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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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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마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안동은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다. 볼보 S90과 함께 안동의 고즈넉함을 만끽하고 왔다.

하회마을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안동은 충분히 아름다운 도시다. 볼보 S90과 함께 안동의 고즈넉함을 만끽하고 왔다.

그간 출시된 볼보의 세단들을 잠깐 생각해보자. 이제는 단종된 S80이나 S60 같은 차량 말이다. 볼보의 세단은 꾸준한 판매를 기록하긴 했지만 디자인에서 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다소 투박한 디자인은 SUV에는 어울렸지만 세단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2012년 토마스 잉겐라트가 총괄 디자이너로 부임하면서 볼보는 완전히 달라졌다. 최근 출시한 XC90과 S90, V90의 디자인을 맡은 그는 볼보의 디자인을 극적으로 바꿔놨다. 볼보 특유의 수수함을 잃지 않은 채 매력 포인트를 군데군데 집어넣었다. 요즘의 볼보는 안전하기만 한 차가 아니라 갖고 싶은 차로 변했다. 잉겐라트의 세례를 받은 S90 역시 마찬가지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하고, 따분하지 않고 고급스럽다. 간결한 디자인으로 대변되는 볼보 특유의 인테리어는 더욱 그 정체성이 명확해졌다. 근사한 코트를 걸친 신사 같은 느낌의 차였다. 그래서 안동으로 향했다. 안동은 하회마을로 대표되는 역사를 간직한 예스러운 도시면서 산과 호수를 곁에 둔 아름다운 도시다. 서울에서 떠나면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S90의 주행 느낌은 외관과 상당히 닮았다. 재미있는 차는 아니지만 상당히 편안하고 안정적이다. 노면 반응도 독일 차에 비하면 좀 더 온화하다. 운전자의 등과 손에 느껴지는 감각을 차가 적당히 걸러 전달해주는 느낌이다. 이 정도 크기의 대형 세단을 탈 사람들에게는 훨씬 편안하게 느껴질 것이다.

1 명인 안동소주는 향이 구수하고 목넘김이 부드럽다. 양조장에 찾아가면 직접 술 만드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3 물고기식당의 은어찜은 환상적인 맛이다. 꼭 먹어보길 권한다.

안동 하면 하회마을이나 찜닭, 간고등어 등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에게는 안동소주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언젠가 한 번 마셨을 뿐이지만 구수한 풍미가 아직도 가끔 생각나서다. 안동 시내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외곽에 명인 안동소주의 본사가 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선정한 ‘찾아가는 양조장’ 중 하나인 이곳에선 양조 과정을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체험도 할 수 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간 내부에서는 발효를 위해 담아둔 누룩 냄새가 시큼했다. 더 들어가니 거대한 증류기가 시야를 가득 채운다. 오직 안동소주만을 위해 움직이는 증류기다.
안동소주의 역사는 700년쯤 된다. 쌀로 누룩을 만든 뒤 28일간 전술을 빚어 청주를 만든다. 이를 다시 증류하고 여과시켜 100일간 숙성시킨다. 이렇게 오래 숙성시키는 이유는 불필요한 향을 없애기 위해서다. 그렇게 만든 안동소주는 향이 은은하고 목으로 넘어가는 감각도 부드럽다. 본래는 알코올 도수가 45도나 되지만 요즘에는 저도주가 유행해서인지 30도 정도의 술이 가장 많이 팔린단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우리의 전통술 중 왜 유독 안동소주만 이름이 남아 있는 걸까? 관계자는 원나라의 한반도 진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한 원의 가장 큰 병참기지가 안동에 있었고, 병사들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술이 필요했고, 맛과 향 역시 발전을 거듭했다. 안동소주가 이름을 널리 알린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저녁에 마시기 위해 한 병을 사 들고 차를 안동 시내로 돌렸다.
안동의 먹거리 하면 보통 찜닭이나 간고등어, 갈비를 떠올린다. 다들 나쁘지 않지만 안동에서 오직 한 군데에만 가야 한다면 ‘물고기식당’이라는 음식점을 추천하고 싶다. 이곳의 메인 메뉴는 은어찜이다. 은어라는 어종은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먹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 처음 먹어보는 메뉴였다. 은어찜은 먹는 방법도 독특했다.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듯 은어의 살을 발라 먹는다. 은어는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만큼 육질이 연하고 보드랍다. 씹어 먹는다기보다 혀로 녹여 먹는다고 봐야 한다. 정말 입에서 살살 녹는다. 주인에게 이렇게 크고 싱싱한 은어를 어떻게 매일 내놓느냐고 물으니 섬진강 어부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은어찜 한 상을 시키면 10가지 정도의 밑반찬이 갓 지은 밥과 함께 나오는데 모두 직접 만든 것이다. 건강한 재료로 잔머리 굴리지 않고 만든 것이 느껴진다. 두당 1만2000원을 내고 먹기 미안할 정도의 상차림이다. 꼭 한번 맛보길 권한다.

1 안동 교외의 국도는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드라이브에 최적화된 도로다. 2 볼보 S90은 안동의 호젓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안동은 역사가 잘 보존된 곳이다 보니 고택이 굉장히 많다. 전국에 있는 고택 650여 채 중 25% 정도가 안동에 있어 소위 ‘한옥 스테이’도 쉽게 경험할 수 있다.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낭만적이지만 현대인에게는 아무래도 불편한 점 또한 많다. 좀 더 청결하고 편안한 고택의 하룻밤을 원한다면 구름에라는 전통 리조트가 있다. 리조트라지만 규모는 아담하다. 17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지은 고택 7채가 전부다. 물론 실제로 이 지역 양반가에서 생활하던 고택이다. 고택을 그대로 유지했지만 편의 시설은 충분하다. 고택의 가장 큰 불편함이던 화장실과 샤워 시설은 현대적으로 단장했다. 대신 조명과 에어컨, 온풍기 등은 최대한 보이지 않게 설계했다. 심지어 전기 콘센트 구멍도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게 한 것은 고택에서 숙박하는 감성을 해치지 않기 위한 세심한 배려다. 방도 깨끗하고 직원들의 서비스도 좋아 호텔에 익숙한 이라도 전혀 불편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의 고급 료칸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곳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창문을 활짝 열고 스마트폰으로 가야금 연주곡을 들으며 아까 구입한 안동소주를 마셨다. 향은 구수하고 목넘김은 부드러웠다. 이게 옛 선조들의 풍류겠거니 싶었다.
다음 날 우리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 같은 관광지도 있었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곳이라 썩 내키지 않았다. 목적지를 고민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내 손이 계속 차 안의 나무를 쓰다듬고 있다는 걸. 기분 좋은 촉감이었다. S90의 인테리어에 쓰인 나무는 스웨덴에서도 가장 추운 지방의 것이다. 밀도가 높고, 패턴도 독특하다. 이 나무의 질감 하나로 인테리어의 전체적인 느낌이 달라진다. 안동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좋은 나무가 많다. 계획을 바꿔 나무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1 600년을 산 이 나무는 높이가 무려 30m에 달한다. 한국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다. 2 와룡면에는 500년을 산 뚝향나무가 있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자태다.

안동 시내를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면 상당히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숲과 나무가 억세지 않고 예쁘게 솟아 있고 길도 한적해 드라이브하기 좋다. 유럽의 지방 도로라고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길이었다. 안동시 녹전면 사신리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느티나무가 있다. 높이 30m, 둘레 10m에 달하는 거목은 600년을 살았다. 앞에서 마주하면 압도적이다. ‘신령하다’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세히 보면 큰 가지 하나가 잘려나간 흔적이 보이는데, 일제강점기에 잘린 것이다. 나무줄기에는 성황당에서나 볼 법한 새끼가 쳐져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를 영험하게 여긴다는 증거일 것이다. 근처 와룡면에는 천연기념물 314호인 500년된 뚝향나무가 있다. 뚝향나무는 향나무와 비슷하지만 곧게 자라지 않고 아래에서 엿가락 꼬이듯 틀어져 올라가다 사람 키 정도의 높이에서 수평으로 퍼진다. 높이가 3.2m에 달하는 이 뚝향나무는 고대의 나무처럼 신화적인 생김새다. 사신리의 느티나무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시적인 고요함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안동에는 귀한 나무가 꽤 많다. 앞서 소개한 두 나무를 비롯해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것만 7종이나 된다.
지금 안동은 꽤 큰 꿈을 꾸고 있다. 세계유산의 도시가 되는 것이다. 하회마을은 이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으며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유교책판’도 지난해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인류무형유산 분야까지 지정되면 안동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인류의 문화유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역사적 유산을 제외하고도 안동은 여전히 경험할 것이 많은 매력적인 도시다. 곧 늦가을이 되면 안동의 아름다운 숲과 나무가 빨갛게 물들 것이다. 그 짧은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에디터 이기원(lkw@noblesse.com)
사진 노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