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사랑한 와인
와인 그것은 매혹, 그리고 사랑. 예술가에게 영감의 원천이자 그들의 인생 자체가 되었다.

인간이 술이라는 음료를 마시기 시작한 지 수천 년이 넘게 흘렀다. 인간의 삶에서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적 관계로, 다양한 인간의 문화 속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특히 예술과 술이 맺은 인연은 그 어떤 분야보다 돈독하다. 술, 그중에서도 지금 말하고자 하는 건 우아하며 때깔이 고운 ‘와인’이다.
1300년대 초부터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프레스코발디는 르네상스의 주역들과 역사의 한 자락을 함께했다. 프레스코발디의 ‘카스틸리오니 키안티’는 도나텔로, 미켈로초, 미켈란젤로가 즐겨 마신 와인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과 와인을 교환해 마시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영국의 헨리 8세도 키안티의 매력에 푹 빠져 충직한 클라이언트가 되었다. 당시의 주문서가 아직도 가보처럼 이어져 내려온다.
17세기 이후 400여 년간 와인을 생산한 오스트리아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은 음악가와 나눈 정이 남다르다. 유럽에서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이 귀족 가문은 현재의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바탕으로 중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분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집사의 아들인 리스트, 슈베르트는 이 집안의 가정교사 출신이다. 하이든은 40여 년간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악장으로 일하며 누구보다 돈독한 연을 맺었다. 2009년 하이든 서거 200주년을 맞아 헌정 와인을 만들어 기념했을 정도. 헝가리 쇼프론 인근 지역에서 재배한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한 이 와인은 가벼운 질감이라 부담 없이 마시기 좋다. 하이든의 교향곡을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친근함과 평온함, 인생을 즐기는 기쁨 같은 감정이 와인에도 담겨 있다.
쿠시뇨 마쿨, 길진인터내셔날

아리에타 변주곡 1번, 나라셀라

샤토 샤스스플린

TG 달리 에디션 레세르바, 금양인터내셔날

돔 페리뇽 앤디 워홀 리미티드 에디션, MH 샴페인즈 앤 와인즈 코리아
‘와인 없는 하루는 햇빛 없는 날처럼 우울하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의 와인 사랑은 지대하다. 무엇보다 피처럼 붉은 레드 와인은 프랑스의 문학가에는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빅토르 위고는 “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며 목소리 높여 와인을 찬양했다(한 손에는 잔을, 다른 손에는 펜을 들고서). 보들레르는 ‘샤토 샤스스플린’으로 우울증을 치료했다. 샤스스플린은 프랑스어로 ‘우울함을 날려버리다’,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의미다. 19세기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이 와인 맛에 반해 직접 이름을 지어 선사했다. 줄곧 어둡고 우울한 느낌의 화풍을 선보인 그를 매혹한 샤토 샤스스플린의 깊고 부드러운 맛은 지금까지도 제 ‘이름값’을 다한다.
<노인과 바다>를 집필한 헤밍웨이는 소문난 술꾼이었다. 헤밍웨이의 술 하면 럼의 비중을 높여 독하고 차갑게 즐기는 모히토를 먼저 떠올릴 수 있겠으나, 그가 진심으로 연모한 술은 보르도 좌안의 우아함을 담당하는 ‘샤토 마고’다. 오죽하면 손녀딸의 이름마저 마고 헤밍웨이로 지었을까. 그런가 하면 1971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칠레 출신의 민중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또 다른 보르도 특급 와인인 샤토 무통 로트칠드를 찬양했다. 파리에서 처음 맛본 그 맛을 평생 잊을 수 없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를 주인공으로 한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소설과 동명의 영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는 그가 평소에 가장 즐겨 마신 ‘쿠시뇨 마쿨’도 만날 수 있다. 150여 년간 가족 경영으로 고품질 와인을 한정 생산해온 쿠시뇨 마쿨은 칠레의 국보급 와인이라 불릴 정도로 명망이 높다.
어디 시인과 작가뿐이랴. 전 세계 박물관에 분신이자 자식 같은 작품을 걸어둔 최고의 화가들도 술(와인)로 영혼을 달래고 새로운 영감을 얻었다. 고흐와 드가, 마네가 활동한 19세기 후반에 녹색 요정이라 불린 압상트가 활약했다면, 20세기에는 세련된 와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매일 밤 런던의 소호 클럽을 배회하며 굴과 샴페인을 잔뜩 먹고 마신 후 이른 아침 숙취 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앤디 워홀은 샴페인 중에서도 돔 페리뇽을 고집했다. “돔 페리뇽 2000병을 사서 창고에 저장했다가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에 몽땅 마셔버리자”라고 일기에 적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 엠포르다 지역의 부티크 와이너리인 페렐라다 와이너리의 창업주 카스티요 페렐라다의 절친한 친구였다. 달리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에게 늘 제일 먼저 페렐라다의 ‘TG 카바 브루트 로사도’를 한 잔씩 제공했으며, 사람들은 이를 ‘달리의 로제 샴페인’이라 불렀다. 달리 사후에 출시한 ‘TG 달리 에디션 레세르바’는 그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한 오마주 와인이다. 달리의 드로잉 작품을 라벨에 사용해 친구의 예술성에 대한 경외감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서 마시는 와인에 만족할 수 없어 소신껏, 취향대로 와인을 만들어보자고 결심한 예술가도 있다. 이탈리아의 신표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산드로 키아는 1984년 ‘카스텔로 몬탈치노’를 설립, 30년 만에 최고의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생산자로 부각했다. 그가 만든 와인은 전통 회화로 회귀하자는 ‘트랜스 아방가르드(아방가르드를 넘어)’ 스타일을 추구한 그의 작품 세계처럼 매우 고전적이며 반듯한 구조감을 지닌 와인으로 알려졌다. 나파밸리의 ‘아리에타’, 작은 아리아를 뜻하는 이 와이너리의 행보도 흥미롭다. 크리스티 와인 경매사 출신인 프리츠 해턴이 이곳의 오너로 그는 프로급 피아노 연주 실력을 자랑하는 인물. 이런 음악적 재능을 와인 양조에도 발휘해 다른 나파밸리 와이너리의 블록버스터 스타일과 완벽히 차별화되는 서정적이면서 유연한 와인을 만든다. ‘하얀색 건반 위(On the White Keys)’, ‘4중주(Quartet)’, ‘변주곡 1번(Variation 1)’ 등 음악과 연관된 와인 이름도 재미있다. 예술을 만나기 전에 스토리가 있는 와인 한 잔, 어쩌면 작가를 그리고 그 작품을 이해하는 시작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일러스트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