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이란 말 대신
유니버설발레단의 수석 무용수 부부로 국내외에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발레리나 황혜민과 발레리노 엄재용이 발레단을 떠난다. 11월 24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하는 <오네긴>에서 고별 무대를 펼치는 두 무용수와 나눈 마지막 이야기.

그녀,황혜민을 기억하다
‘발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온 내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예고 시절, 등굣길 창문 너머로 바라본 무용과 동기들의 연습 장면이다. 이른 아침 자습 시간에 불평하며 학교에 도착할 즈음, 그들은 이미 학교에 나와 연습에 한창이었다. 매일 아침 복도 창문으로 바라본 장면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지난겨울, 뮤지컬 <팬텀>에서 벨라도바 역을 맡은 황혜민 발레리나를 보고 다시금 그 장면이 떠올랐다. 바스러질 것 같은 그녀의 동작과 격정적인 표정 연기는 내 오래된 기억과 오버랩되며 완전히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뒤로 그녀의 공연 영상을 찾아보면서 몰래 팬심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 황혜민 발레리나가 무대를 떠난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인 <오네긴>에서 엄재용 발레리노와 함께 마지막 무대를 꾸민다. 단순히 한 발레단의 수석 무용수라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황혜민은 한국을 대표하는 발레리나다. 선화예술중학교,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등에서 수학한 후 2002년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한 그녀는 입단 1년 만에 수석 무용수 승격이라는 놀라운 경력을 쌓았다.

그, 엄재용을 기억하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엄재용 발레리노와 황혜민 발레리나가 함께 출연한 방송을 보았다. 엄재용 발레리노는 그날 방송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사회자가 그에게 원래 이렇게 말이 없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을 정도다. 마음속으로 못내 걱정하며 질문을 건넸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의 입에서 청산유수 같은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는 뉴스처럼 딱딱한 분위기에서 돌아가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긴장한다고. 몇 년 전 JTBC의 <신화방송>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출연한 적이 있고, KBS의 <1박2일>에도 직접 신청까지 해서 출연한 그는 자유롭고 편한 분위기에서는 카메라가 두렵지 않다. 현재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이기에 발레 무대 외에도 앞으로 다양한 활약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선화예술중학교와 고등학교, 워싱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 등을 졸업한 엄재용 발레리노가 유니버설발레단에 입단한 시기는 황혜민 발레리나보다 2년이 앞선다. 어릴 때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한 그는 남들보다 시작은 느렸지만 귀족적인 외모와 서구적 체형으로 보기 드문 조건을 갖춘 유능한 발레리노다.
은퇴 소식을 듣고 많이 아쉬웠습니다. 동반 은퇴를 결정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황혜민 은퇴는 1년 전쯤 결정했어요. 처음 결정하고 나서 바로 실감한 건 아니었어요. 남은 1년 동안 즐기자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이제 남은 공연이 <오네긴> 하나뿐이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지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조금 슬프기도 해요. 엄재용 1년 전쯤부터 유니버설발레단의 정식 무용수가 아닌 객원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저는 그동안 부상이 많아서 은퇴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물론 당장 와 닿진 않지만, <오네긴>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면 실감하겠죠. 17년이나 몸담은 발레단이니까요. 그날이 오면 어떤 마음일지 가늠할 수 없지만 많이 슬플 것 같아요. 하지만 결정한 대로 밀고 나가야죠. 혜민 씨와 달리 저는 발레단을 그만두는 것이지 무용을 그만두는 건 아닙니다.
은퇴작으로 특별히 <오네긴>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오네긴으로 은퇴한 무용수가 많죠. 황혜민 은퇴 작품을 정하는 것이 무용수로서 아주 중요해요. <오네긴>은 매년 할 수 있는 발레가 아니거든요. 계약 같은 여러 가지 것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 번 공연하기까지 4년이 걸려요. 이제는 은퇴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했고 마침 <오네긴>은 저희 둘 다 제일 좋아하는 공연이니까요. 엄재용 발레를 거듭할수록 클래식 발레보다는 드라마 발레가 더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은퇴작으로 <오네긴>을 선택했죠. 음악, 안무, 드라마가 잘 맞아떨어지고 연기력으로 승부할 수 있는 발레예요. 무대에서 감성과 연기를 통해 연륜과 경험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고른 거죠.
두 분의 역사적인 마지막 무대를 장식할 <오네긴>에서 맡은 역할이 궁금합니다. 황혜민 모든 발레는 여자 위주잖아요. 제목만 봐도 다 여자 주인공 이름인데 ‘오네긴’은 남자 주인공 이름이에요. 제가 맡은 타티아나는 열여섯 살에 오네긴을 짝사랑해요. 하지만 거만한 오네긴은 타티아나가 전한 편지를 찢어버리죠. 타티아나는 15년 후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오네긴은 그제야 타티아나를 사랑하게 되죠. 엄재용 오네긴, 타티아나, 올가, 렌즈키 넷이서 만들어가는 이야기예요. 혜민 씨가 설명한 것처럼 거만한 남자 주인공 오네긴이 제가 맡은 역할입니다.
은퇴를 앞둬서 그런지 두 분의 데뷔 무대를 회상하게 돼요. 황혜민 2001년 <호두까기 인형>으로 데뷔했어요. 발레단 입단 전 학생 때라 너무 어렸고 무대 경험도 없었죠.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긴장하는 바람에 어떤 스텝을 하고 어떤 공연을 펼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예요. 각 작품마다 데뷔 무대가 있지만 모든 공연을 통틀어 첫 무대였으니 많이 떨렸죠. 학교 다닐 때도 물론 콩쿠르에 나가고 무대에도 서지만 프로처럼 전막을 공연하는 기회는 거의 없거든요. 엄재용 맞아요. 매 작품으로 데뷔하죠. 전 발레단 자매 학교에서 <호두까기 인형>으로 데뷔했어요. <호두까기 인형>은 매년 무대에 올리는 공연이기 때문에, 어린 유망주에게 주역으로 기회의 장이 되는 작품이에요. 본격적인 데뷔는 2000년 <백조의 호수>예요. 지방 공연 이틀 중에 제 공연 전날 무용수가 다쳐서 이틀을 다 무대에 섰어요. 그날이 제 생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았죠.
각자 맡은 역할 중 가장 인상에 남은 공연이나 배역은요? 엄재용 저는 <지젤>요. 바리시니코프의 <지젤>을 보고 나서 본격적으로 발레를 시작했기 때문에 애착이 가요. 저희 어머니는 발레리나였어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저는 어머니 덕분에 발레를 접하긴 했지만 발레를 좋아한 건 아니었어요. <지젤> 비디오를 보고 발레리노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죠. 황혜민 저는 <오네긴>의 타티아나라고 말하고 싶어요. 타티아나가 열여섯 소녀의 감성과 성숙한 여인의 감성을 모두 표현해야 하는 역할이라 그동안 쌓은 실력을 선보일 수 있으니까 자신도 있고 애착도 가요. 엄재용 사실 저도 <오네긴>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혜민 씨가 같은 공연을 말할 줄 알고 있었어요. 너무 똑같을까봐 다른 공연을 꼽았습니다. 하지만 모두 기억에 남는 공연이죠.

황혜민 발레리나가 입은 재킷과 탑, 스커트는 La Silhouette de Eugenny, 엄재용 발레리노가 입은 슈트와 셔츠는 Hugo Boss, 슈즈는 모두 Repetto 제품.
처음 정식 파트너로 같이 공연한 건 2004년 <라 바야데르>죠? 그 후 수없이 많은 무대에 함께 섰을 텐데, 그동안 활동하면서 서로 어떻게 영감을 주고받았나요? 황혜민 원래 처음엔 서로 다른 파트너가 있었어요. 그러다 각자 파트너가 외국으로 가게 됐어요. 처음 같이 했을 땐 떨렸지만 4년 정도 흘렀을 때 제일 좋았어요. 그때는 모든 게 맞아 떨어지는 시기였거든요. 저희는 사귄 기간도 길고 계속 같이 춤을 춰서 눈빛만 봐도 모든 걸 알아요. 다른 파트너와 공연할 땐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동작을 맞춰야 하지만 재용 씨와는 그럴 필요가 없죠. 서로 잘 알기 때문에 말이 필요 없어요. 엄재용 발레 테크닉으로 말하면, 중심을 잡는데 그게 무용수마다 다르거든요. 하지만 저희는 서로 워낙 익숙해서 말이 필요 없죠. 황혜민 저희는 호흡이 잘 맞아요. 여자 캐릭터는 남자 캐릭터가 누구냐에 따라 많이 달라요. 재용 씨는 파트너링에 대한 센스가 있고 편안하게 잡아주기 때문에 제가 연기하기 편해요. 그런 걸 캐치하는 게 경험이고 센스죠. 엄재용 남자 무용수가 아무리 잘 잡아줘도 여자 무용수가 반응하지 않으면 좋은 조합이 생겨날 수 없거든요. 혜민 씨는 그런 면에서 센스가 있어요.
발레뿐 아니라 얼마 전에는 뮤지컬 <팬텀> 무대에서도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죠. 발레 무대와는 많이 달랐을 텐데, 에피소드가 궁금해요. 황혜민 뮤지컬 관객층이 상당히 넓어서 깜짝 놀랐어요. <팬텀>을 보고 <오네긴>을 예매한 관객도 많아요. 가장 큰 차이점은 발레는 무용수가 최상의 조건에서 설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에 몸을 풀고 공연을 준비하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하루 종일 리허설을 하니까 어려움이 많았죠. 하지만 사랑도 많이 받았고 잊지 못할 경험이에요. 엄재용 <팬텀> 공연이 겨울이었어요. 지방 투어 때 제가 뮤지컬 배우와 방을 같이 썼는데, 저희는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잖아요. 몸 연기가 중요하니까. 그런데 뮤지컬 배우는 목 때문에 히터를 틀지 못해 어려움이 있었죠. 하지만 다음 공연에선 기획사 측에서 배우와 발레리노가 따로 방을 쓰게 해줘서 다행이었어요. 혜민 씨 말처럼 기다리는 시간도 많아요. 하지만 새로운 무대가 참 재미있었고 다시 서고 싶습니다.
올해도 여러 작품에 출연하셨죠. 짧은 시간에 쉽게 배역에 빠져들었다가 나오는 편인가요? 황혜민 공연이 끝나도 배역에서 바로 빠져나오긴 힘들어요. 전막 공연을 하고 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안 와요. 에너지를 다 쓰고 혼이 빠져나간 느낌인데, 자꾸 생각나고 그런 마음이 이틀 정도 계속돼요. 엄재용 저는 반대로 확 빠져나와요. 깨끗이 끝내죠. 하지만 무대에 대한 아쉬움은 오래가요. 저만 아는 실수가 있더라도 그 아쉬움이 오래가죠.
그렇게 배역에 몰입한 다음 멘털 관리는 어떻게 하나요? 정신적으로 힘든 역할을 맡을 때도 많잖아요. 엄재용 발레는 대부분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니까 영화나 뮤지컬처럼 연기를 하면서 역할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든 건 거의 없어요. 하지만 공연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어요. 많은 사람 앞에서 몸으로 연기해야 하니까 실수에 대한 압박이 있어요. 하지만 저는 요즘 게스트 공연을 많이 다니다 보니 혼자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푸는 것 같아요. 황혜민 저는 아예 다른 걸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요. 맛집 찾아다니는 걸 좋아해요.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은퇴하는 것일 뿐, 두 분이 무대를 아예 떠나는 건 아니죠? 앞으로 계획이 궁금해요. 황혜민 저는 2세를 준비하고 싶어요. 재용 씨와 달리 저는 지금으로서는 무대를 떠난다는 말이 맞아요. 몇 년 후 다시 발레를 하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은퇴 무대와 자신에게 집중하려고 해요. 엄재용 저는 일본 공연이나 소규모 공연에 주로 서려고 해요. 일본은 프로 무용수를 초청해 학생이나 직장인과 함께할 수 있는 갈라 형식 공연도 많죠. 선배들이 자리를 잘 잡아놓아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관객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황혜민 그동안 사랑해주신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관객이 있어서 저희가 존재할 수 있었어요. 그 덕분에 항상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무대를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고 아쉬워하는 분들도 많지만 박수 칠 때 떠나고 싶어요. 엄재용 제가 부상으로 수술을 세 번 정도 했어요. 무릎 수술 후 복귀한 작품이 <오네긴>이었죠. 당시 공연이 막을 내린 다음 한없이 울었어요. 무대로 돌아온 게 너무 좋아서요. 관객이 없으면 제가 재활을 할 필요도 없었겠죠. 발레는 벽에 대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동안 관객이 정말 큰 힘이 됐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황혜민 참, 정말 수고했어요. 엄재용 이 말밖에 없는 것 같아요. 참, 정말 수고했어요.
유니버설발레단 <오네긴>
2013년 이후 관객을 찾아오는 <오네긴>은 드라마 발레의 대표 격인 작품이다. 11월 24일부터 26일까지 3일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오네긴>에서 황혜민 발레리나와 엄재용 발레리노의 고별 무대는 개막 공연과 폐막 공연에서 만날 수 있다.
문의 070-7124-1839(유니버설아트센터)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김잔듸 헤어 & 메이크업 김아영 장소 협찬 유니버설아트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