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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그렇게 가는 것

LIFESTYLE

한국적 공연을 가장 잘하는 배우로 꼽히는 김성녀가 5년 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뒤 창극에 새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창극의 전성기를 열며 배우로서도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그녀를 만났다.

‘창극’이라는 고루한 이미지의 공연 장르가 언젠가부터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는 일이 빈번해졌다. 새롭고 창의적이라는 평을 넘어 연속 매진 기록을 세우거나 세계 무대에 진출하는 국립창극단의 행보를 보면 역시 공연은 관객과 호응하며 더 큰 생명력을 얻는 것이란 사실을 실감한다. 현시대 관객과 교감하며 세련되게 변화해가는 창극의 중심에는 2012년 국립창극단 예술 감독으로 부임한 김성녀가 있다.
취임 당시 그녀가 가장 큰 목표로 내세운 것은 관객의 저변 확대였다. “창극이 시대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골동품처럼 모셔놓는 게 아니라 공연 예술의 한 장르로 경쟁할 수 있는 창극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죠. 창극 작품을 다양하게 확장해 많은 관객이 보고 싶어 하도록 하는 게 1차적 목표였습니다.” 변신을 시도한 첫 작품은 <장화홍련>. ‘스릴러 창극’을 표방한 이 작품은 판소리의 요소인 창, 아니리, 발림에서 벗어나 일상적 톤의 대사로 극을 진행하고 리듬을 배제하는 등 단원들조차 낯설어하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국립창극단 반세기 역사상 가장 큰 파격이란 평을 들었고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첫날부터 매진이었어요. 영화보다 무서운 스릴러라는 반응, 신선하다는 반응이 쏟아졌죠. <장화홍련>의 성공은 제가 국립창극단에서 계속 도전을 이어갈 수 있는 자산이 됐습니다.” 유료 관객이 객석을 채우는, 창극 장르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이례적인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김성녀 예술감독의 실험은 그리스 비극과 창을 접목한 <메디아>로 이어졌고, 국립창극단의 작품이 점차 공연 예술계의 화두로 떠오르자 연출가들도 서로 창극을 연출하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다.
새로운 공연을 위해 그녀는 해외 명장 연출가들과의 작업도 시도했다. 2014년 <다른 춘향>은 루마니아 출신의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Andrei Serban)이 춘향의 캐릭터를 재해석하고 열린 결말로 마무리한 작품. 또 지난해 11월에 공연한 <트로이의 여인들>은 싱가포르 예술 축제의 예술감독이기도 한 연출가 옹켕센(Ong Keng Sen)이 그리스 비극을 한국적 창극으로 만든 작품이다.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정재일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옹켕센은 한국의 판소리와 전통 연희에 대한 이해가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극 중 판소리가 힘 있게 부각되는 작품이 나왔어요. <트로이의 여인들>을 보면 서 앞으로 이런 방향으로 가면 되겠다는 이정표를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 작품은 올해 9월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사실 국립창극단의 해외 진출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4월 프랑스 파리 테아트르 드 라 빌(Theatre de la Ville)에서 고선웅 연출가의 <변강쇠 점찍고 옹녀>가 큰 성공을 거둔 것. 대관 공연이 아니라 초청을 통해 개런티를 받고 유럽에서 창극을 공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공연은 현지 관객에게 큰 환호를 받았고, 국립창극단을 초청한 에마뉘엘 드마르시-모타(Emmanuel Demarcy-Mota) 극장장은 김성녀 예술감독에게 “섹슈얼리티와 코믹한 요소가 어우러진 극은 우리에겐 없는 것”이라 말하며 창극의 독창성을 인정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의 해외 진출은 또 하나의 구슬을 꿰는 일과도 같다.

2016년,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의 한 장면

그녀가 5년간 계속해온 창극의 새로운 시도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김성녀 예술감독은 평생 배우로서 연극, 창극, 뮤지컬, 마당놀이 등 다양한 무대에 서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1950~1960년대 여성 국극(고전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극으로 남자 배역도 모두 여자 배우가 연기했다)에서 활약한 배우 박옥진이고 아버지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김향이다. 어머니의 아역을 맡아 처음 무대 위에 오른 것이 다섯 살 때이니 그녀의 연기 경력은 60년이 넘은 셈.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DNA를 바탕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병창 이수자이자 연극인으로서 결실을 맺으며 그녀와 절대 뗄 수 없는 소중한 작품도 생겼다. 1981년 배우 윤문식, 김종엽 그리고 그녀의 남편인 연출가 손진책과 함께 시작해 30년간 매년 연말과 연초에 공연한 마당놀이가 대표적이다. 한국판 뮤지컬이라 할 만한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마당놀이는 고전을 빙자해 현실을 꼬집는 내용으로 관객을 속 시원하게 해주고 웃음을 선사했다. 더블 캐스팅 없이 해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공연했고 2010년 30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마침표를 찍었는데 이후 2014년 국립극장에서 마당놀이를 되살려 현재 그녀의 후배들이 3년째 공연하고 있다.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오늘 오신 손님~!” 대사를 들을 때면 눈물부터 난다는 그녀는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 공연이 앞으로 몇백 년간 지속돼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김성녀의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마당놀이가 그녀에게 자식 같은 작품이라면 2005년 시작해 13년째 공연하고 있는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은 생명 같은 작품이다. 2시간 동안 홀로 32명의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힘든 극이지만 그녀는 초연 당시 기립박수를 받은 뒤 10년간 계속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리고 10년째 되던 해에 다시 관객의 뜨거운 반응을 보며 그 도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올해는 2월에 대만에서 공연하고, 5월에는 대학로에서 한 달간 무대에 오를 계획이다. “관객에게 인정받을 때 가장 큰 에너지를 얻는 것 같아요. 그런 걸 보면 저는 천생 배우죠. <벽 속의 요정>은 많은 사람이 김성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말을 했어요. 배우로서 내 생명이 끝나면 이 작품도 끝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힘들어도 이 작품을 계속하는 것이 제겐 끝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에요.”
올해도 국립창극단 예술감독과 배우로서 활동은 계속 된다. 1월 국립창극단은 해외 명작 <미녀와 야수>를 1시간 이내의 어린이 창극으로 만들어 첫선을 보였고, 4월에는 고선웅 연출가가 <흥보전>을 현대적 시각으로 해석한 <흥보씨>를 초연한다. 그리고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앙코르 공연이 이어진 뒤 6월에는 2015년 큰 호응을 얻은 <코카서스의 백묵원>을 무대에 올릴 예정. 또 그녀는 정의신 연출가와 함께 자신의 새로운 모노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다. ‘만두를 가장 맛있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가제를 단 이 작품은 아들을 잃은 주인공이 제사상에 올릴 만두를 빚으면서 이끌어가는 극으로 2018년에 만날 수 있다.
예술감독으로서 창극의 전성기를 열고, 배우로서 전성기 또한 이어가고 있는 김성녀가 후배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 “정말 좋아한다면 긴 호흡으로, 계산하거나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가야죠. 명배우의 정의를, 명인의 정의를 어디에 둘 것인지 소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은 매체가 많고 모든 게 빠르게 돌아가니까 되로 배워서 말로 풀어내는 세상이 됐어요. 하지만 후배들에겐 말로 배워서 천천히 풀어내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네요.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원래 그렇게 가는 거니까요.”

에디터 안미영(myahn@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