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에르 갤러리에서의 퍼즐 놀이
누구에게나 보물 상자가 있다. 먼지 쌓인 다락방이든, 이불로 꼭꼭 덮어둔 장롱 안이든,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는 손이 잘 닿지 않는 화장대 아래칸 서랍이든, 혹은 당신의 마음이나 기억 속 한구석이든. 나에게나, 아이들에게나, 당신에게나 모두 자신만의 보물 상자가 있다. 루이 비통 아니에르 갤러리는이 보물 상자들을 몽땅 한곳에 모아, ‘짜잔’ 하고 자랑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곳이다.
아니에르에 위치한 과거 루이 비통의 저택. 공방과 아니에르 갤러리가 함께 위치한 이곳은 에펠 풍 건축과 아르누보 양식을 사용했다.
ⓒ Julien Oppenheim

160여 년이 흐른 지금, 루이 비통 아카이브는 일종의 보물 창고, 백과사전이라고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안에는 모든 형태와 사이즈의 트렁크가 존재하고 빛바랜 호텔 스티커, 인보이스, 서신, 스케치북도 있다. 그야말로 끝없는 케이스와 수납상자의 변주가 펼쳐진다.
ⓒ Julien Oppenheim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복습을 빼먹지 않는다. 누구에게 물어도 열이면 열 우등생이 되는 길은 예습보다 복습이라 답한다. 많은 기업과 브랜드의 성공 스토리를 봐도 이 말이 진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복습은 어제를 돌아보는 행위다. 한 달 전, 1년 전, 그리고 그것을 처음 시작할 때의 초심을 들춰보는 것까지, 모두 복습의 범주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보면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냐는 책망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많은 진취적 브랜드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모순적이게도 시시각각 과거를 돌아본다.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는 브랜드에게 대화고 소통이다. 그것도 매우 진중한. 그 과정이 무리 없이 진행되어야 과거를 돌아보는 행위가 미래를 위한 하나의 완벽한 영감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에, 그래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건 우등생에게도, 브랜드에도 무척 중요하다.
파리 도심에서 40분가량 떨어진 작은 마을 아니에르(Asnieres)에는 1859년 에펠풍 건축과 아르누보 장식으로 지은 루이 비통(Louis Vuitton)의 저택이 있다. 7월 초 폭염이 내려앉은 파리와 달리 고급 주택가가 밀집한 아니에르에는 선선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루이 비통이 야심차게 선보이는 아니에르 갤러리(Asnie‵ res Galerie) 오프닝에는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Judith Clark)가 기획한 전시 <아니에르 123(Asnieres 123)>을 보기위해 한국과 일본,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기자와 현지 언론, VIP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아니에르 갤러리는 루이 비통 창립자와 그의 자손들이 살던 아니에르 저택(공방을 포함한)과 같은 대문 안에 위치한다.
우선 이 공간을 이해하려면 창립자 루이 비통의 히스토리를 알아야 한다. 1821년 태어난 루이 비통은 파리에서 박스 메이커 겸 패커(packer)인 무슈 마레샬의 견습생으로 일하다 1852년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진 황후의 패커로 고용됐다. 이후 1854년 자신의 회사를 열었고, 루이 비통을 대표하는 ‘쉽게 쌓을 수 있는 트렁크’를 업계 최초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는 1859년에 가족과 함께 아니에르에 공방을 열었고 그곳에 살며 작업을 이어갔다. 지금 그곳엔 더 이상 루이 비통 가문이 거주하지 않지만 여전히 공방에선 루이 비통의 가장 특별한 가죽 제품이 탄생하고 있다.
루이 비통 자손들이 1960년대까지 생활공간으로 이용한 덕분에 아니에르 저택에는 여전히 한여름 만개한 형형색색의 꽃향기가 정원을 뒤덮고있다. 갤러리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정원에서 펼친 가든파티에는 루이 비통 회장 마이클 버크(Michael Burke)와 루이 비통 광고 모델인 영화 배우 미셸 윌리엄스(Michelle Williams), 아니에르 갤러리 전시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가 참석해 그곳을 찾은 관계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루이 비통 마이클 버크 회장과 아니에르 갤러리 전시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
ⓒ David Atlan

1930년 가스통-루이 비통은 작은 목재 퍼즐, ‘파테키’를 디자인했다. 파테키는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에게 이번 전시의 배경을 구상하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
ⓒ Louis Vuitton Malletier
이 전시를 위해 글로벌 기자를 대거 초청할 정도로 루이 비통이 야심차게 준비한 아니에르 갤러리, 그 전시를 기획한 배경은 이렇다. 루이 비통 메종의 유서 깊은 역사를 소개하고, 아틀리에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는 동시에 루이 비통 세계를 생생하게 투영하는 것. 그래서 이름도 뮤지엄이 아니라 갤러리라고 붙였다. 박물관이 과거의 유물에 초점을 맞춘 곳이라면 갤러리는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장소라는 생각에서다. 이를 위해 루이 비통은 큐레이터 주디스 클라크를 투입했다. “저는 이번 전시에서 루이 비통 하우스의 역사, 특히 루이 비통처럼 중요한 하우스도 결국은 사람들과 그에 대해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로 이루어진 휴먼 스토리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루이 비통 가문에는 혁신의 DNA가 존재합니다. 오랫동안 혁신을 세련되고 개인적인 방식으로 전달해왔죠. 저는 루이 비통이 어떻게 삶을 바라보는지, 그들이 디테일에 들이는 세심한 주의에 주목하고자 했어요. 루이 비통이 자체 브랜드를 런칭하기 전부터 이어온 패션 세계와의 친밀한 관계도 강조하고 싶었지요.”
이를 위해 그녀는 지난 1년 동안 루이 비통이 걸어온 160여 년 역사를 통해 축적한 2만6000여개의 오브제와 16만5000여 개의 아카이브 문서 중에서 400여 개의 오브제와 문서를 추렸다. 아카이브를 조사하던 중 주디스 클라크는 파테키(Pateki) 큐브 퍼즐 게임(기하학적 형태와 직선으로 이루어진 퍼즐을 분해한 것을 다시 조립하는 게임)이라는 특별한 오브제를 발견하게 된다. 루이 비통의 3대손 가스통-루이 비통이 1932년에 발명한 이 게임은 전시의 배경 구상에 영감을 줬다. “저는 항상 설치 작업의 영감을 소재 자체에서 찾습니다. 아카이브를 쭉 살펴보았는데, 모든 요소가 마치 거대한 지그소 퍼즐처럼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파테키 게임은 지적 자극을 주는 아주 개념적인 게임으로 저는 이 전시가 자극적이면서 개념적이길 원했어요. “트렁크 틀 제작에 쓰는 포플러나무를 소재로 한 상자(제품을 올리는 좌대)가 파테키의 변신으로, 특히 갤러리 1층에선 이 상자를 백분 활용해 제품을 디스플레이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녀는 예술가들을 이 전시에 참여시켜 루이 비통의 장인정신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다. 아니에르가 걸어온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호르헤 오테로 파일로스(Jorge Otero Pailos)의 작품을 갤러리 입구에 장식한 것을 시작으로 일러스트레이터 루벤 톨레도(Ruben Toledo)와 모자 디자이너 스테판 존스(Stephen Jones) 같은 예술가도 참여시켜 이번 전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6개 테마로 나뉘어 있는데, 특정한 순서 없이 자유롭게 배회하며 둘러보는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이죠.”
자, 이제부터 아니에르 갤러리에서 가져온 16개의 이야기를 풀어놓겠다.
루이 비통과 그의 아내 에밀리가 1870년대에 정착한 아니에르의 저택
ⓒ Julien Oppenheim
아니에르 갤러리를 채운 16개 이야기

아니에르 갤러리 2층 전경

아니에르 루이 비통 공방의 초창기 풍경
ⓒ Collection Archives Louis Vuitton
1 시작 | Beginnings
모든 기업의 시작이 그러하듯 루이 비통의 초창기도 그랬습니다. 절대 화려하거나 성대하지 않았죠. 쥐라 산맥의 앙셰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루이 비통은 열세살에 집을 떠나 파리에서 포장용 나무 상자 가방을 제작하는 장인의 견습생으로 패킹(packing)과 트렁크 제작 기술을 익혔습니다. 1854년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아틀리에와 매장을 열었고, 5년 후 아니에르 지역에 공방을 오픈했습니다. 지금은 100명이 넘는 직원이 있죠. 사진과 노트 기록에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2 전 세계로 향하다 | Going Global
창립자 루이 비통은 세계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야망을 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메종은 아틀리에와 매장을 확장하는 한편, 주목받는 산업과 디자인 관련 국제박람회에도 꾸준히 참가해야 했죠. 1867년부터 1937년까지 루이 비통은 45회나 박람회에 참여했고, 여러 차례 수상의 영예를 안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3 고객과 그들의 이야기 | Stories and Clients
루이 비통의 손자 가스통-루이 비통이 고객을 위해 작성한 메모와 편지들이 있습니다. 고객을 향한 그의 깊은 애정은 늘 한결같았다고 합니다. 루이 비통 가족이 고객과 주고받은 카드와 서신만큼 여행과 커뮤니케이션의 깊은 관계를 강조하는 우아한 오브제가 또 있을까요?
패션 디자이너 잔느 랑방을 위해 만든 욕실 용품과 케이스
ⓒ Louis Vuitton / Patrick Gries
4 디자인 문화 | The Culture of Design
미학적으로 아름답다고 해서 반드시 탁월한 디자인은 아닙니다. 기능성과 견고성 역시 중요하죠. 루이 비통이 디자인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아름다우면서 실용적인 여행용품, 튼튼한 내부 구조부터 루이 비통 매장의 세심하고 환상적인 윈도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죠.
5 모험의 가능성 | The Possibility of Adventure
새로운 형태의 여행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루이 비통의 제품은 여행을 떠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다들 알고 계실 겁니다. 루이 비통 메종은 바다, 기차, 자동차, 비행기 여행에 필요한 새롭고 대담한 제품을 개발해왔습니다. 1913년, 항공기의 헤드라이트를 넣는 가방까지 만들었을 정도니까요.
루이 비통 트래블 케이스에 담긴 아메리카 컵 트로피
ⓒ Koto Bolofo / ⓒ Louis Vuitton Malletier
6 맞춤 제작 보호 장치 | Customizing Protection
지금은 대부분의 트렁크 제품에 자물쇠 장치가 있지만, 당시엔 아니었습니다. 1890년 루이 비통이 아무나 쉽게 열 수 없는 잠금장치 메커니즘을 개발했을 때만 해도 획기적인 일이었거든요. 각각의 잠금장치에는 개별 번호와 함께 루이 비통의 모든 액세서리를 열 수 있는 열쇠가 장식되었다고 하네요.
7 맞춤 이니셜 | Personal Initials
커스터마이징 제품에 이니셜이 빠지면 섭섭하죠. 다미에와 모노그램 캔버스를 상표등록한 루이 비통은 고객과의 협업을 통해 제품을 맞춤 제작하는 방식 중 하나로 개인적 이니셜 서비스를 선보였습니다. 고객의 이니셜 모노그램을 트렁크와 케이스, 매우 작은 오브제와 액세서리에까지 새겨 고객이 상상하지 못한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고 하네요.
8 땅끝을 향해 | The Ends of the Earth
루이 비통에 광고 수단인 동시에 아카이브의 가치를 지니는 건 뭘까요? 바로 ‘사진’입니다. 유명 포토그래퍼가 촬영한 아이코닉한 캠페인은 루이 비통이 추구하는 창의성의 근간이 무엇인지 한눈에 보여줍니다.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루이 비통의 모습을 시적이고 매혹적으로 해석한 그 옛날 캠페인은 지금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전혀 촌스럽거나 시대에 뒤처지지 않아요. 솔직히 말하면 오히려 뛰어넘는 것도 보인답니다.
싱싱한 꽃을 담기 위한 플라워 트렁크
ⓒ Louis Vuitton / Patrick Gries
9 아이리스와 로즈 | Iris and the Rose
꽃을 향한 열정이 느껴지는 테마입니다. 그렇다고 갤러리를 꽃으로 장식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1910년대에 조르주 비통이 고객을 위한 선물로 제작한, 싱싱한 꽃을 담기 위한 아연(zinc) 라이닝의 미니어처 모노그램 트렁크를 말하는 겁니다. 2015년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머더스 데이에 이 모델이 되살아났다고 하는데, 이것이 그 옛날 고객을 위한 것이든, 어머니를 위한 것이든, 싱싱한 꽃을 담기 위한 모노그램 트렁크라니, 정말 루이 비통답지 않나요?
10 친밀감 | Intimacy
루이 비통 아카이브의 또 다른 특징은 많은 이야기와 더불어 그 안에서 다양한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는겁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사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비통가(家) 남자들의 노력, 그러한 개인사와 비즈니스, 프랑스 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살아 넘치는 전시 테마입니다.
11 쿠튀르의 예술 | The Art of Couture
패션 아이템을 패킹하는 데 특출한 능력을 발휘한 루이 비통의 역사 초창기부터 메종은 패션 세계와 긴밀한 관계를 자랑했습니다. 맞춤 제작, 높은 품질, 장인정신에 초점을 맞춘 루이 비통 하우스는 쿠튀르 하우스가 보이는 특징과 많은 부분 겹칩니다.
12 끊임없이 이동하다 | On the Move
이동 수단의 진화는 루이 비통이 혁신적인 트렁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물론 여성의 삶과 패션의 변화는 핸드백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죠. 이 테마에서는 현대의 사회적 코드와 패션 트렌드에 맞춰 루이 비통의 클래식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구경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13 성장 | Dressing Up
패션은 개인의 독특한 스타일을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입니다. 때로는 개인의 트레이드마크일 수 있고, 혹은 특별한 여행지에서 맞는 디너를 위해 잠시 선보이는 변신일 수 있습니다. 특히 모자와 가발은 스타일 변신을 원하는 여성에게 최고의 아이템일 겁니다. 루이 비통에서 그 둘을 위한 트렁크를 제작하지 않았을 리 없겠죠? 경계를 허무는 자유를 선사해온 루이 비통의 다양한 트렁크는 누가 뭐래도 매혹적 스타일의 완성을 도와주는 그야말로 ‘이동 가능한 수단’입니다.
14 컬렉팅 | Collecting
가스통-루이 비통은 열정적인 수집가였다고 합니다. 그의 컬렉션과 서재는 메종에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의 전문적 수집 활동, 그리고 사업적 통찰력과 미학적 감각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20세기 루이 비통이 브랜드를 확장하는 데 크나큰 성공 요인이 되었습니다.
2002년 S/S 컬렉션에서 마크 제이콥스가 선보인 코트와 스테판 스프라우스가 2001년 디자인한 백 ‘알마’
15 예술가 | Artists
루이 비통은 예술, 디자인, 패션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제품 개발과 홍보 관련 프로젝트를 통해 오랜 세월 예술가, 디자이너, 건축가와 협업해온 걸 보면 알 수 있죠. 심지어 상업적 영역을 벗어난 순수예술의 일환으로 작업을 의뢰하기도 했어요. 신디 셔먼, 프랭크 게리, 스테판 스프라우스, 쿠사마 야요이, 스티브 매커리, 스티븐 존스, 유르겐 텔러, 솔 르윗, 제임스 로젠퀴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이 루이 비통을 거쳐간 예술가입니다.
16 아방가르드 | The Avant-Garde
2014년 루이 비통 여성 컬렉션에서 아티스틱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자신의 첫 여성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전통을 무너뜨리고 첨단을 조화시키는 순간을 뜻하는 아방가르드 요소를 담은 이 컬렉션을 보고 사람들은 “루이 비통의 진취적 요소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는 찬사를 아낌없이 보냈습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제공 루이 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