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코디 최를 모른다
한국과 미국,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맞닥뜨린 ‘문화 충돌’로 자신만의 고유한 미술 세계를 구축한 코디 최를 우리는 너무도 모른다.

코디 최(Cody Choi)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작가다. 무엇보다도 다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라 밖에서라면 얘기가 좀 다르다. 지금 유럽에선 그의 작품 90여 점으로 꾸린 대규모 회고전이 릴레이 경주처럼 열리고 있다. 지난해에 독일 쿤스트할레 뒤셀도르프를 시작으로, 얼마 전 프랑스 마르세유 현대미술관 전시가 끝났고, 오는 12월엔 스페인, 내년엔 미국과 중국 미술관에서도 순회전이 예정돼 있다. 유럽 유수의 미술관에서 이렇게 순회전이 열리는 건 한국인 작가로는 아주 드문 일이다.
“전 대외적으로 직업이 두 개예요. 미술가 겸 문화 이론가 혹은 교수. 학교를 졸업하고 작품 활동과 강의를 거의 동시에 시작했거든요. 학교에선 이론 강의를 했고, 밖에선 작품 활동과 전시를 했고요.” 그는 사실 미술계에 첫발을 디딜 때만 해도 평범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1983년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재학 시절 집안 사정으로 이민길에 올랐고, LA아트센터 칼리지에서 디자인과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 20년 넘게 미국에서 살며 미술가로서 작품 활동을 했고, 뉴욕 대학교 객원교수(1994~2004년)로 재직하며 미디어와 대중문화에서 드러나는 ‘문화 정체성’ 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라고 처음부터 미국 사회가 ‘와락’ 껴안은 건 아니었다. 이민 초기 그는 문화와 인식의 차이로 고달픈 나날을 보냈다. 미국 사회에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이방인’으로 겉돌았다. 한국에서 배운 사회학 공부를 이으려 했지만, 사회조사 방법론 수준에 그친 당시 미국의 사회학 커리큘럼이 맞지 않아 그만뒀다. 그러다 택한 게 미술대학이다. “뭔가 해야겠고, 다른 전공을 택하면 너무 공부를 심하게 시킬 것 같아 미술을 시작했죠. 근데 개념미술을 공부하니 이론 수업이 많아 되레사회학 공부할 때의 열 배쯤은 더 공부한 것 같아요.(웃음)”
미술은 언어의 장벽이 높은 그에게 일종의 소통을 위한 도구였다. 그는 미국 생활에서 느낀 문화적 장벽과 차이를 말 대신 미술로 표현했다. “실제로 미국에 처음 갔을 땐 그곳의 문화를 소화하지 못해 소화제를 반년 가까이 끼고 살았어요. 심리적 불안과 불편함, 한국과 미국의 음식 차이 등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먹기만 하면 체했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전 한국에서 중학교 때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 같은 잡지로 미국 여자들을 접했거든요. 근데 실제로 거기서 본 금발 여자들은 자존감이 상당한 데다 거구에 튼튼해 보였고, 음식도 거의 제 두 배 정도를 먹더라고요. 말하자면 미디어의 ‘저질 정보’가 제 미(美)의 기준을 결정한 거죠. 또 한국에서대학에 갔더니 전부 영문 원서를 읽으라고 하대요. 한데 미국에 가보니 정작 원서는 영문본이 아닌 독문본이었어요. 근데 우린 영문본을 원서라고 한 거죠. 그땐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었으니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웃음)”
한편 낯선 그의 이름에도 사연은 있다. 미국 이민 초기 영어 교육 시간에 서부 개척시대의 사냥꾼 이야기

코디 최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
그럼 잠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1996년)을 살펴보자. 이 작품은 1990년대 중반 그가 책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수시로 꺼내 먹은 싸구려 소화제 ‘펩토비스몰’ 수만 통으로 적신 화장지를 뭉쳐 만든 것으로, 문화라는 게 결국 먹고 싸는 문제이며 태변을 보지 못한 갓난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생존의 문제라고 강조한다. 세계가 주목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브루스 나우먼, 데이미언 허스트, 매슈 바니 등과 교류하며 공동 전시회를 개최했고, 뉴욕 대학교에서도 예술철학과 문화 이론, 역사철학을 강의하며 인기 교수로 자리 잡았다. 한데 그렇게 20여 년을 미국에서 보낸 그도 2000년대에 들어 뭔가가 복잡해졌다. 50대를 바라보던 상황, 미국 생활이 외롭고 모든 게 지루해진 시점이다. 그때 기회가 찾아왔다. “2002년에 한국 대학에서 초빙교수로 저를 불러 한 학기 동안 서울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요. 당시 외국인 교수 기숙사에서 지내다 뉴욕으로 돌아왔죠. 근데 한편으론 더 늙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가 강의를 하며 사는 것도 인생에서 큰 의미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불현듯 한국행을 결정했죠.”
그렇게 그는 2004년 미국의 작업실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몇몇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개인 작업을 병행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느라 20여 년을 고생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또 그 고생을 해야 했다. 미국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도 다시 한 번 받았다. 강남의 한 식당 메뉴에서 ‘고급 한우 비프스테이크’ 같은 국적 불명의 외계어를 발견했고, 이때부터 간판을 소재로 한 작업을 시작했다. “제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는 지금도 ‘문화 충돌’이에요. 쉽게 말하면 문화의 차이와 그 차이에서 오는 충격.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한국 사회와 그 역사적 특수성에서 형성된 제 자아가 1980년대 미국의 특수성과 충돌해 미술로 표현됐고, 당시의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고뇌와 좌절, 성찰, 화해의 과정이 계속 시각적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는 문화 충돌을 겪으면 몸이 아프다. 그 아픔을 작품으로 풀고 싶다고 한다. 1960~1970년대에 한국에서 미국 문화를 보며 자라 1980년대에 미국에 갔고 거기서 느낀 문화 충격, 그리고 2000년대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느낀 거대한 문화 충격이 그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노자>와 <장자>를 다시 읽고 공부하며 재해석한 작업도 나왔다. ‘문화 충돌’은 여전히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주제다.
그런가 하면 그는 요 근래 미술가 인생에서 하나의 중요한 기회를 맞기도 했다. 젊은 작가 이완과 함께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선정된 것. 베니스 비엔날레 국가관 작가로 참여하는 건 미술인에게는 가장 돋보이는 일 중 하나다. 이미 실력을 갖춘 작가가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며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비엔날레 참여는) 생각도 못했어요. 평소 비엔날레 같은 것에 현혹되지 말고 행여 그런 데에 갔다 왔다 해도 폼 잡지 말라고 늘 학생들에게 말했거든요. 근데 결국 제가 거길 가게 됐으니 마음이 어떻겠어요?(웃음)”
그의 작품을 내년 베니스 비엔날레까지 애타게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침 그의 신작을 살필 수 있는 개인전이 10월 28일부터 11월 30일까지 서울 PKM갤러리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5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에선 20여 점의 페인팅과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그간 그에 대해 너무 몰랐다면, 이번 전시가 그를 아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수린(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