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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디지털을 욕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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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제품이 아날로그의 역사와 가치를 모방하려한 일은 더러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 반대의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여행용 가방과 LP 플레이어, 책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아이콘이 디지털의 장점을 흡수하고 있다.

리모와 일렉트로닉 태그. 접착식 스티커 라벨이 필요 없다.

리모와 일렉트로닉 태그. 접착식 스티커 라벨이 필요 없다.

근래 IT 제품의 특징은 일종의 양극화였다. 초 단위로 새롭게 발매된 각종 디지털 제품은 편리를 안겨줬으나, 그 반작용으로 아날로그 제품들 역시 새롭게 조명받았다. 하지만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던 아날로그 제품에도 조금씩 디지털의 입김이 미치고 있다.
그 첫 번째 주자는 표면에 어떤 스티커를 붙이느냐로 개성을 표현하던 여행용 가방이다. 이 제품군의 목적은 원래 목적지까지 내부의 물건을 안전하게 운반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GPS와 블루투스, 충전용 배터리 등이 들어간 제품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GPS를 통해 간혹 발생하는 수화물 분실 사고 시 가방의 위치를 표시해주고, 스마트폰과 연결된 블루투스 기능으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경고를 보내 공항 내 분실 사고를 막아준다. 또한 가방에 모바일 기기를 연결하면 충전도 해준다. 이런 변화 중 가장 극적인 것은 전자태그가 붙어 있는 리모와의 스마트 태그다. 리모와 일렉트로닉 태그(Rimowa Electronic Tag)는 공항에서 가방을 부칠 때 붙여주던 스티커 라벨을 대신한다. 스마트 디바이스의 앱에서 출발과 도착 등의 정보를 작성하면, 그 정보가 블루투스를 통해 전자 태그에 전송된다. 공항에 도착 후 짐을 붙이기 위해 기다리는 대신 전용 창구에서 바로 짐을 싣기만 하면 된다. 공항의 시스템이 등록 과정을 대신해주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독일 항공사 루프트 한자와 협업을 통해 시작했으며 조만간 확대 적용할 예정이다.

G. Pinto on Turntable. LP소리를 블루투스 기기로 바로 보내 준다.

Touchjet Pond는 프로젝터의 한계를 넘나든다. 투사된 화면 위에 밑줄을 그을 수 있다.

음악은 어떨까. 음악은 이제 파일 형태를 지나 스트리밍 시대로 넘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LP판으로 음악을 듣는 사람도 있다. LP판에는 스트리밍 음악에선 볼 수 없는 물성, 말하자면 앨범 재킷이나 음반을 손으로 집어 올려놓는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올해 초 열린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제품 전시회 CES 2016에서는 최신 디지털 기기 사이 다양한 턴테이블이 전시되었다. 소니의 PS-HX500은 LP판의 음악을 고음질의 무손실 압축 음원으로 만들어준다. LP판은 들으면 들을수록 음질이 떨어지는 물리적 미디어기 때문에 이제 구할 수 없는 LP판을 많이 가지고 있다면 꼭 필요한 기능이다.
또한 지 핀토(G. Pinto on Turntable)는 내부에 진공관 앰프가 들어 있어 스피커를 연결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재생되는 소리를 블루투스(Apt-X 지원) 기기로 바로 보내주기도 한다. 심지어 SNS를 위한 제품도 있는데, ‘Trntbl Turntable’이라는 제품은 LP판으로 재생되는 음악을 스캔해 사용자의 SNS 계정에 곡목과 아티스트 이름을 올려주는 다소 허세적으로 보이는 기능도 있다. 턴테이블의 주된 목적이 LP판을 재생하는 단 한 가지에서 다른 기기와의 연결을 비롯해추 가적 기능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제품군은 빔 프로젝터다. 빔 프로젝터는 단순히 콘텐츠나 프레젠테이션 파일을 크게 확대해 보여주는 것에서 벗어나 스마트폰과 연결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 최신의 트렌드다. 반면 터치젯 폰드(Touchjet Pond)는 투사된 화면에 터치스크린을 만들어준다. 예컨대 투사된 화면에 밑줄을 긋는 등의 행동이 가능하다. 이전에도 비슷한 제품이 있었지만, 이 제품은 무선 네트워크에 접속해 PC 연결 없이 사용자의 클라우드 계정에서 데이터를 끌어와 실행해준다. 또한 소스 기기와 HDMI 대신 와이파이나 블루투스를 이용해 연결할 수 있기 때문에 스마트폰과 연동할 수도 있다. 터치스크린 기능은 전용 스타일러스 펜을 이용해야 하지만 놀라운 기능인 것은 사실이다.

제록스의 에스프레소 북 머신. 즉석에서 책을 만들어 준다.

ePaper Sticky Note. 일종의 디지털 포스트 잇이다.

빔 프로젝터의 시작이 사무용 기기인 것처럼, 여전히 사무용 기기지만 디지털 기술에 힘입어 전혀 다른 제품이 된 복사 기가 있다. ‘Easy Translator Service’을 지원하는 제록스의 복사기는 외국어로 쓰인 원문을 넣으면 자체 번역해 복사해준다. 종이에 쓰인 것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에 있는 내용을 보내도 번역해 출력해준다.
아날로그에 비해 엄청난 효율성을 자랑하는 것이 디지털이라지만 모든 분야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메모다. 스마트폰에 뜨는 알람보다 내 눈앞에 보이는 메모지에 대한 주목도가 훨씬 높다. 이런 상황을 잘 알고 만든 제품이 바로 SeeNote의 ‘ePaper Sticky Note’다. 일종의 디지털 포스트잇이다. 스마트폰 앱에 내용을 입력하면, 전자 종이 디스플레이에 내용이 보인다. 내용이 바뀔 때만 전력을 소모하는 전자 종이의 특성 덕에 배터리 걱정은 할 필요 없다. 내용을 지울 때는 해당 항목을 터치하면 되고, 날씨나 교통정보 등도 함께 표시한다. 뒷면에 3M 접착 테이프가 있어 냉장고나 문 등 원하는 곳에 붙여둘 수 있다. 디지털 기술로 모두가 행복해지는 제품도 있다. 처음 전자책이 등장했을 때 모든 종이책은 사라질 것이란 호들갑이 있었다. 물론 종이책 판매량이 줄어들긴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종이책에 새로운 상품성을 부여한 시스템이 있으니, 앞서 소개한 제록스가 만든 ‘에스프레소 북 머신(Espresso Book Machine)’이다. 이 시스템은 책을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프린트해 책을 만들어준다.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 정도며, 표지에 구매자나 선물 받을 사람의 이름을 새겨주거나 아예 다른 표지를 넣는 것도 가능하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인쇄 비용을 아끼고 재고 처리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서점 입장에서는 재고가 쌓이지 않으니 창고 운영 비용이 줄어든다. 또한 많은 책을 전시할 필요가 없어 서점 규모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디지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아날로그는 불편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이야기와 역사가 있다. 백번을 들은 LP판에서 나는 소리와 처음 듣는 LP판의 소리는 같을 수 없지만 디지털은 매번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 지금까지는 감성 혹은 합리성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아니, 복잡해졌다고 해야 할까? 디지털 기술을 입은 아날로그 제품은 아날로그일까, 디지털일까? 아니면 디지로그란 단어로 표현되는 제3의 존재일까? 무엇이든 간에 새로운 변화는 분명 시작되고 있다.

에디터 |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 고진우(IT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