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법정에 서다
예술가가 법원에 갈 일이 있을까? 물론 개인적인 사유가 아닌 ‘예술가’의 신분으로 법원에 서는 경우 말이다. 고상함과 아름다움으로 가득할 것 같은 예술 세계에서도 법적 분쟁은 빈번히 일어난다.
1 필립 파비아와의 긴 소송에서 진 추상표현주의 대가 빌럼 데 쿠닝
2 주드폼 갤러리에서의 필립 파비아(왼쪽)
3 튈르리 정원에 설치된 빌럼 데 쿠닝의 설치 조각 작품
Willem de Kooning vs. Philip Pavia
제1라운드, 빌럼 데 쿠닝 vs. 필립 파비아
1940년대 뉴욕 그리니치빌리지 8번가에 있는 월도프 카페테리아에는 당시 젊은 무명 작가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리필이 가능한 커피와 차를 주문하고 공짜로 제공하는 뜨거운 물에 케첩을 부어 만든 토마토 수프를 먹으며 배고픔을 달래곤 했다. 그들 중에는 오늘날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로 알려진 빌럼 데 쿠닝(Willem de Kooning)도 있었다. 1940년대 말에는 미국 추상표현주의 회화 작가 프란츠 클라인, 필립 거스턴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전설적 딜러 레오 카스텔리까지 그곳을 아지트 삼아 철학과 문학, 미술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이며 점차 하나의 모임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 모임은 ‘더 클럽(The Club)’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갔고, 실질적으로 모임을 주도한 추상표현주의 조각가 필립 파비아(Philip Pavia)는 “20세기 전반은 파리에 속하지만 20세기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선언했고, 이 때의 더 클럽 멤버들은 자신들이 세계 미술계의 구심점이 되리라는 패기에 차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반세기가 지난 1990년, 필립 파비아는 이 배고픈 시절을 함께한 동료 빌럼 데 쿠닝을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됐다. 그 둘 사이에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젊을 때부터 예술이라는 하나의 꿈을 좇은 두 작가. 하지만 시간이 흘러 빌럼 데 쿠닝이 뉴욕현대 미술관(MoMA)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을 열며 이름을 날리게 되는 반면, 필립 파비아는 조각가로서 미술사에 주요 활동의 족적은 남기지만 국제적 예술가이자 동료인 데 쿠닝의 어시스턴트로도 일하게 된다. 1987년, 데 쿠닝은 자신의 작업을 돕던 필립 파비아에게 흙으로 작업한 샘플 조각의 브론즈 캐스팅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얼마 뒤 데 쿠닝은 갑작스럽게 알츠하이머병을 앓기 시작했고, 2년 뒤 금치산자 선고를 받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에 데 쿠닝의 부인 일레인 데 쿠닝마저 세상을 떠나 필립 파비아는 브론즈 작업 비용을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1990년 필립 파비아는 데 쿠닝을 상대로 작품 캐스팅에 들인 시간과 비용에 대한 300만 달러의 합의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참고로 1990년 당시 빌럼 데 쿠닝의 소유 작품 추정가는 5000만~ 1억5000만 달러 정도였으며, 2006년 그의 작품 ‘여인 Ⅲ’는 1억3750만 달러에 팔렸다).
하지만 빌럼 데 쿠닝은 알츠하이머병으로 명확한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 실질적인 작품 소유권은 그의 딸 리사 데 쿠닝이 행사하게 되었는데, 그녀가 필립 파비아의 소송에 대해 브론즈 작품이 빌럼 데 쿠닝의 작품이 아닌 자신의 작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는 필립 파비아에게 캐스팅을 의뢰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소송은 긴 분쟁으로 이어졌고, 젊은 시절을 함께한 두 친구는 3년 동안 원고와 피고로 법정 싸움을 벌였다. 마침내 1993년, 지지부진한 분쟁이 끝나고 법원은 여러 가지 정황과 증거를 바탕으로 필립 파비아의 손을 들어줬다.
1 필립 파비아와의 긴 소송에서 진 추상표현주의 대가 빌럼 데 쿠닝
2 주드폼 갤러리에서의 필립 파비아(왼쪽)
3 튈르리 정원에 설치된 빌럼 데 쿠닝의 설치 조각 작품
Jeff Koons vs. Art Rogers
제2라운드, 제프 쿤스 vs. 아트 로저스
제프 쿤스(Jeff Koons)는 1998년 맨해튼에 위치한 소나벤드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
아트 로저스는 캘리포니아에서 자신이 찍은 사진을 인화해 판매하는 사진작가였다. 그가 저작권 침해를 주장한 사진은 1980년에 지인인 짐 스캐넌의 의뢰로 촬영한 ‘Puppies’. 스캐넌 부부는 새로 태어난 셰퍼드 강아지 여덟 마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촬영을 마친 부부는 인화한 흑백사진 ‘Puppies’를 200달러에 구입해 소장했다. 그 후 로저스는 이 사진을 작가 사인을 담은 에디션으로 판매했고,
문제는 여기서 비롯됐다. 1987년 우연히 들른 관광 기념품 상점에서 뮤지엄그래픽스사의 ‘Puppies’ 엽서를 구입한 제프 쿤스는 부부가 강아지를 안고 있는 모습이 매우 미국적인 대중문화 이미지를 반영했다 생각했고, 이 사진을 조각 작품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제프 쿤스는 작품 제작을 위해 엽서의 카피라이트 문구를 찢어낸 뒤 이탈리아 장인에게 보냈고, ‘사진과 똑같이’ 조각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프 쿤스의 조각 ‘String of Puppies’는 그를 세계적 스타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려놓는 동시에 저작권 침해 논란의 중심에 서게 했다. 제프 쿤스는 이 소송에서 아트 로저스의 ‘Puppies’는 매우 흔해빠진, 독창적이지 않은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의 ‘String of Puppies’는 미국의 키치 문화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항변했다.
물론 아트 로저스의 사진은 제프 쿤스의 조각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작품의 맥락뿐 아니라 평면인 사진이 입체인 조각으로, 흑백이 컬러로, 그리고 작품의 매체도 변환되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작품의 재료나 미술사적·사회적 맥락의 차이보다 단순한 작품의 형태에 따른 이미지의 전반적인 유사성에 주목해 아트 로저스의 저작권을 인정했다. 이로써 1992년, 긴 법정 싸움을 끝내고 아트 로저스가 승소하게 됐다.
‘로저스 대 쿤스’로 기억되는 이 소송은 미국 현대미술사와 더불어 미술 저작권법 역사에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이 판결에서 법원이 로저스의 저작권을 인정한 결정적 근거는 제프 쿤스가 장인에게 조각을 의뢰하며 지속적으로 요구한 ‘사진과 똑같이’라는 주문이었을 것이다. 미술에 대해 판타지를 가지고 감상만 하는 사람들에게 미술가와 변호사는 별 관계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미술을 직업으로, 그것도 청춘과 인생을 담보로 하여 업으로 삼은 미술가들은 그 노력에 관해 당연히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21세기의 미술 비즈니스는 얼마나 거대한가? 이 거대 정글 안에서 작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예술가와 변호사는 이제 더 이상 서로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뉴욕의 미술관련법 변호사
제나 조던(왼쪽)과 게일 엘스턴(오른쪽)
1990년 빌럼 데 쿠닝을 상대로 소송한 필립 파비아 측의 변호를 맡은 뉴욕 주 예술 관련 변호사 게일 엘스턴과의 미니 인터뷰. (http://galepelstonpc.com)
필립 파비아가 승소한 결정적 증거자료는 뭐였나요? 미술 비평가를 포함한 전문가 증인 진술서와 지문 분석 결과 자료 등이었습니다.
여러 미술 관련 법적 사건을 맡고 계신데, 어떻게 예술 관련 변호를 시작하게 됐나요? 변호사 초기부터 제가 가장 흥미를 느끼는 분야였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의 대다수가 아티스트였고 저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을 하며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술, 특히 미술 관련 법을 중점적으로 다루게 되었습니다.
미술 관련 변호 중 처음 맡은 사건은? 작품을 검열당한 작가를 대변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자원했지만 이후 이 작가의 작품이 한 갤러리에서 작품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파손된 일이 있어 다시 한 번 맡게 되었죠. 여자의 벗은 둔부 그림이었는데, VARA(Visual Artists’ Right Act)를 근거로 변호해서 승소했습니다.
미술 관련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열정은 어디서 오나요? 저는 예술가들이 매우 중요한 활동을 한다고 믿습니다. 창조적 표현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가치입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는 일을 한다는 것에 보람과 가치를 느낍니다.
현대미술계와 미술 시장은 계속 팽창하고 있습니다. 현대미술계를 되돌아볼 때, 미국의 예술 관련 법에 변화가 있었나요? 1991년 발효된 VARA 법은 미국 내 미술가들의 권리를 대폭 신장시켰어요. 유럽 법의 유사한 예로 프랑스에서 시작된 ‘Droit Morale’가 있습니다. 오늘날 작가들은 자신의 권리를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새로운 룰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이재이(미디어 아티스트) 예술법 관련 자료 제공 및 자문 Gale P. Elston, Jenna M. Jord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