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많이 본 배우
진선규는 혜성처럼 등장한 신인이 아니다. 연극 생활만 15년에 충무로에 발을 들인 지는 10여 년이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게 더 많다.

영화 <범죄도시>에서 윤계상이 흑룡파 두목 장첸으로 악역 연기를 펼치는 동안 관객의 뇌리를 자극한 또 한 명의 배우가 있다. 장첸의 오른팔 위성락 역을 맡은 진선규다. 그는 민머리의 흉악한 마스크로 흑룡파의 잔인함을 강하게 어필했고, 그 결과 생애 처음으로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까지 받았다. <범죄도시>가 690만 관객몰이를 하기까지 많은 이가 진선규를 모르고 극장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덕에 영화가 더 매력적이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연극과 뮤지컬을 비롯해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닥터스>, <여자를 울려>, 영화 <남한산성>,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특별시민>, <터널>, <사냥>, <풍산개> 등 6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지난 15년간 조용히 자신을 단련해온 배우. 그리고 그 결과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뜨거운 배우로 떠오른 배우 진선규의 흔적을 좇았다.
오늘 촬영은 어땠나? 이렇게 갖춰 입고 얼굴에 색칠하고 작가님 앞에서 사진 찍는 게 익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다들 편하게 대해주셔서 의식적으로 짜내지 않고 작업할 수 있었다.
사실 놀랐다. 촬영할 때도 그렇고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다소곳한 분위기의 사람일 줄이야. 이게 사실 내 진짜 모습이다.(웃음)
얼마 전 쟁쟁한 배우들을 누르고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탔다. 특히 수상 소감에 대한 얘기가 많다. 수상자를 발표하고 무대에 올라가면서부터 울던데. 나는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복받쳐서 눈물이 났다. 무대까지 가는 동안 머릿속에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마구 떠올랐다. 소감을 빨리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여러 이름을 떠올리느라 애먹었다. 다행히 그런 모습을 진심으로 좋게 봐주는 분들이 많았다.
그간 출연한 연극과 드라마, 영화 등에선 대부분 선한 역만 맡았다. 지금의 민머리와는 매치되지 않지만 잠깐 이야기를 해보니 왜 그런 역을 많이 맡아왔는지 알 것도 같다. 사실 이전에 본 오디션은 대부분 조연이 아닌 단역을 따내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작품에 의사나 기자 같은 작은 역할이 있고 그게 내게 맞는 배역이었기에 오디션을 통해 배역을 따내서 연기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역할이었기에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결코 그동안 일부러 선한 배역만 추구해온 건 아니다.
<범죄도시>의 ‘위성락’은 첫 악역이었다. 연기하는 데 어려운 건 없었나? 크랭크인 한 달 보름 전부터 팀을 이뤄 연습했기에 특별히 어렵진 않았다. 감독님은 (윤)계상이 맡은 장첸을 비롯한 흑룡파 3인방이 영화에 등장하는 첫 신부터 나쁜 놈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나쁘게 보일 수 있을지 연구했다. 장첸이 두목이고, 나와 양태(김성규)는 떨거지다, 이런 거랑은 달랐다. 각자 이 안에서 뭔가 해보고자 하는 자신만의 세계를 가진 사람으로 설정했다. 내가 맡은 위성락은 특히 무자비하고 느닷없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봤다. ‘나 너 죽일 거야. 자, 들어간다’가 아니라 ‘그래? 알았어. 팍!’ 이런 식으로 연기했다. 전체 흐름 안에서 보면 작은 부분이지만 그걸 감독님과 맞춰가며 발전시켰다. 앞으로도 이런 방식이 존재할 수 있겠다 싶은 좋은 시도였다.
<범죄도시> 1차 오디션에서 떨어지고, 2차 오디션에서 삭발 투혼으로 붙었단 얘기도 있더라. 1차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연기는 좋은데 너무 선해서 안 되겠다는 얘길 들었다. 그래도 너무 하고 싶어서 다시 말씀드리자 감독님이 그럼 다른 역할로 오디션을 보자고 하셨다. 그런데 일주일 뒤 위성락을 다시 한번 해보자 하시더라. 이미지가 선하니 좀 변화를 주자 했는데, 뭔가 잡히는 게 없었다. 그때 내가 “머리를 한번 깎아볼까요?” 한 거다. 그랬더니 마치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배역과 어울렸다. 나중에 모니터를 보니 정말 못되게 생겼더라.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_ 영화 <꾼>의 사촌형, 드라마 <닥터스>의 김치현 과장,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남은, 영화 <범죄도시>의 위성락 등 그간 크고 작은 역할을 선보인 진선규.
영화가 개봉한 후 몰래 영화관에 가서 봤다고 들었다. 오랫동안 고생해 찍은 영화를 보니 어땠나? 첫 상영 때 너무 궁금해서 함께 연기한 배우들과 극장 맨 뒷좌석을 끊어서 봤다. 어디서 반응이 나올까 하고 숨죽이고 있는데, 생각보다 훨씬 많은 장면에서 즉각적으로 반응이 나오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오르더라. 그때 “우리 괜찮았어? 정말 잘했나봐” 하면서 조금 울었다. 아마 나 말고도 많이 울었을 거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범죄도시>와 같은 날 개봉한 <남한산성>에도 ‘초관 이두갑’ 역으로 출연했다. <범죄도시>에 비해 작은 역을 맡았지만 나름 ‘겹치기’ 출연이었다. 그렇게 출연한 영화가 같은 날 레이스에 오르면 기분이 어떤가? 사실 주변엔 두 영화에 다 출연했단 말을 안 하고 조용히 있었다.
왜 그랬나? 두 영화가 한날한시에 개봉했는데, 한쪽을 응원하면 내가 저걸 소홀히 했나 싶고, 저걸 응원하면 이걸 소홀히 했나 싶어서 그냥 관객에게 맡기자고 했다. 두 영화 모두에 애정이 있었고, 둘 다 잘됐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내심 <범죄도시>가 잘되길 기대하진 않았나? 중간에 참수당하는 <남한산성>의 이두갑 역에 비하면 <범죄도시>의 위성락은 역할의 비중도 이전과는 남달랐다. 솔직히 조금은 그랬다.(웃음) 내 이미지가 많이 변화한 영화니까. 사람들이 <범죄도시>를 좀 더 많이 봐서 진선규가 이런 역도 할 수 있는 배우라고 알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범죄도시>의 이미지 때문에 앞으로 비슷한 역이 자주 들어오지 않을까 싶은데, 걱정은 안 되나? 기능적인 면에 그치는 악역이라면 고사할 생각이지만 영화의 맥락 안에서 그 존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악역이라면 이전보다 더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
현재 이렇게 배우로서 흥분해 있지만 원래 꿈은 체육 교사였다. 맞다. 고등학생 땐 지금보다 몸도 약하고 조용한 아이였는데 운동을 하며 성격도 바뀌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체육교사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고3 때 우연히 친구랑 고향 진해에 있는 작은 극단에 놀러 갔다가 연기에 빠졌다. 그 전까지 ‘연기’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극단에서 당시에 뭘 봤나? 뭐에 그렇게 빠져들었나? 작은 무대에 배우들이 모여 이렇게 하면 어떻고, 저렇게 하면 어떨까 얘기하며 연습하는 걸 봤다. 서로를 아껴주며 연기하는 따스한 느낌이 좋았다. 그러다 나도 저 안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 연기를 배우겠다고 말한 게 고3 여름방학 때였다.
집에선 뭐라고 했나? 웃으셨다. 연기는 얼굴이 잘생겨야 하는데 개그맨 시험 볼 거냐고 그랬다. 그랬던 내가 여름방학이 끝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합격 통지서를 들고 가니 그제야 알았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진해 출신치곤 사투리를 전혀 쓰지 않는다. 따로 연습을 했나? 많이 고쳤다. 외국어 공부하듯 연습했다.
대학 졸업 후 처음 무대에 섰을 때를 기억하나? 지금까지 60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 영화, 드라마 등에 출연했는데 그때와 지금의 진선규는 무엇이 바뀌었고 무엇이 그대로인가? 확실히 바뀐 건 15년 전엔 연기를 정말 못하는 배우였다는 거다.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믿게 되는, 연기를 곧잘 하는 사람이 된 것 같긴 하다. 또 지금도 바뀌지 않은 건 그 시절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 연기는 상대 배역을 배려해야 하고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다. 연기를 대하는 마음은 변한 게 없다.

조금은 실례가 될 것 같은 질문이지만, 배우들 세계에선 여전히 (결정적) ‘한 방’이라는 말이 통용되는 듯하다. <범죄도시>가 성공해 여러 곳에서 이름이 언급되고, 실제로 최근엔 시나리오도 조금씩 들어온다고 들었다. 실제로는 어떻나? 늘 오디션을 보러 다니던 배우가 갑자기 시나리오를 검토하는 배우가 되기까지 그 시간이.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요 근래 내가 경험하는 일은 오래전 연극 무대에 처음 선 당시부터 꿈꿔온 것이다. 지금은 운 좋게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됐지만, 나 자신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고 본다. 수많은 오디션을 보며 작은 배역을 따내던 과정을 지나 “이 시나리오 한번 읽어 볼래요?”라는 말을 들으며 배역을 검토하는 순간이 왔다. 사실 내가 겪고 있는 일은 현재 대학로와 충무로에서 프로필을 돌리고 있는 모든 배우의 꿈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도 그렇고 나도 이 순간을 위해 이제껏 한 방을 노린 건 아니다. 계속 꾸준히 준비했고, 그 기회가 지금 온 것뿐이다. 그래서 한 방이라고 말하면 조금 서운하다.(웃음)
연극계에서 이름을 알린 배우들이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고 다시 연극계로 돌아가지 않는 경우를 많이 봤다. 이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10년 이상 해온 연극을 버리진 못할 거다. 지금 속해 있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에서 하는 창작 공연은 무조건 시간을 내서 참여할 생각이다. 1년에 4~5편씩 연극만 할 때보다는 아무래도 그 비중이 줄겠지만.
연극이 정말 재미있나? 재미있다. 연극은 확실히 다른 재미가 있다. 현장에서 바로 연기하고 ‘컷’이라는 게 없으니 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만약 연극에서 극 전체를 끌고 가는 역할을 맡았다면 공연이 펼쳐지는 약 2시간 동안 정말로 그 무대가 내 시간이 되니, 배우로서 살아 있는 순간을 느낄 수 있다.
갑작스레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만 잘못하면 ‘한때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배우’로 금세 대중에게 잊힐 수도 있는 게 배우의 삶인 듯하다. 그럴 때를 위해 대비하고 있는 게 있나? 아예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웃음)
아,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면 말은 된다.(웃음) 지금의 ‘관심’은 곧 지나갈 거고 그럼 다시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땐 좀 더 큰 역할이어야 한다. 지금의 관심이 인생에 큰 변화를 주는 건 아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자녀가 둘이 있다. 아이들은 아빠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나? 잘 모른다. 두 살배기 막내는 아예 모를 거고, 다섯 살인 첫째는 아빠가 ‘촬영하는 사람’, ‘연습하는 사람’ 정도로만 안다. 하지만 촬영이 뭐고 연습이 뭔지는 모를 거다.
배우로서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뭐라고 보나? 안주하는 거다. 이 정도 연기는 편하게 할 수 있다고 안주하는 것. 또 그런 생각으로 비슷한 캐릭터, 비슷한 느낌의 연기만 하는 것.
경험해본 적이 있나?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게 위험할 거라고 즉답하나?(웃음) 여러 배우를 보면서 알게 됐다.(웃음) 보면 그런 분이 있다. 갑자기 떠서 비슷한 역할만 맡으며 소모되는 배우들. 그러면서 도전이라든지 앞으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사라져 직업적으로 변하는 배우들. 내가 직접 겪진 않았지만, 그런 예시가 있기에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범죄도시> 개봉 전후로 벌써 두 편의 작품에 캐스팅된 것으로 안다. 어떤 작품인가? 영화 <사바하>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다. <사바하>는 <검은 사제들>의 장재현 감독님 작품이다. <범죄도시>를 촬영하고 있을 때 감독님이 삭발한 내 머리를 보고 함께하고 싶다고 제안해주셨다. 그리 큰 배역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전에 주로 맡은 ‘2회 차’나 ‘3회 차’로 끝나는 역할보단 훨씬 크다.(웃음) 이전엔 머리를 밀고 악역 연기를 했지만, 이번엔 같은 상태에서 다른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그 좋은 배우가 사실 어떤 느낌의 배우인지는 모른다. 돈도 명예도 있을거고, 아마 모두가 극찬하는 연기도 가능할 거다. 그런데 그 좋은 배우의 목표 지점이 가까운 곳에 있을 것 같진 않다. 우리가 좋은 배우라고 말하는 송강호, 황정민, 최민식 같은 배우도 실은 ‘더 좋은’ 연기를 위해 늘 뭔가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배우라는 건 정말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게 저 멀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냥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변하지 않고 지금처럼. 그럼 누군가가 나중에 평가해줄 거고.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김제원 의상 협찬 준지, 비슬로우, 치르콜로 1901 by 코에보 헤어&메이크업 김아영 의상 스타일링 조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