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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모의 시인

LIFESTYLE

오늘도 나태주 시인은 은근하게, 쓸모의 시를 써 내려간다.

다시 한 번만 사랑하고
다시 한 번만 죄를 짓고
다시 한 번만 용서를 받자

그래서 봄이다. _나태주, 꽃.1

2013년, 학교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를 그린 KBS 청소년 드라마 <학교 2013>. 교실에서 벌어진 학교 폭력에 대한 누명을 쓰고 다른 학교로 전학 가게 될 위기에 처한 힘없는 같은 반 친구를 보며 이종석이 들려준 시 한 편이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더도 말고 입안에서 세 번만 웅얼대면 누구라도 금방 외울 수 있는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1’이다. 2012년 광화문 교보생명 현판에 걸리면서 유명해진 ‘풀꽃.1’은 드라마에서 배우 이종석의 입을 통해 시청자에게 알려지며 일명 ‘풀꽃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이종석은 나중에 한 인터뷰에서 “촬영 당시에는 대사를 열심히 뱉어냈을 뿐인데, 시간이 흐른 뒤 선생님의 시를 다시 읽으니 굉장히 위로받는 느낌이었다”고 밝혔다. 이종석은 선물과도 같은 그 순간을 나누고 싶은 마음에 기어이 2017년, 나태주 시인과 컬래버레이션 시집 <모두가 네 탓>을 발간했다. ‘풀꽃.1’은 올해 초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 인용하며 이제는 어린아이까지 따라 읽는 ‘국민 시’가 되었다.
박보검과 송혜교의 조합으로 떠들썩했던 tvN 드라마 <남자친구>에서 박보검이 낭송한 ‘그리움’이란 시도 그렇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인생이고 그리움
바로 너다.

연애시처럼, 동시에 인생시처럼 읽히는 이 시 또한 박보검의 입에서 시청자의 귀로, 다시 시청자의 입에서 누군가의 귀로 전해지며 재평가가 이뤄졌다. 게다가 드라마에서 박보검이 송혜교에게 선물한 시집 <꽃을 보듯 너를 본다>는 방영 다음 날부터 ‘박보검의 시집’으로 불리며 지난겨울 서점가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역주행하는 기염을 토했다.
배우의 대사로, 대통령의 신년사로 읽히는 나태주 시인의 시에는 사전을 찾아야 할 만큼 어려운 단어가 없다. 젠체하는 문장도 없고 요즘 시처럼 구구절절 길지도, 복잡한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야단스럽지도, 표정이 크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그의 시는 오히려 평범한 단어의 조합이다. 메시지가 분명하나 단도직입적 훈계 대신 은근한 권유체를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시보다 강렬하게 머리를 치고 마음을 울린다. 지금 이 순간 옆자리 누구에게라도 나지막이 들려주고 싶은 시. 건강한 갈망, 겸손한 열정, 올바른 최선과 같은 긍정과 행복의 기운이 넘치는 시가 바로 나태주의 시다.

풀꽃문학관에는 나태주 시인이 받은 팬들의 선물이 가득하다.

시인교장, 교장시인
“근황? 근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는 거죠.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열심히 사는 것이 근황입니다. 오늘은 풀꽃문학관 앞마당에 있는 꽃밭에서 잔디를 빼주는 날이에요. 꽃과 잔디가 얽혀 있어 잔디를 솎아야 하는데, 이렇게 인터뷰가 있으면 자꾸 일이 끊겨요. 요즘은 봄볕이 따가워서 꽃들이 빨리 말라요. 그래서 덜 마르라고 우선 흙으로 좀 덮어놓고 왔습니다. 다른 근황은 글 쓰는 일입니다. 지난해까지는 문학 강연을 많이 했는데, 올해는 글 쓰는 데 시간을 보내려 해요.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책 읽고 공부하는 거예요. ‘공부한다’는 건 두 가지입니다. 위인지학(爲人之學)과 위기지학(爲己之學). 전자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학문을 하는 겁니다. 1등을 하고 상을 타고 취직하고 성공하기 위해 공부하는 거죠. 늙어서 필요한 공부는 나를 위한 거예요. 위기지학이죠. 꽃을 가꾸는 것도, 꾸준히 책을 읽고 서툰 붓글씨를 계속 연습하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한 겁니다.”
근황을 묻는 말에 위기지학으로 끝맺음하는 나태주 시인. 충청남도 공주, 고즈넉한 일본식 가옥에 자리한 풀꽃문학관 앞마당엔 정말 그가 손질하다 만 꽃과 잔디가 그늘 한쪽에 흙으로 잘 덮여 있었다. 낡은 밀짚모자를 벗으며 작업복 차림으로 풀꽃문학관 작업실로 들어오던 그는 “봄 햇볕에 꽃이 마르기 전 인터뷰가 마무리되면 좋겠다”고 재차 강조했다.
충남 서천 출신인 나태주 시인은 1945년 3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공주사범학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64년 경기도 연천군 군남국민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뒤 여러 초등학교를 거쳐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했다. 그는 일반 교사로 재직하던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1973년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펴낸 이후 지금까지 충남문화상, 박용래문학상, 편운문학상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40여 권이 훌쩍 넘는 시집과 시화집, 산문집을 펴내며 현재 공주에서 그의 시 ‘풀꽃’ 이름을 본뜬 풀꽃문학관을 운영하고 있다.
선생과 시인으로 산 세월의 길이가 비슷해 ‘교장시인’ 또는 ‘시인교장’으로 불리지만, 엄밀히 따지면 시인이 먼저다. 처음 교단에 선 건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열아홉 살 때지만, 시에 처음 눈뜬 건 열여섯 살 때 동급생 여학생을 짝사랑하면서다.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연애편지를 써서 부쳤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받은 거예요. 며칠 뒤 답장이 왔는데, 그 아버지가 쓴 거였죠. 연애편지 쓸 길은 막혔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진정이 안 되고. 그 후부터 연애편지 대신 시를 썼어요. 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죠.”
10대의 나태주에게 시는 감정 배출을 위한 창구였다. 생리작용처럼 이루어진 시 창작은 시에 대한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시인들은 시를 생리작용처럼 하지 않고 억지로 창작해냅니다. 시라는 것이 ‘만드는 거냐’, ‘쓰는 거냐’, ‘짓는 거냐’, ‘낳는 거냐’라고 한다면, 만드는 것이 가장 나쁘고 낳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그는 시인이 시를 쓸 때는 시가 잘 나올 수 있도록 조건을 잘 조성하고, 정작 시인 자신은 보조자 입장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자를 시에 맡기고 시인은 시를 도와 그것이 세상에 나오게 해야 한다는 것. 즉 배 속 아이가 열 달이라는 시간을 잘 채우고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도우란 이야기다. 그래서 나태주 시인은 시를 아기로, 시인은 시를 낳는 산모로 본다.
그럼 그는 시를 어떻게 낳을까? 시는 그를 어떻게 찾아가는 걸까? 주변의 시인 지망생들이 그에게 특별한 영감을 얻은 계기나 아이디어, 시 쓰는 방법을 묻지만 그는 바로 그것이 시인들의 문제점이라고 말한다. 시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잘 전달되려면 문자언어보다는 음성언어에 의존해야 하는데, 여전히 시인들은 시를 음성언어가 아닌 문자언어로 배우려 한다는 것. 그래서 그는 만약 문자언어로 시를 배웠다면, 빨리 잊고 생활 속 음성언어에서 시를 찾으라고 강조한다. “요즘 시집에는 시가 없어요. 남의 시만 있죠. 진짜 시는 우리 삶에 있어요. 중국 명나라 말기 문인 홍자성의 <채근담> ‘외편’을 보면 “사람들은 왜 문자서, 즉 유자서(有字書)만 읽고, 왜 무자서(無字書)를 읽지 않을까”라는 한탄이 나옵니다. 글씨가 없는 무자서는 곧 인생, 자연, 세상, 우주예요. 시는 책이 아닌, 인생에서 찾아야 해요.”
나태주 시인을 대표하는 ‘풀꽃.1’도 그의 일상이 낳은 시다. 2002년, 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당시 그는 3.4.5.6학년 아이 중 기존의 특기 적성반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는 아이들을 교장실로 불러 노래 부르고 글 쓰고 컴퓨터를 가르쳤다. 아이들이 싫증을 낸다 싶을 땐 교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풀꽃 그림 그리기를 시키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풀꽃을 정성 들이지 않고 대충 그리자 그 방법을 일러주려 이렇게 말했다. “자세히 봐야 예뻐. 오래 봐야 사랑스럽고. 풀꽃이 그런 거야.” 그런데 고개를 돌려 아이들을 바라보니, 문득 아이들이 풀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풀꽃.1’은 조금은 덤덤하게, 그의 입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까칠한 아이들도 역시 자세히 보고 오래 보니까 예쁘고 사랑스럽더라고요. 그래서 그날 제가 한 말을, 제가 뱉은 말을 그냥 옮겨 쓴 겁니다. 시를 쓴 게 아니라 뱉은 말을 적은 거죠.”
음성언어를 기반으로 한 시. 그래서 그의 시는 잘 읽히고 잘 외워지고, 누군가에게 들려주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유명인이 그의 시를 인용한 것도 비슷한 맥락. 그런데 나태주 시인의 시는 이것 말고도 매력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쓸모’다. 그는 시가 드라마와 신년사에서 왜 왕왕 선택되는지, 그 원인을 시의 쓸모와 필요의 가치에서 찾는다.
“문 대통령이 지난해 성탄 메시지에 박노해 시인의 ‘그 겨울의 시’를 인용했어요. 왜? 대통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위해 그 시가 필요했기 때문이죠. 신년사에 인용한 ‘풀꽃.1’도 그렇습니다. 필요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이지, 시인으로서 제가 유명하기 때문은 아니잖아요? 저는 시에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유명한 시가 되기 이전에 유용한 시가 되자’고.”

왼쪽_충남 공주에 위치한 풀꽃문학관.

마중물로 살기
나태주 시인이 몸담고 있는 풀꽃문학관은 공주 문학 여행에서 빠져서는 안 될 코스로 알려져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찾은 풀꽃문학관 입구에 놓인 방명록에는 전국에서 찾아온 가족 여행객과 대학 문학 동아리팀, 문학 지망생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다. 봉황산 근처 공주사대부고에서 멀지 않은 언덕 너머 고즈넉하게 자리한 풀꽃문학관은 예전 일본 사람이 살던 일본식 가옥이다. 공주시에서 그 가옥을 고쳐 활용할 방법을 논의할 때, 당시 교직에서 은퇴하고 공주문화원장으로 일하던 나태주 시인이 풀꽃문화원을 제안했고, 문학관은 그렇게 탄생했다.
강연이 없을 때는 풀꽃문학관에 머물며 지역 동인을 만나기도 하고, 시인의 얼굴을 한번 보겠다고 찾아오는 관광객과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기도 한다. 부모 손을 잡고 찾은 어린 학생에게는 자신이 먹으려고 집에서 가져온 토실한 공주 밤을 나눠주기도,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한다. 문학관 주변에 조성한 정원의 꽃과 나무를 가꾸는 일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이 작은 문학관은 주말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관광객으로 활기를 띤다.
이 조그만 공간을 더 넓힐 필요는, 직원을 더 뽑을 필요는, 풀꽃문학관을 벤치마킹해 다른 지역의 문학관을 개관할 필요는 과연 없는 것일까? “앞으로 더 확장해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빨리 팽창하는 건 원하지 않아요. 사실 문학관은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운영을 잘해서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죠. 무조건 크고 시설이 좋은 게 요구되는 건 아니에요. 공간만 크게 지어 썰렁하게 해놓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무슨 필요가 있어요. 풀꽃문학관을 비롯한 모든 공간도 결국 쓸모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제정한 풀꽃문학상도 그렇다. 국내 풀꽃문학상 수상자 2명에게 1000만 원과 500만 원을, 그리고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작가에게는 자신이 받는 보훈연금(월남 파병)을 모아 해외 풀꽃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일정 상금을 주는데, 상금 또한 갑자기 늘어나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보다 중요한 건 문학가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이 상이 오래 유지되는 것. “문학상은 종류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시인의 삶이란 게 힘들잖아요.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데 상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사비로 고향 서천 지역에 ‘신석초 문학상’을 만들어 첫해 600만 원, 다음 해 1100만 원, 이렇게 총 1700만 원을 2년 동안 지원한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작년에 서천군청에서 이제부터는 본인들이 상금을 지원하겠다고 하더군요. 제 시작이 신석초 문학상을 활성화하는 마중물이 됐다는 생각에 정말 기뻤어요.”

그는 지난겨울 산문집 <좋다고 하니까 나도 좋다>와 42번째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를 펴냈다. 많은 작품 중 출판사 편집자와 그가 고른 시가 독자와 만났다. 선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버려진 건 아니다. 낚싯대에 걸린 덜 자란 물고기를 놓아주면 언젠가 다시 찾아오듯, 그 시들은 머지않아 그에게 와서 43번째, 44번째 시집으로 태어날 것이다. 그때 시집 한 권 들고 풀꽃문학관을 찾는다면 고단하지만 정직한 시인, 분주하지만 공주 밤 한 톨 당신 손에 쥐여줄 시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마도 그는 시 ‘풀꽃문학관’처럼 당신을 보고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말을 듣지 않고서는
누구도 잡초를 뽑지 마십시오
시인이 꽃으로 기르고 있는
잡초가 있을지 모르니까요. 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