 태도에 대한 회화적 탐구. 회화 작가 헤르난 바스는 개인전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에서 선보이는 신작에서 고향 플로리다를 여행하며 마주한 장면들을 통해 필요와 불필요, 쓸모와 무용함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지점에 집중한다. 고전문학과 신화, 종교적 상징에 사적 기억과 유머를 덧입혀 헤르난 바스가 섬세하게 구축한 서사적 회화는 간혹 슬프고, 때때로 아이러니하지만 지극히 아름답다. 전시가 열리는 리만머핀 서울에서 헤르난 바스를 만났다.

A Needless Moment(불필요한 순간), Acrylic and Water-based Oil on Linen, 213.5×183×4cm, 2024.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OnArt Studio.

Rain(비), Acrylic on Paper, 188×115×6cm(framed), 2025.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OnArt Studio.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은 대부분 미국 플로리다 지역을 배경으로 합니다. 아티스트로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플로리다는 어떤 곳인가요? 플로리다 남부 도시 마이애미는 고향이자 제가 사는 곳입니다. 미국 라틴아메리카 문화의 중심지예요. 최근 마이애미는 예술의 도시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죠. 어린 시절 북부 플로리다로 이사해 한동안 살았는데, 기이하고 초자연적인 남부 고딕(southern gothic) 정서가 강한 곳입니다. 문화와 정서가 확연히 다른 두 지역에서 자란 제 개인적 배경이 작품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겁니다.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이라는 전시 제목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아티스트로서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분하는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필요와 불필요 그 자체보다는 그 사이의 모호한 지점에 끌리는 쪽입니다. 신작들의 소재가 된 마술이나 점술, 기묘한 장난감 같은 것 말이지요. 누군가에게 쓸모없는 것이라도 어떤 사람의 삶엔 없으면 안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령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The Pet Psychic’s Dilemma)’에 등장하는 반려동물 전문 점쟁이는 과학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직업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진심으로 위안을 줄 거예요.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작품으로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점쟁이의 품에 안긴 닭의 잔뜩 찌푸린 얼굴이 마음에 듭니다.(웃음) 이번 신작들에선 특유의 유머 감각을 보다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데, 회화 작업에서 유머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유머는 제 작업에서 늘 중요한 요소입니다. 관람객이 그 안에서 ‘정답’을 찾으려는 부담 없이 작품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게 하니까요. 그래서 그림 자체뿐 아니라 제목에도 언어유희 넣기를 즐깁니다.
이번 전시에서 그런 유머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해주세요. ‘홀리데이 스피릿(Holiday Spirit)’이라는 작품에선 검은 옷을 입은 소년이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앉아 선물 포장지를 뜯고 있습니다. 죽은 자와 소통하기 위한 도구 위저보드(Ouija Board)인데, 탄생과 기쁨을 상징하는 크리스마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죠. 분명 취향을 반영한 것일 텐데, 소년은 오히려 그런 배려가 부담스럽고 싫을 수도 있고요. 제목의 ‘Spirit’이라는 단어 역시 ‘정신’과 ‘영혼’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유쾌하지만 약간은 섬뜩한 이중적 장면을 통해 익숙한 상징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불필요한 순간(A Needless Moment)’, ‘여섯 발가락 고양이의 관리인(헤밍웨이 하우스)(The 6 Toed Cats’ Caretaker(Hemingway House))’ 등 플로리다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작품이 여럿 눈에 띕니다. 사실 여행을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행 중 촬영한 사진을 훑어보다 많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별생각 없이 찍은 사진을 다시 보니 작품에 담을 이야기의 단서로 다가온 거죠. ‘이 풍경 안에서는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같은 상상에서 시작된 작업입니다.
작가로서는 이른 나이인 20대에 루벨 컬렉션에 소개되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지도 이제 20년이 가까워오는데, 지금 와서 돌아보니 이른 성공이 아티스트로서 활동하는 데 부담스럽지는 않았나요? 운 좋게도 저는 뉴욕이 아닌 마이애미에 있었기에 미술계의 경쟁적 분위기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어요. 덕분에 저만의 속도로 작업할 수 있었고, 그게 오히려 장기적으로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루벨 부부와는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도 스튜디오에 와서 이번 전시에 선보일 신작을 보고 가셨죠.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보다는 작업에 몰두하는 걸 선호하고, 미술계의 흐름을 따르기보다는 제 안의 작은 세계를 지키며 작업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후반과 지금, 아티스트로서 가장 많이 변화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그 당시 작품을 좋아하지만, 아직 방향을 찾아가는 시기였던 것 같아요. 지금 훨씬 자신감 있게 작업하고 있습니다. 어떤 아이디어를 선택할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낼지, 그 모든 과정이 더 명확하고 직관적이에요. 지난 2~3년 동안 작업한 그림이 제 커리어에서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스타일 면에서도 꾸준히 변화해왔고, 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요.

The Pet Psychic’s Dilemma(반려동물 전문 점쟁이의 딜레마), Acrylic on Linen, 127.5×101.6×3.5cm, 2024.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OnArt Studio.

The Space between Needful and Needless(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 Ink Transfer, Ink, and Acrylic on Paper, 178×292.5×6cm(Diptyque), 2024.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OnArt Studio.

The Understudy (Hamlet)(대역(햄릿)), Acrylic and Water-based Oil on Linen, 213.5×183×4cm, 2025.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by OnArt Studio.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매년 여러 차례 전시를 엽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나른하고 퇴폐적인 소년들과 달리 엄청나게 성실한 아티스트로 보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작업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합니다. 고등학생 시절 글짓기 선생님이 “어떤 글이든 매일 써라. 별로라도 괜찮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이 지금까지 제 신념이 됐어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주일 내내 스튜디오에 가서 작업합니다.
작업실에서 보내는 하루가 궁금합니다. 아침 9시 30분쯤 도착해 작업용 앞치마를 입고 TV를 켭니다. 시시한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같은 걸 백색소음처럼 틀어놓고 작업하죠. 이미 시작한 그림이 있다면 그걸 계속 그리고, 아니라면 작업 소재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메일에 답장을 보냅니다. 어시스턴트나 스튜디오 매니저 없이 혼자 작업하거든요. 보통 저녁 6시 30분쯤 집으로 향합니다.
작업실에 가지 않는 날에는요? 그런 날이 있다면, 제 의지는 아닐 겁니다.(웃음) 드물게 쉬는 날에는 낚시를 합니다.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머릿속을 비우는 시간이 제게는 중요하거든요. 하루 종일 영화를 다섯 편쯤 몰아 보는 날도 있고요.(웃음)
작품을 구상하고, 작업하고, 완성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작가로서 가장 기쁜 순간은 언제인가요? 작품에 딱 맞는 제목이 떠올랐을 때! 앞서 이야기한 ‘홀리데이 스피릿’ 같은 적절한 언어유희가 떠올랐을 때 정말 만족스럽죠. 새로운 재료를 발견하거나, 예상하지 못한 표현을 성공적으로 구현했을 때도 기분이 좋습니다. 이번 전시 작품 중엔 ‘대역(햄릿)(The Understudy (Hamlet))’에 벨벳 옷감을 표현하기 위해 유리 비즈를 곱게 갈아 물감에 섞어서 그렸는데, 조명이 비치면 반짝이는 효과가 잘 표현되었죠.
작업실에 세계 곳곳에서 모은 수집품을 담아둔 호기심의 서랍(Cabinet of Curiosities)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가장 최근 수집한 것은 무엇인가요? 플로리다 키웨스트 지역의 한 미술관에 전시된 ‘로버트 더 돌(Robert the Doll)’이라는 귀신 들린 인형의 미니어처 버전을 하나 샀습니다. 실제로 보니 정말 오싹하더군요.
이번이 한국에서 네 번째로 여는 전시인데, 한국에서 사 모은 수집품도 있나요? 전시 때마다 여유가 없어서 뭔가를 사지는 못했어요. 이번에는 전통 시장에 꼭 가볼 생각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주운 돌이나 조개껍데기를 담는 그릇이 있는데, 거기 넣을 생각으로 을왕리해수욕장에서 자갈 몇 개를 줍기도 했고요.
이번 전시에 대한 기대와 향후 선보일 프로젝트가 궁금합니다. 아직 확정된 다음 프로젝트는 없습니다. 전시를 본 사람들이 단순히 ‘좋다’는 감상에 그치지 않고, 작품 속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위저보드나 헤밍웨이 하우스에 사는 여섯 발가락 고양이 같은 것 말이죠. ‘라운드 원(요요 세계 선수권대회)(Round One(Yo-yo World Championships))’의 소재가 된 요요 세계 선수권대회도 정말 환상적입니다. 당장 검색해보세요!(웃음) 제 작품에 담긴 이야기가 누군가의 호기심을 열고, 뭔가 더욱 흥미로운 사건의 시작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리만머핀 서울에서 열린 헤르난 바스 〈필요와 불필요 사이의 공간〉 전시 전경. Photo: OnArt Studio.

The Hummingbird Enthusiast (벌새 애호가), Acrylic on Linen, 127×101.6 cm, 2025. Courtesy the Artist and Lehmann Maupin, New York, Seoul, and London. Photo: Silvia Ros.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리만머핀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