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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작가로 산다는 건

ARTNOW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성성을 자각할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그들의 대답에서 여성 작가들의 고민과 사유를 엿보았다.

김진희의 ‘모래시계’

김진희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러기 위해 먼저 나는 외모를 여성스럽고 화려하게 치장하는 일을 멈췄죠. 공들여 화장하는 시간과 예쁜 옷을 고르는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것 같아요. 지나고 보니 외모나 행동에서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아도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성이 드러나는 게 느껴져요. 아무리 짧은 머리를 고수하고 중성적 옷을 입어도 나도 모르게 여성의 얼굴을 찍거나 사진 위에 바느질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변하지 않기에 앞으로 내 작업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여성성이 드러나겠죠.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하는 것이 제겐 자연스러워요.”

심아빈의 ‘탄생’

심아빈
“‘탄생’은 인간의 반복되는 행위에서 말미암은 탄생의 현상과 개념을 골프와 연관 지은 설치 작품이다. 내 작업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지만, 여성성보다는 보편적 인간으로서 나에 집중한다. 예전엔 여러 가지 성적 구분과 불평등이 있었고 지금도 그 잔재가 남아 있지만, 개별적 창작 활동을 하면서 그런 건 별로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미혼인 입장에서 결혼해 아이를 낳은 여성 작가를 볼 때 작업에 제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성 작가에 대한 불평등은 미술계보다는 가정 내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을 보며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제외하고는 내가 이 시대에 여성 작가로 산다는 것은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심래정의 ‘자화상’

심래정
“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대부분 성을 알 수 없습니다. 작업을 할 때는 보통 자신을 투영하기 마련이고, 제가 여성임을 숨기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작품 속에서는 중성이고 싶어요. 여성이기 때문에 미술계에서 불편한 것도, 편한 것도 없습니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 같아요. 그냥 재미있게 살고 싶을 뿐이죠.”

권순영의 ‘마이프렌즈5’

권순영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드러내진 않지만 제 작품에는 여성적 모티브가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소녀, 엄마, 아기, 고아, 크리스마스 이미지와 눈사람, 인형, 여성의 성기를 암시하는 꽃의 형상, 눈물을 상징하는 유리구슬 등. 이런 요소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이야기는 삶의 부조리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제 입장을 자연스레 드러내죠. 미술계에도 젠더 구분은 있지만 여자라 전적으로 불리하다기보다는 작가로서 힘이 약할 때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느낍니다. 결혼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죠. 많은 자녀를 두고도 천재성을 인정받으며 세속적 실리까지 챙긴 여성 작가를 아직 만나지 못했으니까요.”

김보민의 ‘그라디바’

김보민
“산수화는 예술사에서 여성의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어요. 예전에는 여성이 산에 오르는 것이 일종의 금기와 같았기 때문이죠. 오늘날 저는 자유로이 산에 오르고, 도시를 바라보고, 산수화를 그립니다. 화폭은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장소와 부산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결합하는 곳이자 동시에 머릿속 상상의 공간을 끌어내는 장이죠. 그 이미지는 꿈꾸는 장면, 보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그리고 추억과 잔상 같은 것이에요. 이렇게 대지와 제가 만나는 곳에서 산수가 생깁니다. 공간을 거닐고 더듬으며 그 사이를 헤매는 촉각적 상상력으로 가능한 일이죠.”

공시네의 ‘portrait’

공시네
“인간은 누구에게나 여성성과 남성성이 존재한다. 단지 나이에 따른 환경이나 사회적 역할에 따라 어느 한쪽이 더 부각되어 보일 뿐이다. 피아노의 건반에도 흰색과 검은색이 존재하며, 음악을 감상할 때는 하나의 음보다 화음을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창작 활동에선 단순한 젠더 구분보다 악보를 보며 언제 이 건반을 눌러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장파의 ‘lady-x no.01’

장파
“주디 시카고(Judy Chicago)는 ‘예술가로서 여성(Woman as Artist)’이란 글에서 ‘모든 여성 미술가는 여성의 본질을 정의하는 것을 자신의 첫 번째 투쟁으로 삼는다’고 했다. 40여 년 전 쓴 이 문장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나는 주로 여성적 경험 혹은 여성적 그로테스크를 기반으로 작업하지만 그것을 비평하고 평가하는 도구는 남성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성적 경험’을 이해시키는 일은 결국 사회구조, 미술계 구조 내에서 여성적 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그 과정은 너무 많은 개념을 배제하고, 배척감과 모멸감을 감수하는 일이다.”

이진주의 ‘Untitled’

이진주
“학교 다닐 때는 몇 안 되는 남학생이 교수님의 일을 돕는 식으로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을 흔히 봤어요. 오히려 지금은 작가로서 여자임을 자각하는 일이 많지 않은데, 성별을 떠나 여러 ‘관계’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죠. 미술계에선 관계에 기생한 활동으로 생산한 작품이 납득하기 어려운 수준을 보여주고, 씁쓸하지만 그것이 상식이 되기도 합니다. 또 국공립 미술관의 관장직이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작가에게 주는 유명 상이 남성에게 돌아가는 걸 보면 ‘만들어진 승자’라고 느낄 때도 있죠. 작업할 때 여성성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거나 표현하진 않지만 여성 작가인 제 여성성에 기인한 삶의 특수한 경험과 감정, 기억은 작업에 반영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원성원의 ‘동글이’

원성원
“미술계에 여자가 많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여성 작가임을 자각하지만 그것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어요. 관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면, 그리고 세부적인 것을 꼼꼼히 만들어가는 면에서 여자의 능력이 돋보인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내 작품을 보고 남자의 작품 같다고도 하더군요. 미술계에 젠더의 구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더 복잡하고 미묘한 문제에 가려 크게 부각되진 않는 것 같아요.”

안준의 ‘Self-Portrait’

안준
“뉴욕에서 대학원 재학 중 공모전에 당선되어 ‘Self-Portrait’ 작품으로 첫 전시를 준비하며 이 시대의 여성 작가, 정확히 말하면 이 시대의 ‘한국 여성’이 작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미술사를 돌이켜보면 여성 작가가 자신의 몸을 다룬 작품이 드물지 않죠. 그러나 당시 미혼이었기 때문에 내 작품이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어요. 가족의 지지를 버팀목 삼아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귀국 후 지금은 신혼집 벽을 하나 허물어 컴퓨터와 대형 프린터를 들여놓고 집에서 작업 중이죠. 작업하는 방 옆, 햇빛 좋은 거실에서 빨래가 마르며 기분 좋은 향이 납니다. 내 사진은 지각할 수 있는 현상 너머의 것을 다루지만 그것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과 가족, 일상과 유머에 대한 은유가 되길 바라요.”

전소정의 ‘One Man Theater’

전소정
“국내외 전시를 통해 종종 느낀 일종의 소외감이 있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또 아시아인으로서 이중 소외는 아이러니하게도 내 작품이 이국적 취향과 다중성의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소비되는 데 기여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예민한 촉을 세우고 관계와 기억, 감정을 섬세한 목소리로 드러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차이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는 그 모든 시선의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지만 여전히 유약하고 불편한 스스로를 느낀다. 어쩌면 나는 계속 불완전하고 유약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내게 주어진 프레임을 조롱하듯 미끄러져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희승의 ‘Untitled’

정희승
“최근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전에 참여해 ‘부드러운 단추들’이란 일련의 사진 작품을 출품했어요. 이 제목은 거트루드 스타인의 동명 산문시 ‘Tender Buttons’를 차용한 것인데, 저자가 직접언급하진 않았지만 이는 여자의 젖꼭지를 뜻하는 은어로 알려져 있죠. 그리고 이 작품은 11세인 딸 제인과 40대에 접어제든가 겪는 여러 신체적·심리적 변화와 관계가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사회적·신체적 조건 앞에서 일어나는 이 강렬한 변화가 때론 고통스러울지라도 분명 창조적 생성 과정이며 이를 세심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을 이 작업을 통해 말하고 싶었어요. 작품은 두 아이의 엄마이자 조각가인 동료 작가의 모유 수유 기간 중 촬영한 겁니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