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후원, 그 시대적 동행
아티스트는 경제적 보상과 무관하게 순수한 예술혼으로 작품을 완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일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품 세계를 꽃피운 예술가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왕이나 교회가 독점적 예술 후원을 하던 시절, 미켈란젤로가 교황의 의뢰로 완성한 ‘천지창조’ 벽화
1949년, 로렌초 데 메디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에서 제작한 우표
정부의 새로운 예술 후원 모델로 떠오른 싱가포르의 현대미술 단지 길먼 배럭스
미국에서 체계적인 예술 지원을 위해 설립한 NEA의 홈페이지
역사와 함께 변모해온 아트 페이트런
아버지를 의미하는 라틴어 ‘pater’에서 유래한 페이트런(patron)은 예술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후원자로, 공개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예술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오래전 귀족들의 후원부터 최근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 후원까지 페이트런의 형태는 사회적·경제적 변화에 따라 변모해왔다. 후원 문화가 발달한 서구에서는 특히 시대적 변화가 두드러진다.
고대와 중세에는 막강한 정치권력을 가진 왕이나 교회가 독점적 예술 후원을 했다. 헬레니즘 문화를 꽃피운 고대 마케도니아의 지배자 알렉산더 대왕은 궁정화가 아펠레스에게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고, 중세 교회는 예술가들에게 교회의 건축설계와 종교화 제작을 의뢰해 자신의 정치적 권력을 시각적으로 정당화하고 과시했다. 왕, 교회와 더불어 새로운 형태의 페이트런이 등장한 건 14~15세기 르네상스 시대다.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명령으로 그 유명한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벽화를 완성한 것도 이때이며, 메디치 가문처럼 상업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류층이나 귀족계급이 페이트런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우월성을 드러내고 예술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했는데, 원하는 작품을 직접 예술가에게 의뢰함으로써 작품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같은 페이트런은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젊은 예술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작품의 주제와 의미를 전달하고 특정 안료를 사용하길 요구하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간섭했다. 그래서 이 시기 예술가들은 그런 요구와 취향을 반영한 작품을 제작했고, 주로 신화적 내용을 담거나 종교화에서 차용한 형식의 회화, 초상화, 조각품이었다.
페이트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전환점은 16~17세기경. 상업자본주의의 발달로 미술 시장이 형성되며 기존의 왕과 교회,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페이트런이 확장됐다. 이 시기 유럽의 절대왕정 국가는 식민지 개척과 국외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해상무역을 장악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는 중산계급이 성장하면서 미술 시장이 활성화됐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과거 소수 후원자의 의뢰에서 벗어나 보다 많은 이들을 위한 작품을 제작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에서 부를 축적한 상업가 니콜라스 용헬링크(Nicolaes Jonghelinck)와 코르넬리스 판 데르 헤이스트(Cornelis van der Geest)는 피터르 브뤼헐, 얀 반 에이크, 루벤스 등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 특히 니콜라스 용헬링크는 피터르 브뤼헐의 대표작 ‘눈 속의 사냥꾼’을 포함해 계절과 달을 나타내는 12점의 ‘month’ 시리즈를 의뢰했다. 시장 시스템 덕에 보다 독립적이면서 창조적인 활동이 가능해졌고, 작품의 내용도 종교화나 초상화를 넘어 일상의 표현 등 다양한 장르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특정 예술가의 작품을 사랑하고 지속적으로 사 모으는 컬렉터와 이를 중개하는 전문 화상(아트 딜러)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브랜드의 대표적 예술 후원의 예로 떠오른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 ⓒ Iwan Baan for Fondation Louis Vuitton, 2014
파리에 자리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미술관 / ⓒ Jean Nouvel/ADAGP, Paris, Photo by Luc Boegly
현대의 가장 막강한 후원자, 정부와 기업
현대로 넘어오면서 가장 활발한 예술 후원 주체로 떠오른 건 정부와 기업이다. 20세기 초 두 번의 세계대전 후 서구에서는 국가 재건과 문화 예술 부흥을 목표로 국가나 공공단체의 예술 후원이 활발했는데, 영국에서는 1945년 ‘Art Council’을, 미국에서는 1965년 ‘NEA(National Endowment for the Arts)’를 설립하며 정부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인 예술 지원 시스템을 갖췄다. 최근에는 주로 오래되고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전시장이나 작가의 작업실로 전환하는 작업이 정부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싱가포르의 길먼 배럭스(Gillman Barracks)는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에서 국제 미술계의 아이콘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로 방치된 군대 주둔지를 현대미술 단지로 개발한 곳. 새로운 예술 후원 모델로 많은 미술계 관계자가 방문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서울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금천예술공장, 문래예술공장,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난지스튜디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운영하는 고양과 창동 레지던시 등이 이와 비슷한 경우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ARKO) 같은 공공기관은 공모를 통해 예술가에게 다양한 창작 활동을 위한 지원금을 직접 주고 있다.
정부나 공공기관과 함께 가장 눈에 띄는 아트 페이트런은 기업이다. 자본주의의 절정을 거치며 부를 축적한 기업들이 과거 귀족에 견줄 만한 역할을 하는 새로운 아트 페이트런으로 등장했다. 기업 오너의 개인 컬렉션을 바탕으로 미술관을 설립하기도 하고, 기업에서 설립한 문화재단을 통해 미술상이나 레지던시의 형태로 예술가에게 물질적 지원을 한다. 미국 기업인 카네기, 록펠러, 구겐하임 등은 미국을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만드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요즘은 명품 패션 브랜드의 예술 후원이 두드러지는데 프랑스의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루이 비통 재단 등이 대표적이다.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2014년 자신의 컬렉션인 현대미술품을 기반으로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오픈했고, 이곳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파리에서 반드시 방문해야 할 필수 코스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삼성, 두산, 금호 등 여러 기업이 미술관이나 미술상, 레지던시를 운영하며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후원하고 있다. 이런 기업의 예술 후원은 ‘메세나(mecenat)’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물론 국가나 기업 외에 부유한 개인 페이트런도 있다. 찰스 사치 같은 컬렉터이자 아트 딜러, 투자 목적을 띤 펀드매니저, 할리우드 스타 등 다양하다. 국가, 기업, 개인을 막론하고 분명한 사실은 과거 후원자들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후원하는 경향이 있었다면, 현대 예술 후원의 배경에는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국가나 정부는 예술을 하나의 문화 자본으로 간주하고, 기업 역시 예술 후원으로 자사의 이미지를 높이고 조직의 창의성을 장려하는 등 간접적 효과를 기대한다.
기업인이자 자선가인 앤드루 카네기가 설립한 미국의 카네기 미술관 / ⓒ Tom Little
후원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영국 왕립미술원의 전시 프로그램 / ⓒ Red Photographic
영국 왕립미술원에서 후원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프라이빗 행사 / ⓒ Red Photographic
점차 구체적이고 광범위해지는 후원
최근에는 전통적 후원 방식 외에 예술가와 후원자의 매치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형태를 시도하고 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혹은 후원의 규모가 크든 작든 서로 니즈가 맞는 예술가와 후원자가 보다 적극적으로 만나는 방식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는 ‘지정 기부’라는 형태로 기부를 원하는 개인이 특정 작가를 지목해 지원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또 지난 4월 비영리법인으로 설립한 서울예술재단은 문화 예술 창작자와 수요자의 커뮤니케이션 공간이다. 표미선 전 화랑협회 회장이 이사장을 맡아 미술을 향유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서울예술재단은 최저 후원 금액을 월 1만 원으로 책정해 온 국민이 페이트런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후원자에게는 재단이 소장한 작품을 저렴한 가격에 대여해주고,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거나 문화 예술 강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또 해외 레지던시와 협약을 체결해 국내 예술가의 해외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형태도 두드러진다. 삼성문화재단이 후원하는 프랑스 파리의 시테 국제예술공동체(Cite Internationale des Arts), 캔 파운데이션이 지원하는 베를린의 ‘P.S.Berlin-ZK/U’ 레지던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아카데미 (Rijksacademie van Beeldende Kunsten)가 대표적이다.
컨시어지 서비스의 일환으로 VIP 후원자에게 작가의 스튜디오 방문, 교육 프로그램, 소셜 다이닝 등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 예가 영국에서 출범한 프라이빗 라이프스타일 그룹 ‘Quintessentially’에서 운영하는 ‘Quintessentially Art’다. 기업과 예술단체의 매치를 통해 교류와 협력을 이끄는 단체 ‘A&B(Arts & Business)’도 유럽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며, 영국은 ‘아트 & 비즈니스 어워드(Arts & Business Awards)’를 제정해 이를 적극적으로 알린다. 대학에서도 예술 전공 학생을 위한 미래의 후원자 찾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비슷한 경우를 찾기 힘들지만, 영국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RA)의 경우 후원 금액에 따라 Silver, Gold, Platinum, Donor의 4단계로 나눠 학생의 창작 활동을 지원한다. 후원자가 되면 RA에서 열리는 전시나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고, 이를 계기로 학생의 작품을 구매하며 자연스럽게 미래의 후원자로 이어진다.
소셜 미디어와 플랫폼의 발달로 등장한 크라우드 펀딩도 빼놓을 수 없는 후원의 형태다. 보다 대중적이면서 손쉬운 후원 방식으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쉽게 아트 페이트런이 될 수 있다. 예술 창작 활동을 위한 대표적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로는 미국의 페이트리온(patreon.com)이 있다. 킥스타터(kickstarter.com) 같은 기존의 크라우드 펀딩과 전통적 후원의 중간 형태를 취하며, 매달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후원하고 금액대별로 작가의 작품이나 관련 아이템을 받는다. 이렇듯 다양해진 후원 방식이 연계 프로그램을 만나면 지원을 넘어 간접적으로 창작 활동을 경험하는 새로운 형태의 취미가 되기도 한다. 이는 장기적으로 페이트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예술 콘텐츠가 다양하게 발전하는 데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방소연(대림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