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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

LIFESTYLE

자칫 그를 배구 선수 엄정행으로 기억해야 할 뻔했다. 남들은 다 어느 정도까지 자라는 키가 양껏 자라지 않아 대학 입시를 앞둔 시점에 눈물을 머금고 배구를 포기한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래도 우린 테너 엄정행이 좋다. 노래하는 엄정행이 최고다.

About Him 한국 가곡의 선구자 테너 엄정행
1943년 경남 양산 출생  1961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 입학, 홍진표 교수에게 사사  1968년 명동국립극장 제1회 독창회  1976~2008년 경희대학교 교수  2003년 (사)연우 엄정행음악연구소 창단, 엄정행 성악 콩쿠르 제정  2008년 데뷔 40주년 기념 독창회  2009년 연우여성합창단 창단
수상경력 문화교육부장관상, MBC방송대상 가곡 특별상·공로상, 경희대학교학원장 공로상, 한국가곡상 특별 공로상, 대한민국 대통령 근정포장, 세일 가곡상, 윤동주 문학상 예술상

1974년 경희대학교 음악대학의 한 교수 연구실. 음대 학장으로 재직 중이던 가곡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 교수는 1시간 분량의 칸타타(작은 규모의 오페라)를 열심히 작곡 중이었다. 개교 25주년 기념 연주회에 올릴 곡이었다. 음대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노래할 이 칸타타는 조영식 총장이 직접 시를 쓴 후 김동진 교수에게 작곡을 의뢰한 프로젝트였다. 경희대 캠퍼스에 있던 오래된 목련나무를 보고 지은 조영식 총장의 시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활짝 핀 목련화의 순결하고 우아한 모습, 함께 피고 함께 지는 모습이 인생의 귀감이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작곡을 마친 김동진 교수는 각 악장의 아리아를 어떤 학생에게 부르게 할지 고민했다. 때마침 그의 교수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충주사범대학교 강사로 출강 중이던 엄정행이 연구실을 찾았고, 김동진 교수는 대충 멜로디만 그려놓은 오선지를 건네며 한번 불러보라고 했다. 칸타타 제2악장의 아리아였다. 당시 엄정행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 교수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힘 있고 풍성하면서 동시에 아름답다는 평을 듣던 그는 처음 받아 든 아리아를 노련하게 불러젖혔다. 소프라노에게 가려던 그 곡은 엄정행 차지가 됐다. 그는 공연 후 이 곡을 단독으로 레코드 취입하며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 곡이 바로 가곡의 대중화에 불을 붙인 ‘목련화’다.

1943년 경남 양산에서 태어난 엄정행은 어려서부터 어린아이답지 않은 강단이 있었다. 양산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한국전쟁이 일어나 점점 남으로 후퇴하던 백골부대가 학교 운동장에 막사를 짓고 오랜 기간 주둔하게 됐다. 양산중학교 음악 선생이던 아버지와 함께 학교 사택에서 지내던 엄정행의 초등학생 시절은 지금으로 말하면 모 방송사의 ‘남자의 자격-군인’과 ‘진짜 사나이’가 뒤섞인 생활이었다. 엄정행은 ‘부대의 마스코트’로 불리며 군부대 대장의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군인들도 그를 막냇동생처럼 격 없이 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운동에 소질이 있던 그는 군인 형들과 어울리며 제대로 된 체력 훈련을 받기도 했다. 양산중학교에 입학해서도 그의 운동신경은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에 음악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잘생긴 데다 노래를 정말 잘하셨어요. 근데 운동까지 잘하시는 거예요. 시골 학교라 방과 후에 할 게 없어서 선생님과 매일 운동을 했는데, 그러다 보니 졸업할 때쯤 부산 동래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더라고요.” 체육 특기생인 그는 전국 배구 시합에 나가 좋은 성적을 거둘 정도로 실력이 좋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원서를 들고 찾아간 경희대학교 체대에서 “키가 작아서 받아줄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다시 양산으로 내려온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좋은 목소리를 타고났으니 공부해서 음대 시험을 보라’는 것. 입시까지 한 달여의 시간이 있었다. 부산고등학교 음악 선생이자 유명한 바리톤이던 김점덕 선생에게 발성법과 시험곡만 겨우 익혀 실기시험장으로 갔다. 콩쿠르에서 이미 1~2등을 수상한 학생들 틈에서 그는 차마 노래라고 할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내려와서는 “학생은 베토벤이 좋은가, 슈베르트가 좋은가?”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베토벤과 슈베르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대답만 남긴 채 학교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며칠 뒤 고향집으로 우편물이 하나 배달됐다. 놀랍게도 합격증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에 숨은 잠재력을 교수들이 발견한 것이다.

1961년 3월, 입학은 했지만 한계는 금세 찾아왔다. 발성을 하는데 목에서 피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도통 노래가 되지 않았다. 한 달 노래하고 입학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복도 저 멀리에서 교수가 나타나면 그길로 줄행랑을 쳤다. 콩쿠르에서 입상한 친구들 앞에서도 점점 주눅이 들었다. “1학년 내내 노래는 하지 않고 운동만 했어요. 배구 전국 대회에 세컨드 선수로 따라다니며 체대 학생처럼 굴었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차라리 시골 가서 농사를 짓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 찰나 이탈리아에서 공부를 마친 교수님이 복귀한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실제로 뵈니 노래면 노래, 피아노면 피아노, 거기에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까지 못하는 게 없는 거예요. 학생들이 너나없이 그 교수님께 레슨을 받으려고 줄을 섰죠. 저도 오디션이나 한번 보고 떨어지겠다는 마음으로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또다시 반전의 결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 친구들은 떨어지고 그는 합격한 것. 그를 선택한 교수의 변은 이렇다. “너는 악기가 좋다.” 수년간 운동으로 다진 그의 다부진 몸에서 성악의 미래를 발견한 그의 스승이자 은인은 바로 홍진표 교수였다.

2학년 때부터 본격적인 레슨이 시작됐다. 고향에서 학비를 받아 한 달 치 레슨비를 내고 나면 주머니에 남는 돈은 고작 500원에서 1000원. 당연히 생활은 말도 못할 정도였지만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만큼 더욱 속도를 내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배구 선수로 활동하며 게거품을 물 정도로 고된 훈련을 소화한 그의 악착같은 끈기는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훈련이 끝난 뒤 소금물로 수분을 보충하던 시절을 떠올리면 목에서 피가 나고 하루에 3~4시간씩 노래를 부르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부와 대학원, 총 7년 동안 홍진표 교수를 따라다니며 개인 레슨을 소화했다. 그렇게 7년째 되던 해에 그는 마침내 입학 당시 그를 월등히 앞질렀던 동기들에 비해 앞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 신인음악회에 출연하고 동아방송 합창단으로 활동하면서 서서히 제 목소리를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1968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첫 독창회를 열며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홍진표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 전 농사꾼이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지금의 성공이 있기까지 끈기와 부지런함이 밑바탕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2년 첫 음반 발매 이후 지금까지 한국 가곡, 이탈리아 가곡, 오페라 아리아 모음곡 등 22장의 레코드와 10장의 CD 발매, 그리고 3500회의 공연 횟수는 한국 성악가로서 깨기 힘든 기록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이것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다. 남들보다 먼저 미래를 준비하고 개척한 실천력이다.
제작자가 아닌 성악가인 그가 1974년 국내 최초로 스테레오 형식의 가곡 LP판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이런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레코드 제작은 대학 시절 ‘앞으로 현대사회는 매스컴 시대’라는 강의를 들은 것이 시발점이 됐다. “강의를 들으면서 ‘매스컴 시대가 되면 그걸 이용해 우리 노래를 더 알릴 수 있겠구나. 사람들이 더 많이 부르게 될 수도 있겠구나. 그럼 나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보니 그때까지 국내 가곡 음반은 모두 SP 모노판뿐이었어요. 미국에서 1950년대 부터 LP가 활발히 보급되기 시작했으니 한국에도 머지않아 그 영향이 미칠 거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비목’을 작곡한 장일남 선생님을 찾아가 11곡을 받아서 스테레오 LP판을 녹음했습니다.” 레코드 회사가 제작에 나서지 않으니 그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과정은 복잡했다. 곡마다 문화관광부 인증 번호가 필요했고, 작사가(대부분 시인)와 작곡가들의 도장도 받아야 했다. 홍난파 선생, 현제명 선생 등 이미 세상을 떠난 작곡가, 작사가가 많은 상태. 주소를 찾아 돌아가신 분들의 가족에게 사인을 받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

세상은 공평하고, 그래서 노력하는 자에겐 행운의 여신도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때마침 FM 라디오가 개국을 알렸다. 방송사마다 새로운 LP판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 LP로 된 가곡 레코드는 엄정행 앨범뿐. 그의 노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엄정행을 궁금해했고, 그의 무대를 찾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곱슬머리 엄정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고 지방 방송국이 개국하면서 그는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했다. 하루에 여수와 속초를 오가며 무대에 서는 일이 다반사였고, 전국 공연장을 누비다 공연이 끝나면 강의실로 복귀해야 하는 상황도 많았다. 1980년과 1990년대는 그야말로 엄정행의 전성기였다. 그것은 곧 우리 가곡의 전성기라는 말과 같았다.

독창회와 오페라, 강의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그가 빼놓지 않은 게 하나 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10년 동안 진행한 <안녕하십니까, 엄정행입니다>라는 MBC FM 클래식 프로그램. 순수 음악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 프로그램은 아침 6시부터 7시까지 방송이라 많은 부분 녹음으로 이루어졌지만 역시 상상 이상의 희생이 필요했다.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데 ‘왜 내가 이걸 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만큼 힘들었죠. 방학 때 20일 가까이 해외 공연이라도 갈라치면 새벽 1시부터 4시까지 스튜디오를 빌려 열흘 넘게 녹음을 해놓아야 했어요. 근데 왜 제가 그 방송을 했냐 하면, 공부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전 세계 다양한 클래식 연주자의 이름을 한 번씩 소리 내어 불러보고 그 음악을 듣는 건 방송을 하지 않았다면 평생 경험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초대 손님으로 오보이스트가 나오든 첼리스트가 나오든 그들과 전공에 관해 막힘 없는 대화가 가능했다. 물론 부담감도 심했다. “외국에서 대사로 지내다 귀국한 청취자가 한 분 계셨는데 그분이 매일 제 방송을 듣고 모니터링을 하시는 거예요. 방송 끝나면 정확히 7시에 ‘따르릉’ 전화가 와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제가 모두 잘 모르니까 곡명을 말할 때 완벽하게 발음하지 못한 경우가 있었나 봐요. ‘오늘 그건 그렇게 발음하는 게 아닙니다’라고 항상 지적하셨어요. 창피할 때도 있었지만 배운 것이 훨씬 많은 시간이었죠.”
많은 사람들이 가곡은 풍월로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가요처럼 나도 부르고 너도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곡도 제대로 부르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엄정행은 그래서 새롭게 앨범을 녹음할 때 작곡가나 작사가를 찾아가 ‘이 곡을 어떤 생각으로 썼는지’, ‘곡을 쓴 게 아침인지, 저녁인지’, ‘이 부분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등을 물어봤다. “열 번 무대에 서면 맘에 안 드는 무대가 열 번이지만 하룻밤 자고 나면 잊히고 그래서 또 새로운 무대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앨범은 달라요. 한번 녹음해놓으면 영원히 남기 때문에 거듭 확인하고 검증한 뒤 노래해야 합니다.” 이렇듯 원리원칙을 강조하는 그지만 무대만큼은 ‘enjoy’해야 하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아마 모든 연주자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대에 설 겁니다. 학생들에 저는 ‘관객과 대화하듯 노래하라’고 해요. 그래야 오랫동안 무대에 설 수 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그에겐 잊을 수 없는 공연이 하나 있다. 40년 전쯤 강원도 도계라는 탄광촌에서 선 무대다. “공연장도 없어서 영화관에서 열린 독창회였죠. 몇 명의 관객을 위해서라도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게 제 신조이기 때문에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계까지 갔어요. 그런데 마을 입구가 축제 분위기인 거예요. 독창회를 보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모인 거죠. 제가 지나가는 길에서 고등학교 브라스밴드가 행진곡을 연주해주는데, 정말 그런 독창회는 세상에 다시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무대에는 돗자리를 하나 깔고 집에서 쓰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갖다 놓았더군요. 어디서 구했는지 낡은 병풍을 세워 왼쪽은 대기실, 오른쪽은 무대로 나눠놓고요. 시설이 그 정도로 열악한데 관객은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저에겐 그런 무대가 진정한 무대예요. 진짜 평생 한 번 맛볼 수 있을까 말까 한 맛있는 무대죠.”

그는 현재 정년퇴임 후 고향 양산에 내려가 여성합창단을 창단하고, 엄정행 성악콩쿠르를 제정해 11년째 성악 인재를 발굴하고 있다. 입상자들의 기량은 날로 발전하고 있고, 언젠가 국제 콩쿠르로 발전해 더 많은 학생이 뜻깊은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게 되기를 그는 간절히 소망한다. 그에겐 가까운 미래에 연주자들이 대관료 없이 맘껏 연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음악당을 하나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 돗자리 위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올려놓고 병풍을 두른 40년 전 무대의 감동. 그 진짜 무대가 가까운 시일 안에 그의 음악당에서 재현될 것이다. 그는 엄정행이니까.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