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어디까지 봤니?
“최근 몇 년 사이만 해도 국내외 애니메이션 지형도는 격변을 거듭해왔다. 젊고 실험적인 애니메이터가 매년 꾸준히 쏟아져 나왔고, 자본과 기술의 경계는 국경을 초월한 지 오래다.”
어둠 속에서 또각거리며 다가오는 구두 소리가 들린다. 곧이어 등장한 건,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의 두 남녀. 그들은 황량한 모래 바닥 위로 돗자리 모양의 선을 긋더니, 이내 구두를 벗고 들어가 기묘한 소꿉놀이를 시작한다. 미성숙한 어른들의 연애를 어린 시절 소꿉놀이에 비유한 이 창의적인 작품은 유럽 어느 거장 감독의 실험영화도, 전위예술가의 퍼포먼스도 아니다. 지난 6월, 국내 최초로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한 정유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연애놀이>(2013년)다. 흔히 애니메이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상·하의를 야무지게 차려입은 채 인간의 말로 떠드는 동물 캐릭터라든지 안개에 뒤덮인 마법의 성, 긴 머리를 늘어뜨린 공주나 거대한 변신 로봇 같은 것 말이다. 문화에 따라 조금씩 차이야 있겠지만, 아직도 많은 이에게 애니메이션이란 무지갯빛 동심의 세계, 꿈과 희망을 먹고 피어나는 유년의 꽃밭이다. 애니메이션 장르가 어린이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한 국내에서는 특히 그렇다. 나이를 먹을수록 작품 하나하나보다는 장르 자체에 의식적으로 냉담해지고, 뚝심 있는 일부 마니아층을 ‘나잇값 못하는 어른’으로 치부해버리기도 한다. 관객들이 나이를 먹듯, 애니메이션의 세계도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 간과해온 탓이다. 사실 최근 몇 년 사이만 해도 국내외 애니메이션 지형도는 격변을 거듭해왔다. 젊고 실험적인 애니메이터가 매년 꾸준히 쏟아져 나왔고, 자본과 기술의 경계는 국경을 초월한 지 오래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탄탄한 구성과 면밀한 세계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갖춘 애니메이션 작품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아이들의 손에 이끌려 간 극장이나 웹 서핑 중 우연히 발견한 애니메이션 동영상에서 의외의 즐거움과 공감대를 얻는 경우도 많다. 지난해에 트레일러 영상 하나로 유튜브 게시판을 뜨겁게 달군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 <페이퍼맨>(2012년)이 대표적인 예다.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 <페이퍼맨>의 한 장면
첫눈에 반한 여인을 위해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한 외로운 남자의 이야기. 약 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만큼, 영화의 줄거리는 지극히 단순하다. 손그림 같은 흑백 영상에는 화려한 맛이 부족하고, 그럴싸한 대사나 내레이션 한 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한 장, 두 장 남자의 손을 떠난 종이비행기가 뉴욕 시의 빌딩 숲을 가로지를 때 모니터 너머에서 예기치 못한 위로를 받은 이들은 뽀로로나 ‘Let It Go’(<겨울왕국>(2013년)의 뮤지컬 넘버)에 열광하는 귀여운 꼬마들이 아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치고, 때로는 낯선 만남에 가슴 설레는 이 시대의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토이 스토리 2>(1999년)와 <몬스터주식회사>(2001년)에서 애니메이터로 활동한 존 커스 감독의 연출 데뷔작 <페이퍼맨>은 섬세하고 서정적인 영상 안에 삭막한 도시의 삶과 현대인의 고독을 밀도 높게 담아낸 수작이다.
<넛잡: 땅콩 도둑들>의 주인공들
물론 단편 애니메이션은 저예산으로 감독 혼자 작업하는 경우가 많아 아무래도 제작의 부담이 덜한 편이다. 대중성보다는 감독 자신의 색깔이나 작품성에 집중하게 되고, 좀 더 실험적인 작업에도 마음껏 도전해볼 수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많은 예산과 스태프가 투입되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투자사와 배급사는 물론 감독도 흥행에 대한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된다. 실제로 많은 감독이 한국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험난하다고 불평하고, 대다수 투자자 역시 애니메이션은 기획 및 개발 과정이 복잡하고 제작 기간이 길어 실사영화에 비해 리스크가 크다고 입을 모은다. 할리우드를 휩쓴 <넛잡: 땅콩 도둑들>(2014년)의 놀라운 흥행 성적은 그래서 더욱 의미 있다. 한국 콘텐츠 제작사 레드로버가 캐나다의 툰박스 엔터테인먼트와 합작해 만든 이 작품은 올해 초 북미 전역에서 개봉해 약 6423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이는 국내 애니메이션업계는 물론 영화계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일. 레드로버는 세계시장에 맞는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캐나다 출신 피터 레페니오티스 감독과 <헷지>(2006년)의 각본가 론 캐머런을 영입했다. 렌더링(뼈대에 이미지를 입히는 작업) 속도를 단축해 제작기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였고, 미국 메이저 배급사 오프로드와 손잡아 3000여 개의 개봉관을 확보했다. 결국 <넛잡: 땅콩 도둑들>의 성공은 글로벌 프로젝트 개발을 목표로 한 정교한 기획과 시나리오, 한국의 애니 메이션 기술 그리고 할리우드의 배급력이 만난 결과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속‘메밀꽃 필 무렵’에피소드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장편은 지난 8월 서울 인디스페이스, 대구 동성아트홀 등 국내 40여 개 상영관에서 개봉한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2014년)이다. 한국 근대문학을 대표하는 이효석·현진건·김유정의 단편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옴니버스 작품으로, 문학과 시대의 감수성이 애니메이션 기술과 만난 매우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니까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과 같이, 읽는 이의 숨까지 함께 막히게 한 먹먹한 문장을 이제야 두 눈에 오롯이 담을 수 있게 된 거다. 물론 여기에는 당대 사진과 기사 자료, 외국인의 서적 등을 있는 대로 뒤져 각 작품에 맞는 표현 방식을 연구한 안재훈·한혜진 감독의 공이 크다. 그들은 <메밀꽃 필 무렵>의 애달프고 시적인 풍경 묘사를 영상화하는 데 집중했고, 남상일 명창의 판소리를 덧입혀 <봄봄> 특유의 해학을 살렸다. 식민지 시절 경성의 모습을 집요하리만치 성실하게 복원해낸 <운수 좋은 날>도 원작 팬들의 호응도가 높다.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과 더불어 현재 국내 애니메이션계 최대의 화두는 류승룡, 심은경, 이준 등이 성우로 나선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이다. 장편 데뷔작 <돼지의 왕>(2011년)으로 칸 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상(가장 뛰어난 신인 감독의 영화에 주는 상)에 노미네이트되고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을 휩쓴 연상호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통틀어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문제적 감독으로 꼽히는 인물. 한국 사회의 구조적 갈등을 드러낸 <돼지의 왕>부터 선악의 경계와 믿음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사이비>(2013년)까지, 그는 지금껏 국내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어둡고 묵직한 주제를 하‘ 드보일드 스릴러’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표현해왔다. 내년 개봉을 준비 중인 <서울역>은 노숙자와 가출 청소년의 시선으로 서울역에서의 하룻밤을 다룬 좀비 영화다. 다른 모든 장르가 그러하듯, 애니메이션에는 오직 ‘애니메이션이기에’가능한 표현력과 개성이 있다. 카메라 장비로 담아내기 힘든 온갖 풍경과 감성, 인물의 표정, 액션 연기도 붓끝만 스치면 마음껏 창조할 수 있다. 동물들이 춤추며 노래하는 아동용 오락물이든, 성인 관객을 대상으로 한 스릴러 애니메이션이든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 장르가 존재하는 이유고, 한 발 한 발 꾸준히 진화할 수 있었던 힘이니까. 가장 이상적인 판타지와 가장 현실적인 삶을 오가며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같은 세계, 지금 애니메이션은 그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에디터 류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