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 아무나 되나
여행은 아무나 떠날 수 있어도, 진정한 여행자가 되기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관광객과 여행자 사이에 끼인 당신을 위한 보고서.

남자는 나그네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분위기의 호텔, 비슷한 브랜드로 뒤덮인 21세기다. 용기를 내어 더 맑은 공기 속에서 새로운 맛과 자극, ‘낭만과 모험 넘치는 남자다운 여행’을 찾는다. 그러나 쉽지 않다. 여행을 떠난다고 해도 쇼핑, 먹거리, 레저만 즐기다 돌아오기 십상이다. ‘여행자’를 꿈꾸지만 잠시 ‘관광객’이라는 일종의 소비자로 머물다 돌아오는 여행을 한다. 관광객(tourist)과 진정한 여행자(traveller)는 여행하는 목적, 방법, 태도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관광객의 편안함을 벗고, 멋모르고 강에 뛰어드는 패기로 새로움 속에 푹 빠져들면 여행자가 된다. 그럴 때 여행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책을 서서 읽는 지적·정신적 활동이 된다. 미국의 히피 시대를 주름잡은 여행 작가 폴 서룩스(Paul Theroux)는 모험 가득한 여행을 꿈꾸는 남자들에게 여행의 바이블 한 권을 남겼다. 는 1970년대에 쓰인 이후 아직까지도 전 세계 사람의 사랑을 받는 여행책의 고전이다. 폴 서룩스는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후 스물두 살에 자선단체에 합류해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정세가 불안한 말라위 정부의 반대 세력에 휘말려 추방당해 이웃 나라 우간다로 넘어갔다. 그곳도 안전하지는 못했다. 성난 군중이 임신한 그의 부인 자동차를 뒤집으려 한 사건을 접하고 싱가포르를 거쳐 런던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이국적인 환경에서 모험과 자극에 익숙해진 그는 영국에서 일본까지 완행열차로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에 나섰고 왕복 여행에 성공한다. 그는 완행열차로 느리게 유라시아를 관통하며 본 것을 정리해 여행 작가로 데뷔했다. 그의 저서 <다크스타 사파리>, <정글 러버> 등은 아름다운 관광지를 보고 와서 적은 감정 사치가 아니다. 내전, 기근, 전염병과 가난 속에 몸을 던져 그곳 사람들과 같이 먹고, 살고, 논 이야기가 담겨 있다. 40년 전 쓴 책이 오늘날까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남자 안에 여전히 모험가이자 도박꾼이 있기 때문이다.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거대한 대륙을 몸으로 경험하고 싶은 남자의 떠돌이 본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숨겨진 것이다. 남자들이 좋아하는 책과 영화 속에서 남자들의 나그네 본능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남자는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주인공처럼 이국의 문화 속에 푹 빠져들어 새로운 언어와 식습관을 배우고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모험을 꿈꾼다. 산악 영화나 무인도 영화처럼 자연을 상대로 자신의 남성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부분 호텔과 자동차 픽업, 관광 가이드와 쇼핑을 선택한다. 그것은 편안함을 포기하지 못해서다. 여행지의 낯선 사람과 문화를 접하려면 나에게 익숙한 것, 편리한 것을 포기해야 한다. 휴대폰이 터지지 않고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동네 여인숙에서 에어컨과 히터 없이 땀에 찌들거나 벌벌 떨면서 자는 것.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동네에서, 꼭 알아야 하는 표현을 간신히 한두 개 배워 먹고사는 데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 중동 시골 마을에서 처음 본 베두인(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 사는 아랍계 유목민)과 함께 간이 시설로 만든 목욕탕에 벌거벗고 앉아 샤워하는 등 색다른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에선 우리가 익숙한 음식은 사라지고 양 창자, 염소 머리, 곤충으로 몇 주 끼니를 때워야 할 때도 있다.
<원 위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
21세기에 이런 불편함을 감수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관광 가이드가 운전하는 자동차의 창문 밖으로, 아니면 고급 호텔의 통창을 통해 마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보듯 안전한 거리에서 그들의 세상을 관찰하는 여행에 만족하곤 한다. 세상과 우리 사이의 스킨십은 필요 없어지고, 스킨십 없는 연인 관계처럼 여행(travel)은 점점 무의미한 관광(tourism)이 되어버린다. 편한 여행에 익숙해지면 불편하게 여행할 용기가 없어진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우리 마음속의 나그네는 우리 곁을 떠난다. 나도 20대에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전여행과 배낭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하지만 점점 바빠지면서 관광 가이드와 호텔이 챙겨주는 편안함에 나도 모르게 익숙해졌다. 그러던 중 한 텔레비전 프로덕션에서 북아프리카 모로코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가자는 제안을 받고 합류했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현지 코디가 아무 일도 할 줄 모르는 조수에게 자기 일을 떠넘긴 채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는 계획에 없던 즉흥 여행을 하며 프로그램을 제작해야 했다. 전문 가이드 없이 도시에 남아 있는 전통 아파트 건물을 촬영하다 자기 집을 찍었으니 돈을 달라는 주민이 떼거지로 몰려와 카메라를 들고 도망쳐야 했다. 드론으로 유적지 인근을 촬영하는 것을 알고 뇌물을 받으려고 몰려든 현지 공무원들과 협상하고 달래기까지 했다. 생선 냄새가 진동하고 냉난방 시설조차 없는 시골 문간방에서 등산복으로 체온을 유지하며 잠을 청했다. 가난한 산동네를 촬영하다 부족끼리 싸움이 나 칼부림하는 현장도 목격했다. 야채가 자라지 않는 사막을 여행하며 트림에서 누린내가 날 때까지 양고기 요리만 먹었다. 그렇게 고생한 여행이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곤한 잠에 빠지며 꿈같은 모험의 추억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제야 폴 서룩스가 말하는 여행과 관광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말처럼 “다 끝난 다음에 멋진 여행이 진짜 멋있는 여행”이다. 모험은 결국 고생의 다른 말이다. 폴 서룩스와 쌍벽을 이루는 여행가 윌프레드 세시저는 자신의 여행기 <절대를 찾아서(Arabian Sands)>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행을 통해) 참는 것의 즐거움과 힘든 것을 이겨내는 만족감이 무엇인지 배웠다. 배부른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고기가 얼마나 기름진지, 깨끗한 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말이다. 너무 자고 싶어 그것이 고통처럼 느껴질 때 잠에 내 몸을 맡기는 짜릿함, 그리고 새벽의 추위 속에서 불의 따뜻함 같은 것 말이다.” 역사가들은 인간이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것은 ‘고행’을 통해 삶에 대한 감사함을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관광이라는 것이 없던 1000년 전에도 사람들은 ‘순례’라는 것을 떠났다. 아직 ‘국가’라는 개념이 없어 동네마다 말과 관습, 음식과 법이 다르던 시대였다. 호텔도, 관광 정보 센터도, 심지어 변변한 지도도 없던 시대다. 성벽 밖으로 나오면 도적떼가 판치는 무법천지였다.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두 발로 걸어 메카로, 로마로, 예루살렘으로 갔다. 초기의 여행은 이렇듯 맨몸으로 세상과 자신을 견주고 이기고 지면서 자기 자신을 찾는 정신 수양으로 출발했다. 오늘날엔 익숙한 대형 체인 호텔, 고급 부티크 상점, 심지어는 한국 음식점도 전 세계에 깔려 있다.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아직도 관광객이 많이 오는 대도시의 심장에서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 진짜 그 도시 사람들이 사는 곳에 침투하면 우리에게 인간의 본질을 절실하게 일깨우는 야성이 있다. 뉴욕에 놀러 가서 부유한 동네 첼시를 벗어나 브롱스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으로 발길을 돌린다면, 파리를 방문해 몽마르트르 언덕을 북쪽으로 넘어 악명 높은 93 구역으로 진입한다면, 즉 여행의 ‘리스크’를 즐기는 법을 배운다면 그만큼 여행은 멋지고 유익한 경험이 된다. 그리고 두려움에 그 발길이 순간 멈춘다면 자전거 선수 겸 소설가 팀 크라버의 말을 기억하자. “인간은 4박5일을 굶고도 설원을 달리며 먹잇감을 찾을 수 있는 몸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1시간 자전거를 타고 받는 찬사에 익숙해졌다. 털이 복슬복슬한 마르모트같이 부드러워졌단 말이다.” 여행자라는 호칭은 불편한 곳에서 자신의 강인함을 갈고닦는 용기를 지닌 사람에게 보내는 찬사다.
조승연
<이야기 인문학> <공부 기술>, <그물망 공부법> 등 총 16권의 책을 출간하고 EBS <세계 테마기행>, KBS2 <여유만만> 등에 출연하며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며 지금은 한문과 중국어를 배우면서 동양 언어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현재 ‘오리진보카’ 대표로, 세계에 수출할 영어어휘학습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조승연(세계 문화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