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테이너를 위한 변
미술 전공자부터 비전공자까지, 영화배우부터 전직 대통령까지. ‘아트테이너’라 불리는, 지금 미술계를 지지하는 작은 축에 대한 이야기.
지난 3월 인사동의 한 미술품 경매사. 화제의 작품 한 점이 출품됐다. 영화배우 하정우의 회화 ‘킵 사일런스’였다. 배우는 물론 미술가로도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그의 작품이 전 시회가 아닌 경매에 출품된 건 처음이었다. 이날 경매 열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입소문으로만 떠돌던 연예인의 작품 가격을 경매라는 경로로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론의 관심은 말할 것도 없고, 경매 시작 전부터 다수의 서면 응찰이 들어왔다. 하정우의 작품은 이날 경합 끝에 1400만 원에 낙찰됐다. 이튿날 포털 사이트의 실시 간 검색창엔 온종일 그의 이름 석 자가 오르내렸다.
하정우는 2010년 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며 본격적으로 미술 시장에 데뷔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적은 없다. 2004년 잭슨 폴록과 바스키아의 작품을 보고 ‘이렇게도 그 림을 그릴 수 있구나’ 싶어 따라 그리기 시작한 게 첫 작품 활동이다. 그는 시간이 꽤 흘러 배우로서의 삶도 작품에 담았다. 2011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피에로>전이었다. 그해에 선보인 작품 속 숫자들은 그가 실제 받은 계약금이나 내면의 고독 등 스크린을 통해 미처 하지 못한 얘기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배우와 미술가라는 두 분야의 예술 활 동에 대해 “배우가 쌀로 밥을 짓는 일이라면, 화가는 그 찌꺼기로 술을 담그는 일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뉴욕 페이스 갤러리에서 ‘피카소 베이비’의 뮤직비디오를 촬영 중인 제이지
하정우만큼이나 지금 뜨거운 아트테이너가 솔비다. 그녀는 아트 퍼포먼스로 눈길을 끈다. 붓을 들고 춤추며 물감을 흩뿌리는 과정이 전시장에 펼쳐진다. 그녀는 심리 치료 중 의 사의 권유로 그림을 접했다. 그리고 지난 9월 가나아트갤러리에서 열린 <트레이스(Trace)>전으로 이 분야의 최고 스타가 됐다. 당시 전시에서 그녀는 대중의 눈에 비친 연예인 솔비와 자신의 본명인 권지안 사이에서 자아를 찾겠다며, 바닥에 설치한 캔버스 위에 서서 춤추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트(art)와 엔터테이너(entertainer)의 합성어 ‘아트테이 너’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부터다. 그녀의 등장에 기존의 연예인 출신 미술가들은 비로소 ‘아트테이너’란 이름으로 쉬이 정리됐다.
이들 아트테이너의 활동 방식은 연예인의 개성만큼이나 다양하다. 기본은 전시회를 열거나 아트 페어에 참가하는 것. 몽환적이고 자유로운 터치가 특징인 배우 구혜선은 2009 년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2013년 ‘홍콩 컨템퍼러리’에 초청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예술중학교 입시를 준비했다는 가수 나얼도 미술가 유나얼로 활동하며 그간 아홉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또 수묵화에 능한 심은하, 추상적 회화를 선보인 김혜수, 추상화와 자화상을 그리는 이혜영, 누드 드로잉을 선보인 조재현 등이 그간 단순히 ‘그림 좀 그리네’의 수준을 넘어 눈에 띄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데 아트테이너들의 이 같은 활동에 대한 미술계의 반응은 분분하다. ‘미술의 대중화와 저변 확대’라는 긍정적 평가가 있고, 가뜩이나 어려운 시장에서 ‘밥그릇을 빼앗는다’는 불만도 있다. 국내에서 몇 차례 개인전을 연 한 미술가는 후자의 경우. 그는 “신인 작가의 경우 국내 미술 시장에서 보통 호당 5만~10만 원 사이에서 작품 가격이 정해지는데, 연예인은 시작부터 이 기준을 가볍게 뛰어넘는다”며 “인기 있는 연예인일수록 작품이 이슈화되고, 수요가 생겨 가격을 마음대로 높여도 그만이라는 식의 행태를 보인다”고 토로 했다. 그런가 하면 미술계 실무자의 입장은 다소 온건하다. 한 갤러리 큐레이터는 “아트테이너들은 스타이기 때문에 화제가 되지만, 그게 작품의 가치 평가나 가격 형성에 그리 영향을 주진 않는다”며, “결국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말로 ‘연예인 화가’의 활동을 설명했다. 중립적 시각도 있다. 한국미술경영연구소의 김윤섭 소장은 “연예인들이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고 작품 활동을 한다 해서 이를 ‘옳고 그름’으로 가름해선 안 된다”며 아트테이너에 대한 찬반 논쟁은 결국 “작품을 만드는 이의 진정성 문제”라고 진단했다.
제임스 프랭코의 회화 작품 ‘I’m Proud of You’. 이미 몇 번의 개인전을 치른 그는 영락없는 미술가다.
바다 건너 외국의 경우 아트테이너들의 활동에 우리처럼 큰 관심을 두진 않는 분위기다. 그들은 오히려 배우나 가수가 쉽게 미술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건 그들에게 ‘예술적 감 성’이 있기 때문으로 치부한다. 한 예로 제임스 딘과 꼭 닮은 할리우드 스타 제임스 프랭코는 배우이자 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시인, 모델, 뮤지션, 교수라는 직업 을 가졌지만 ‘화가(artist)’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심지어 세계 최대 미술 커뮤니티인 ‘아트스페이스’ 계정(www.artspace.com/james_franco)에서 그는 자신을 ‘현대 의 르네상스 맨’이라고까지 묘사했다. 제임스 프랭코는 2010년 뉴욕 클록타워 갤러리(The Clocktower Gallery)에서 추상화를 선보이며 첫 개인전을 열었고, 2013년엔 뉴욕의 한 공간에서 <게이타운(Gay Town)>이란 전시를 열어 할리우드 배우가 아닌, 정식 미술가로서의 면모를 똑똑히 보였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활동을 하는 데 불만을 토로한 이 는 <뉴욕타임스> 외에 아무도 없었다(당시 <뉴욕타임스>는 그의 개인전을 “길게 늘여놓은, 아이러닉한 퍼포먼스”라고 무시했다). 가수 제이지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그는 2013년 뉴욕 페이스 갤러리에서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와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 등을 관람객으로 두고 무려 6시간 동안 랩 마라톤을 벌였다. 훗날 ‘퍼포먼스 아트 필 름’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 ‘피카소 베이비’의 뮤직비디오 촬영이었다. 그는 당시의 일로 음악계만큼이나 예술계에서도 러브콜을 받고 있다. 물론 그 자신도 무척 흡족해하는 모 양새. 한편 아트테이너로 분류하긴 뭣하지만, 제 나름 스타인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W. Bush)도 이 분야에서 뒤지지 않는다. 그는 대통령 퇴임 이후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와 옆집 강아지 등 온갖 강아지 그림을 그리며 꾸준히 그림 실력을 쌓았고, 마침내 2009년 댈러스의 한 갤러리에서 세계 지도자 24명의 초상화를 전시하는 개인전 <리더 십의 예술: 대통령의 개인 외교>를 열었다(단, 그는 최근 기괴한 ‘목욕 초상화’로 기존 지지자들이 정치적 신념에 의문을 품게 하고 있다).
올 초 미술 잡지 <아트넷>은 ‘2016년 미술계의 10가지 예측’ 기사를 통해 ‘더 많은 셀레브러티 미술가가 나올 것’이라고 진단했다. 올해는 이전보다 많은 연예인과 유명인이 미 술계에서 활동할 거란 얘기다. 아트테이너들이 본인의 영역을 넘어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나뉜다. 하지만 지금은 어쩌면 이들을 묵묵히 지켜볼 때 인지도 모른다. 미술가가 작품 활동에 매진하지 않고 스타로서 명성에 집착하거나, 스타가 유명세를 악용하는 건 당연히 피해야 하지만 ‘연예인 화가’들의 활동 자체를 비판할 게 아니라면 애초부터 색안경을 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미술가가 스타가 되는 것, 스타가 미술가가 되는 것 모두 현재 우리 사회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에디터 |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