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색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는 부산은 물론 국내 미술계의 큰 어른으로 통한다. 그는 올해 17년에 걸친 미술품 기증과 26년 동안 오롯이 혼자 힘으로 지원해온 부산청년미술상을 끝마쳤다. 한 해의 끝에 돌아보는 2015년은 그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사설 갤러리가 전무하던 1975년, 부산 중앙동에 문을 연 공간화랑은 1980년대 조각가 권진규와 이중섭의 전시, 1990년대 줄리언 슈나벨과 샘 프랜시스의 전시를 기획하며 부산을 대표하는 화랑으로 자리 잡았다. 화랑이 40세가 된 올해, 신옥진 대표는 작품 기증과 청년 작가 지원이라는 큰일을 갈무리했다.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
17년간 모두 7개의 미술관에 600여 점의 미술품을 조건 없이 기증했습니다. 그런데 기증한 미술관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부산과 경남 지역에 분포해 있는데, 기증 시 중요한 원칙이 있었나요?
제가 지켜온 두 가지 원칙은 서울에 비해 열악한 지역의 미술 문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선 내가 사는 지역을 기점으로 하는 것과 내가 가장 아끼는 작품부터 내어놓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고자 시작한 일은 아니죠(그는 이번 인터뷰를 ‘많은 이에게 알려졌다’는 이유로 여러 번 거절하기도 했다). 그래서 부산시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부산시립미술관, 밀양시립박물관, 경상남도미술관 등에 주로 작품을 기증했고 그 이후 제주도 이중섭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도 작품을 줬습니다. 특히 부산시립미술관에는 제가 모은 전체 컬렉션 중 가장 ‘문제적’이라 할 수 있는 일본 근대 작가의 작품이 100여 점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것이 1932년인데, 일본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우리는 국가적 대립 관계 때문에 우리가 일본 서양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려 하지만 사실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사이토 사부로, 고이데 나라시게 등 한국 1세대 서양화가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일본 작가의 작품을 다수 포함했습니다. 이 컬렉션은 전국에서 딱 한 곳, 부산시립미술관에서만 볼 수 있죠. 한국 미술사를 들여다보는 데 매우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컬렉션의 방향도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데, 컬렉터의 역할에 대한 정의를 내리신다면요?
미술 작품을 사 모을 때도 미술사에서 의미 있는, 혹은 앞으로 큰 의미를 지닐 작품을 고르려 했습니다. 단 한 점도 공짜로 받은 것이 없고 지방으로, 일본으로 참 부단히 구하러 다녔죠. ‘이런 컬렉션을 하라’라는 정답은 없지만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컬렉션은 단순히 미술품을 구입하는 행위가 아니라, 은연중에 작가를 후원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애호가가 없으면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평소 제 지론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작가를 발굴할 수 있도록 부단히 보는 눈을 키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1989년 제정한 부산청년미술상을 통해 정혜련과 변대용, 방정아 등 지금 부산을 대표하는 작가 29명을 발굴했습니다. 기증보다 오래 해온 활동이라 애정이 남다를 텐데, 폐지한 이유가 있나요?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않고 사비로 운영하다 보니 어려움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술상이 시대적 쓰임을 다했기 때문이죠. 이상을 처음 만든 때는 정말 지역의 신진 작가가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지금은 아트 페어나 공모전을 통해 역량 있는 작가가 나아갈 길이 여러 갈래 있으니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을 모두 거둬들인 지금,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합니다.
저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마지막 유언인 “사색하지 않은 삶은 산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항상 기억합니다. 작품 기증은 저에게 사색그 자체였습니다. 어렵사리 모은 것을 사회에 환원할 땐 아까운 마음도 들었지만, 사회에서 내가 받은 것과 해야 할 역할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살았으니 ‘헛된 삶은 아니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네요. 인생의 번잡한 찌꺼기를 정리하며 끝을 준비하면서도, 오로지 한 사람의 화상으로 남을 생각입니다.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한 모리스 위트릴로의 ‘교회가 있는 풍경’
에디터 신숙미(프리랜서)
사진 공정현(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