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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탄생

LIFESTYLE

10월이면 영화 도시 부산의 바다는 더 크게 출렁인다. 파도를 일으키는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영화의 신(scene) 너머에 선 사람들. 영화 도시 부산의 신 스틸러 부산영상위원회 최윤 운영위원장, <영도>의 손승웅 감독, 모퉁이극장 김현수 대표를 만났다.

영화의 공조
부산영상위원회 최윤 운영위원장

영화의 도시, 부산. 1995년에 시작된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우뚝 서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면, ‘부산영상위원회’는 그 뒤에서 묵묵히 밀어주는 역할을 담당해왔다. 부산에서 제작하는 영화를 비롯해 광고, TV, 웹 미디어 등 영상 콘텐츠와 관련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는 곳으로 1999년 국내 최초의 영화 촬영 지원 기구로 출범했다. 2017년 5월 기준으로 부산영상위원회의 누적 촬영 지원 영화와 영상물만 1122편. 그 기록이 말해주듯 부산이 영화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부산영상위원회가 근저(根底)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부산영상위원회가 올해를 기점으로 ‘영화를 제작하기 좋은 도시 부산’이라는 자체적 목표를 내걸고 좀 더 다이내믹한 성장을 도모하고 있다. 부산영상위원회 최윤 운영위원장은 그 비전의 방향키를 쥔 내비게이터다.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단편영화제, 독립영화제, 여성영화제, 어린이·청소년 및 대학생영화제 등 부산 하면 각종 영화제가 열리는 영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문화적 측면입니다. 산업적 측면에서 부산이 ‘영화 만들기 좋은’ 도시냐고 하면 아직까지는 미흡하다는 거죠. 영화 제작사, 기획자, 투자자, 배급사, 감독, 작가, 배우, 현장 스태프 등 상당 부분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부산에서 19개 대학과 대학원의 영화·영상·미디어 관련 학과에서 2700여 명의 학생이 매년 나오고 있지만, 이들이 부산에서 전공을 살리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부산=영화의 도시’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지는 부분입니다. 부산이 진정한 영화의 도시가 되기 위해서는 이제 영화·영상 산업 전반에서 자체적 시스템을 갖춘 단계로 성장해야 합니다.”
작년 7월, 운영위원장으로 부임한 그는 이론과 현장 경험을 두루 겸비한 전문가로 통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지만, 영화·영상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어 졸업 후 광고 회사에 다녔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영화 제작 현장에 뛰어들고자 프랑스로 유학도 다녀왔다. 5년 동안 프랑스에 머물며 영화 연구 학교 ESEC(Ecole Superieure d’Etudes Cinematographiques)에서 프로듀서 과정을 전공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마들렌>, <청연>, <뷰티풀 선데이>, <마이 파더> 등 장편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서울에서 영화 현장에 몸담은 그가 부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2013년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이론을 가르치면서 많은 학생이 졸업 후 자신의 전공을 살리고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졸업자들이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더군요. 학교 측과 논의한 후 ‘유비콘텐츠’라는 영상 콘텐츠 제작 회사를 차려 산학협동을 하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부산시나 부산영상위원회, 부산의 영화 펀드를 통해 1~2억 원씩 지원을 받아 나오는 독립영화, 단편영화가 1년에 서너 편 정도입니다. 산업적 제작 시스템의 기반이 약하다 보니 영화 전문 인력이 부산에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영화 제작 환경이 활성화된 수도권으로 인력이 이동하는 거죠. 그러나 한 해에 장편 상업영화를 6~7편 정도만 부산에서 자체 제작할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겁니다.”

최윤 운영위원장은 손승웅 감독의 <영도>, 허은희 감독의 <앨리스: 원더랜드에서 온 소년>, 김영조 감독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진태 감독의 <운동회>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가능성을 인정받은 부산의 영화를 예로 들며 부산의 영화 제작 환경을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다고 말한다. 비단 저예산 독립영화, 다양성 영화뿐 아니라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상업영화까지. 그는 향후 3~5년 안에 부산도 전문 영화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갖출 수 있다고 자신한다.
“현재는 영화 기획부터 투자, 캐스팅, 제작, 배급까지 수도권에 집중된 인프라를 활용해야 합니다. 다만 기획이나 투자, 배급 과정 전반에 걸쳐 영화 제작을 추진하고 조율하는 프로듀서를 부산에서 적극 양성해 가능성을 넓히자는 겁니다. 작년 10월에 오픈한 ‘부산아시아영화학교’는 그 목표를 위해 인재 양성을 하고 있습니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국 영화 시장에서 성공한 프로듀서와 제작자를 모셔와 이미 영화 현장 경험을 쌓은 경력자를 대상으로 프로듀서 교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프로듀싱 과정을 마친 학생이 곧바로 영화 제작 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부산에 산업적 측면의 영화 제작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그 기준을 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리고자 합니다.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서 너무 욕심부린다 할 수 있지만, 이왕 기반을 다지기로 한 만큼 그 기준을 높여야 영화 도시 부산의 경쟁력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영화제를 통해 얻은 영화의 도시 부산의 국제적 네트워크나 인프라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촬영 지원과 후반 작업뿐 아니라 영화 기획과 제작, 투자와 배급 등을 컨트롤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지역의 프로듀서를 양성하고, 지원과 투자를 통해 영화 도시 부산의 산업적 기반을 다지겠다는 것. 그리고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그 기준을 국제적 수준에 맞추겠다는 것. 부산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으로서 최윤이 그리는 비전은 이렇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프라인을 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부산에서 제작한 우수한 영상 콘텐츠를 상영하는 달콤한 상상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충분하다’, ‘가능하다’를 유독 힘주어 말하는 최윤 운영위원장의 형형한 눈빛에서 영화의 도시 부산, 그리고 그 중심에서 부산영상위원회가 지닌 흥행 카드가 읽힌다.

 

 

관객 예찬
모퉁이극장 김현수 대표

관객계, 관객 운동, 관객 활동, 관객 연대, 관객 문화 응원…. 부산 중구 40계단길의 어느 낡은 건물 4층. 이곳에 자리 잡은 모퉁이극장 벽면 곳곳에서 익숙한 듯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재차 강조한 단어에서 이 공간의 주인은 ‘관객’에 대해 할 말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모퉁이극장 김현수 대표는 스스로를 ‘관객 문화 운동가’라 말한다.
“지금 영화에서 관객은 다수의 익명으로 처리됩니다. ‘1000만 관객 돌파’, ‘손익분기점 넘은 관객 수’, ‘주요 관객층’ 등 영화 산업을 위한 지표로서의 관객, 흥행 영화를 소비하는 수동적 집단, 통계 자료로서 말이죠. 그러나 ‘영화는 어떻게,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궁극의 질문을 해본다면, 결국 개개인의 관객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김현수 대표는 2012년 4월 30일 모퉁이극장을 열었다. 생계를 위해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이 훼손되는 것이 싫어’ 극장을 열었다고 한다. 여전히 생계를 해결해주지는 않지만, 관객 중심의 모퉁이극장을 운영하면서 그는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을 얻었다고 한다.
“관객 중심의 극장에서 관객 개개인의 다양한 역량을 끌어올리는 주체적 참여의 장을 만들고, 이러한 관객이 네트워크를 형성해 관객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게끔 응원하고 독려하는 것. 이것이 모퉁이극장의 존재 이유입니다. 기존 극장은 영화가 있고, 그것을 찾는 관객이 있었다면 모퉁이극장은 이와는 반대됩니다. 자신에게 필요하고 보고 싶은 영화를 찾는 관객의 생각이 우선합니다. 개개인의 관객은 세상의 많고 많은 영화 중 자신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한 편의 영화와 고유한 관계를 맺고 일련의 활동을 이어갑니다. 여기서 일련의 활동이란 영화를 본 후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거나 영화와 관련한 무언가를 수집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퉁이극장은 관객 중심의 상영회를 개최하고, 관객 중심의 잡지를 발간합니다. 관객 잡지뿐 아니라 관객 문화교실, 관객 영화제, 관객 영화 토크 등 익명 속에 묻혀 있는 관객 한 명 한 명을 호명합니다. 누구나 영화에 관해 자유롭게 발언하고 영화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어갈 수 있는 연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모퉁이극장이 발행한 잡지 <모퉁이극장>에는 한 편의 영화를 본 개개인의 관객이 쓴 영화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지극히 사적인 글이다. 그러나 잡지라는 형태 안에서 공공성을 획득하기도 한다. 잡지에서 글을 쓴 모퉁이극장 관객리뷰단 변혜경은 이정화 감독의 <탁구공>을 보며 문득 88 올림픽 당시 굴렁쇠 소년이 떠올랐다고 한다. 또 다른 관객리뷰단 김성하는 김지곤 감독의 <할매-시멘트 정원>에서 산복도로에 사는 할매들의 삶을 보고 에너자이저였던 친할머니와 병약하셨던 외할머니가 생각났다고 썼다. 관객 성지연은 리뷰에 앞서 칸 영화제 60주년 기념작 <그들 각자의 영화관>을 보면서 ‘나의 영화관’을 떠올려본 적이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기도 했다. 개인적이고 소박한, 관객 각자의 영화에 대한 단상. 여기에는 강력한 공감이 깃들어 있다. 모퉁이극장 김현수 대표는 익명의 관객을 쇄신해 다양한 관객층을 극장으로 불러모으고 싶다고 말했다. 주체적인 관객 한 명 한 명이 활동가가 되어 관객이 영화 산업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관객 문화 활동을 응원하고 싶다고 한다.
<모퉁이극장>을 읽으며, 또 모퉁이극장을 방문하는 관객이라면 누구나 작성하게 되어 있는 ‘내 인생의 영화 10’의 방명록을 뒤적이며 에디터 역시 이 주옥같은 영화들이 궁금해졌다. 영화를 보고,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관객 활동은 이렇게 시작된다.

 

 

‘부산 영화’라는 꿈
영화감독 손승웅

부산 영도를 배경으로 연쇄살인마의 아들 영도와 남겨진 이들을 다룬 영화 <영도>는 지난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부문에 초청되며 주목을 받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부산 출신의 젊은 영화인이 영화제에 초청되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작가주의 성향의 영화가 대부분이던 부산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상업적 요소를 띤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도>는 정확히 분류하자면 독립영화가 맞지만 개인적으로 상업적 영화를 좋아해서 촬영 기법에 욕심을 부렸어요. 관객에게 익숙한 미장센과 분명한 스토리라인 덕분에 그렇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계단>을 시작으로 2009년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미싱>, <두 얼굴의 전쟁> 등 다양한 독립영화의 감독과 연출을 맡은 시간 동안 손승웅 감독의 홈그라운드는 언제나 부산이었다. 15년간 부산 영화계에 몸담았던 감독이 마침내 평단과 관객에게 인정받았을 때 어떤 행보를 펼칠지 예상해보면 자연스럽게 ‘서울 진출’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제작자와 PD, 프로덕션 등 풍부한 인프라를 보유한 서울은 지방 출신 영화인에겐 기회의 땅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이러한 예상을 깨고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작업하는 번거로움을 택했다. 다시 한번 부산에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실 제가 전공생이던 시절과 비교한다면 영화 제작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해요. 부산국제영화제와 영화의전당을 통해 부산이 영화 도시로 자리 잡았고, 부산영상위원회에서 신진 감독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산에서 기획, 제작, 후반 작업, 배급까지 할 수 있을 때 진정한 ‘부산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문화 산업 인프라가 서울에 집중된 상황에서 손승웅 감독은 부산의 젊은 영화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산영상위원회에서는 매년 신진 감독을 위해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어요. 하지만 감독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늘 대두되는 것이 젊은 친구들의 역량이죠. 서울에서 활동하는 젊은 영화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쟁력을 갖춰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워크숍, 멘토 프로그램 등 조금만 신경 쓰면 자신의 역량을 강화할 기회는 많습니다.” 사실 그 역시 부산이 영화 제작이 쉽지 않은 곳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영화를 전공하던 시절 꿈을 포기하는 동료들을 봐왔고, 본격적인 영화인의 길에 들어선 후에는 불안한 미래로 힘들어하는 동료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2008년에 재능 있는 부산 감독들이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브리지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영화 개봉을 준비하며 배우고 느낀 점들을 후배 감독과 함께 공유하고자 문을 열었어요. 올해는 여성 감독의 영화 2편이 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김민경 감독의 <리메인>과 김유리 감독의 <영화의 바람>인데, 서울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다 부산에서 다시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낙향한 친구들입니다.”
지금은 제작자로 활동하지만 그 역시 서울의 한 프로덕션과 작업을 이어가며 새로운 영화를 위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장기 실종자를 주제로 한 영화로 무대는 부산이다. “이 영화가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제 상업영화 입봉작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제 작품을 통해 젊은 영화인들이 부산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탄생을 지켜본 청년은 서른다섯 살의 감독이 되어 부산 영화계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 그가 선보일 새로운 영화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에디터 박현정(hjpark@noblesse.com), 손지혜(프리랜서)
사진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