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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하루를 사는 법

ARTNOW

김선우 작가가 전하는 10년 차 전업 아티스트의 하루.

김선우멸종된 도도새를 매개로 현대인의 무한한 꿈과 가능성, 자유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의 작품에서 우러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도도새는 ‘날지 못하는 바보 새’가 아니라 경계 없는 가능성을 품은 알과 같은 존재로, 이를 통해 표류하는 청년들에게 꿈과 이상을 잃지 말라는 경험에서 우러난 격려를 전한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의 업을 위해 각자 일터로 이미 출근한 시간, 해가 중천에 닿을락 말락 할 때쯤 느지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맛 좋은 커피와 함께 바삭한 크루아상을 씹으며 여유롭게 하루를 시작한다. 그러면서 창밖으로 펼쳐지는 ‘비예술’적 일상 속 분주하게 어딘가로 향하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고양이가 무릎 위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고 기분 좋게 가르랑댄다. 종일 그 부드럽고 따뜻한 털 뭉치를 쓰다듬으며 작업은 하는 둥 마는 둥 나른한 오후를 보내다가, ‘에잇, 오늘은 아무래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군’ 하고 붓을 저 멀리 내던져버린다. 그러고선 한껏 공들여 단장하고 동료 예술가들이 기다리는 단골 바로 향한다. 그곳에서 ‘늘 마시던 걸로’를 주문하고, 지성과 영감 가득한 동료들과 함께 예술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길고 긴 밤을 지새운다.
비현실적이지만 어디선가 본 듯 이상한 기시감이 드는 이 우아하기 짝이 없는 예술가의 하루는 불과 17년 전, 그러니까 미술대학 입시를 앞두고 내가 상상한 예술가의 나날이다. 어쩌면 나는 이처럼 나태하고 나른한 동시에 무언가 비범하고 반짝이는 영감이 가득한, 언뜻 무위도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을 수행하는, ‘쓸모 있는 한량’의 삶을 동경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이것이 대중매체가 이 세상 사람들에게 부여한 허무맹랑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먼 미래에 내가 직접 예술가로 살아가게 되면서다. 시간은 무심히 흘러 이제 나는 벌써 30대 후반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고, 더 이상 신진 작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중견 작가도 아닌 그 어딘가의 영역에 걸쳐 10년 차 전업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김선우, A Traveler’s Needs(여행자의 필요), Gouache on Canvas, 163x130cm, 2024.

결코 편해지지 않는 일, 예술
예술가라는 직업의 측면에서 볼 때 짧지도, 그렇다고 길다고도 할 수 없는 그 시간 동안 ‘작가’라는 직함을 지켜낸 과정을 구구절절 풀어놓으면 한 편의 신파극이 되겠지만, 지면 관계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하는 대신 그 모든 과정을 짧은 한 단어로 압축해보자 하면, ‘버텼다’라는 표현으로 어떻게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예술가의 삶을 차치하더라도, 우리 삶 자체가 결국 ‘버티자, 버티는 거야’라며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지친 몸을 이끌고 세월을 헤치며 조금씩 전진해 나아가는 것이긴 하다. 이처럼 ‘살아간다’라는 기본적 삶의 레이어에 최소한의 것을 갖추며 버티는 일조차 무수한 번민과 끝없는 방황,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연속일진대, 여기에 ‘예술가로 살아가기’라는 레이어를 한 장 더 겹치면 삶의 형태는 무어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술이라는 분야는 돈이 만능인 자본주의 체제의 여러 현실적 측면에서 보면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활동으로 비치기 쉽다. 그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일생을 걸고 도전하기로 한 사람은 그 자신을 포함해 가족과 친구 등 많은 사람에게 민폐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이고 심각해 보이는 문제는 오히려 예술가로 살아가는 데 지극히 부차적이고 사소한 것이 되고 만다.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 전연 다른 형식의 ‘버티기’가 된다는 이야기다.
20세기 후반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평론가, 사회운동가인 수전 손태그(Susan Sontag)는 삶과 예술을 동시에 지향하는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었는데, 두 번의 결혼, 두 번의 이혼, 암 투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한 아이의 엄마로서 살아온 예술가의 삶을 스스로 이렇게 평가한다. “삶과 프로젝트의 조화는 불가능하고, 그러한 조화를 위해 노력을 포기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진퇴양난이었다는 의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단한 삶을 어떻게든 유지하는 동시에 ‘예술가로서 버티기’를 가능하게 해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부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영국 소설가 힐러리 맨틀(Hilary Mantel)도 좋아하는 일과 일치하는 그녀의 삶이 행복한지 묻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답했다. “글을 쓰면 불안해지고, 계속 마음이 심란해져요. 동화 〈빨간 구두〉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아요. 그냥 춤을 추고 또 추고, 절대로 평정을 찾지 못하는 거죠.” 예술가의 삶을 60년 이상 지속해온 영국 화가이자 조각가인 매기 햄블링(Maggi Hambling) 역시 그렇게 오랜 시간, 평생을 작업에 투신해왔음에도 그 모든 과정에서 빠짐없이 엄청난 불안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굉장한 낭패감과 당혹감을 느꼈다. 무려 60년! 반세기 넘는 시간을 내내 작업하며 버텼는데도 그 불안의 농도가 변하지 않는다고? 말도 안 돼! 매기 햄블링이 예술가로 살아온 시간의 반의 반도 아직 버텨내지 못한, 10년 차 예술가인 내가 느끼는 좌절감을 조롱하듯 그녀는 그 불안한 감정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의모든 단계는 실험 단계에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죽은 예술과 다름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선우, In the Flow (흐름 속에서), Gouache on Canvas, 162x162cm, 2024.

김선우 작가의 작업실.

예술가의 비예술적 일상
문득 최근 개인전 디스플레이를 위해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담당 학예사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강릉의 한 공립 미술관에서 두 달가량 이어질 나의 전시를 위해 우리는 작년부터 전시 주제와 기획에 대한 연락을 주고받았고, 1년가량 준비 과정을 거쳐 드디어 전시 개최를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장장 7시간 넘게 작품 설치를 진행하던 중 잠시 커피 한잔 하며 서로의 진해진 다크서클을 마주했을 때, 학예사가 내게 물었다. “작가님, 그래도 이제 작업해온 지 10년 정도 됐으니 새로 작업을 구상하거나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는 일이 많이 편해지셨죠?” 나는 그 물음에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아뇨. 절대로요. 매번 아주 새롭고 어려운 난제와 마주하는 기분이에요. 이건 대체 언제쯤 익숙해질까요?” 기운 빠지는 나의 대답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어머, 전혀 그러시지 않을 줄 알았어요. 작가님은 주말도 없이 거의 1년 내내 작업실에서 살다시피 하고, 늘 활동도 많으신 걸로 알고 있어서요. 그래서 늘 작업이 술술 잘 풀리시는 줄 알았지 뭐예요.”
그 말처럼 나는 여행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없는 한, 1년 내내 꽤 정확한 작업 루틴을 유지해오고 있다. 오전 5시에 집을 나서서 작업실에 5시 반쯤 도착해 커피와 견과류로 간단하게 식사를 해결하고, 작업을 하다가 오전 11시 반에 샐러드와 닭 가슴살로 점심을 해결한다. 그렇다고 특별한 식단 관리를 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작업을 수행하는 데 포만감이나 식곤이 느껴지는 것이 싫어서다. 점심 식사를 하고는 15분 정도 동네를 산책하고 나서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오후 5시나 6시 정도까지 작업을 지속한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제대로 된, 맛있는(이 부분은 고된 하루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내게 굉장히 중요하다!) 저녁 식사를 직접 준비해 먹고, 오후 8시와 9시 사이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 밖으로 나가 5~10km 정도를 운동 삼아 달린다. 그러고 나면 책을 읽거나 반려 고양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다가 오후 10시에 잠자리에 든다.
글 첫머리에서 언급한 ‘예술적 삶’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어떤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비예술적’인 삶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이런 루틴에 대해 의심 섞인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어째서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가 자유롭지 않은 루틴 속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17년 전의 내가 그랬듯, 대중의 상상 속 예술가는 여전히 나태하고 나른하다. 바른 생활 예술가의 표본인 무라카미 하루키도 매번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하니, 대중매체가 심어놓은 예술가의 이미지는 이처럼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듯하다.
내 경우 이러한 질문에 대해 대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혹은 “내가 내 삶에서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니까 그러한 일은 최상의 상태에서 수행하고 싶다” 같은 뜬구름 잡는 답변을 내놓기는 하지만, 담당 학예사와 대화하던 중 나는 문득 매기 햄블링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그가 평생을 작가로 성실하게 버텨오면서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그 ‘불안’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예술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물리적·정신적 불안감, 결코 떨쳐버릴 수도, 완전히 떨어내서도 안 될 그 날카로운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자 수단으로서 그나마 내가 통제 가능한 철저한 루틴을 선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내게 루틴이란, 내 삶에서 나 자신과 약속한 가장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기초 체력을 위한 일종의 단련인 것이다. 비록 무수한 실패와 오류를 생산해낼지언정, 그렇게 창작을 위한 근육을 단련하는 일만은 제대로 지속하고 있다는 그 감각이 예술적 삶을 버텨내게 해준 가장 강력한 동기이자 원동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선우, Dancing with Me(나와 함께 춤을), Gouache on Canvas, 130×162cm, 2024.

김선우, 나의 춤, Watercolor on Paper, 42x30cm, 2024.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예술, 결코 쉬운 적 없고, 앞으로 버텨내는 일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매번 전시를 앞두면 막막하고 답답해서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 같다가도, 열기와 열망과 욕심과 열정과 호기심에 들떠 다리미처럼 금세 달아올라 피로도 잊고 붓과 연필을 움직이다가도, 마침내 녹초가 되어 작업실 문을 닫고 시간이 지겹도록 느리게 흐르는 꽉 막힌 도로 위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다가도 ‘그림이란, 회화란 뭘까? 전시란 뭘까? 작업이란 도대체 어떤 행위인가? 과연 나는 무엇을 하는 인간인가?’ 스스로에게 수백 번씩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어제도, 오늘도 이와 같았듯, 결국 내일도 작업실로 향할 수밖에 없다. 답을 찾는 인간이 아니라, 질문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는 단 하나의 명료한 사실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필연적으로 불안한 존재다. 불안(不安), 문자 그대로 한자리에서 안거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 불안한 예술가여, 당신은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김선우(아티스트)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사진 PB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