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을 입다, 오트 쿠튀르
세계 최고의 패션 하우스가 간직한 예술적 창조성과 극한의 상상력을 접하고 싶다면 파리의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눈여겨볼 것. 컬렉션을 본 뒤 당신의 마음에 작은 동요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오트 쿠튀르가 단순한 옷에 그치지 않는다는 방증이다. ‘디자이너의 혼과 장인정신이 담긴 창작물’,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을 만나보자
“패션은 예술이다.” 이에 대해선 다양한 논점이 존재하지만, 패션과 예술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며 촘촘한 그물망 같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디자이너와 예술가가 서로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을 뿐 아니라 브랜드와 아티스트의 컬래버레이션, 브랜드에서 설립한 예술재단이 예술가를 후원하는 것도 이미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갤러리나 뮤지엄에서 열리는 각종 패션 전시는 수많은 관람객을 불러모으며 여느 유명 작가의 전시 이상으로 성황을 이룬다. 그리고 여기에 방점을 찍는 것이 있으니 바로 ‘오트 쿠튀르’다. ‘고급 재봉’을 뜻하는 이 맞춤복은 패션 하우스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아 만든 옷’이라는 말로 단정 짓기엔 부족하다. 예술적 창작물에 가까운 오트 쿠튀르는 디자이너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환상적 아이디어를 공방 장인의 기술을 통해 실현한 결과물로 ‘미적 작품을 형성하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라는 예술의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디자이너와 공방의 장인이 하나 되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셈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컬렉션에서 볼 수 없던 혁신적 재료를 개발해 사용하고 수백 시간에 이르는 수작업을 거쳐야 한다.
콘크리트, 라미네이트를 입힌 레이스 등 혁신적 소재를 사용한 샤넬의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룩

샤넬은 진주, 크리스털, 스팽글 등을 사용한 정교한 자수 장식이 눈에 띄는 오트 쿠튀르를 선보였다.
지난 7월 파리.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현장에선 한층 진화한 오트 쿠튀르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과거 패션 하우스의 장인정신으로 대변되던 오트 쿠튀르가 디자이너들의 실험적 놀이터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기존에 사용하지 않던 소재나 브랜드에서 자체 개발한 재료를 의상에 적용하고 과감한 슬릿과 컷아웃으로 예상치 못한 디자인을 보여주는가 하면, 극도로 화려한 디테일과 건축적 실루엣을 통해 패브릭이라는 재료의 표현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 한가운데 선 대표주자는 두말할 것 없이 칼 라거펠트가 이끄는 샤넬이다. 이번 시즌 샤넬 오트 쿠튀르의 키워드는 ‘베르사유로 간 르코르뷔지에’, ‘바로크 요소를 접목한 모더니티’다. 눈치 빠른 이라면 쇼장을 장식한 하얀 벽과 커다란 바로크풍 앤티크 거울, 벽난로 등에서 이번 시즌 영감의 요소를 짐작했을 것이다. 현대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가 1930년대 중반 한 부유한 예술 애호가를 위해 만든 오래된 아파트, 빌라 사부아에서 가져온 장식적 디테일이다.
르코르뷔지에는 콘크리트를 모던 디자인의 주요 소재로 사용하고 18세기적 요소를 현대의 모더니티와 아우르는 것을 즐긴 건축가다. 그에게 영감을 받은 칼 라거펠트는 콘크리트를 패브릭으로 재탄생시키고 그 위에 진주와 크리스털, 스팽글 등의 화려한 자수 장식을 더해 ‘혁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줬다. 그뿐 아니라 라미네이트를 입힌 레이스, 네오프렌 등 예상을 뛰어넘는 소재를 사용해 컬렉션을 다채롭게 물들였다. 직각의 어깨 라인이 돋보이는 테일러드 재킷에 허리 라인은 코르셋으로 조여 잘록하게 만들고 프랑스식 사이클링 쇼츠인 블루머, 메탈과 콘크리트 소재 버튼이 달린 프록코트 등을 매치해 곳곳에서 18세기 파리의 무드를 연출했다. 재단 방법 역시 기존의 통념을 탈피해 바이어스 커팅한 단 한 조각의 천으로 재킷과 코트를 만들어 ‘솔기 없는 오트 쿠튀르’를 선보이며 오트 쿠튀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다.
모더니티를 찾아 과거로 회귀한 디올의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룩
디올 역시 모더니티를 찾아 과거로 여행을 떠났다. 아티스틱 디렉터 라프 시몬스는 쇼에 앞서 “아주 오래되고 역사적인 것 속에서 극도로 모던한 것을 찾아내는 과정에 흥미를 느낀다. 한 시대의 토대가 다른 시대에서 기인하고, 또 미래가 과거를 기반으로 하는 그런 부분 말이다”라는 말로 이번 오트 쿠튀르에 대한 힌트를 언급하며, 과거와래 미가 서로 조우하고 충돌하는 컬렉션을 준비했다. 18세기 의상부터 오늘날 우주비행사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넘나드는 다양한 결과물이 등장했다. 18세기 궁정의 남성복인 쥐스토코르와 쥘레를 여성스러운 실루엣으로 변형해 제시하고, 동시에 지퍼와 실크 태피터를 활용한 비행복 스타일의 점프슈트를 선보였다. 그 밖에도 가볍고 모던한 형태의 페티코트를 덧댄 파니에 드레스의 봉긋한 실루엣, 18세기 머스큘린 드레스에서 발견할 법한 자수 장식을 더한 프록코트 등은 매우 모던한 언어로 재해석되어 라프 시몬스가 지향하는 오트 쿠튀르의 미래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왼쪽부터_ 1.발렌티노에 영감을 준 라파엘전파의 작품 이미지 2,3 발렌티노의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백스테이지 풍경 4,5 발렌티노는 우아하면서 관능미가 느껴지는 서정적인 오트 쿠튀르 룩을 선보였다.
샤넬이 바로크 시대에, 디올이 18세기에 주목한 데 이어 발렌티노는 19세기의 로마로 회귀했다. 이번 시즌 발렌티노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예술에서 뿌리를 찾았고, 당대 화가와 시인에게 영감을 받아 매우 서정적인 아티스틱 룩을 완성했다. 캣워크에 제일 처음 등장한 우아한 실루엣의 화이트 튜닉은 영국의 유명 화가 알마 타데마의 1868년 작품 ‘The Siesta’에서 이름을 따왔다. 태피스트리 조각을 패치워크로 이은 스커트, 꽃과 식물의 모티브가 돋보이는 관능적 매력의 시스루 드레스, 새의 깃털을 연상시키는 풍성한 베스트와 코트, 골드 라메 소재에 진주와 파예트 장식을 더한 코트, 누드 컬러 오간자에 일일이 데이지꽃을 수놓은 드레스 등은 우아하고 정제된 매력으로 오트 쿠튀르의 진가를 드러냈다. 여기에 허리를 여러 번 감싼 가죽 벨트와 무릎 아래까지 올라오는 글래디에이터 슈즈를 매치, 로마의 여전사 같은 강인한 이미지를 더해 더욱 주목을 끌었다.
하나의 예술 작품 같은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 아티즈널 컬렉션의 오트 쿠튀르 룩
한편 빈티지한 재료를 새롭게 가공하고 구성해 웨어러블한 의상을 선보이는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아티즈널 컬렉션은 특별한 소재를 독창적으로 사용해 남다른 오트 쿠튀르를 완성했다. 오트 쿠튀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통적 하이엔드 재료 대신 독특한 취향의 수집가가 모은 골동품 같은 재료를 사용해 새로운 의상을 디자인한 것(실제 쇼의 피날레를 장식한 옷은 세계 곳곳의 플리 마켓과 프리이빗 옥션을 통해 구한 빈티지 패브릭을 콜라주처럼 엮어 만든 이브닝드레스다). 아틀리에의 장인들은 연금술사와 같이 이 재료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제각기 독보적 아름다움을 뽐내는 피스로 재탄생시켰는데, 이처럼 주변에 흔한 재료를 가장 값지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예술 기법인 브리콜라주(bricolage)는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오랜 특기다. 여기에 트롱푀유 효과와 해체적 구성 방식, 반대로 뒤집어놓은 다트와 심, 페인트가 튄 듯한 효과 등을 더해 화려한 장식적 디테일이 돋보이는 마르지엘라스러운 오트 쿠튀르를 완성했다. ‘I Love You’라는 문구를 큼직하게 새겨 넣고 크리스털 엠브로이더리 장식을 더한 백리스 뷔스티에, 반 고흐의 아이리스 자수를 넣은 시프트 드레스, 보머 재킷에 일본식 모티브를 더해 이브닝 재킷으로 변신시킨 유니크한 피스에서 브랜드 특유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장인정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대담한 커팅이 돋보인 베르사체의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룩
열정과 관능이라는 키워드로 축약할 수 있는 브랜드, 베르사체의 오트 쿠튀르 라인 아틀리에 베르사체는 이번 시즌 대담한 커팅과 자유로운 실루엣을 통해 미학적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냈다.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밝혔듯 1950년대 쿠튀르의 완벽한 커팅과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구성과 해체를 반복하며 새로운 테일러링을 선보였고, 천을 과감하게 제거하며 오트 쿠튀르를 현대적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런웨이에서 가장 돋보인 롱 슬릿 드레스는 한쪽 다리 전체를 시원하게 드러낸 도발적 커팅이 눈길을 끌었다. 무엇보다 둥그런 커브의 어깨와 가늘게 조인 허리가 대비를 이루는 건축적 실루엣의 재킷은 철저하게 계산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소재 역시 드라마틱한 효과를 연출하는 데 힘을 더했다. 스와로브스키가 이번 컬렉션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크리스털 메탈 메시와 함께 오간자 패치워크를 선보이는가 하면, 실리콘을 코팅한 실크 소재 등을 통해 글래머러스함을 표현했다.
완성도 높은 오트 쿠튀르를 만들기 위한 아르마니 공방 장인들의 작업 과정

강렬한 원색 컬러의 향연이 이어진 아르마니 프리베의 2014-2015년 F/W 오트 쿠튀르 컬렉션 룩
마지막으로 아르마니 프리베의 컬렉션은 ‘블랙 래커 박스에서 쏟아져 나온 레드 컬러의 향연’이라 표현할 수 있을 듯. 평소 블랙, 그레이, 네이비 등의 차분한 컬러를 선호한 아르마니가 이번엔 단순한 원색 컬러인 블랙, 화이트, 레드 컬러를 톤온톤으로 사용해 어느 때보다 강렬한 컬렉션을 완성했다. 케이프, 테일러드 재킷, 펜슬 스커트 등 아르마니 특유의 정갈하고 심플한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룩으로 시작해 점차 화려한 드레스 피스로 이어지며 컬렉션의 정점을 찍었다. 토르소를 감싼 거대한 리본 모양의 상의, 페이크 다이아몬드 스터드 장식을 더한 레드 비닐 스트랩의 코트, 화려한 도트 무늬 베일과 드레스 등은 모던아트적 실험정신을 물씬 풍겼다. 그뿐 아니라 이번 컬렉션에서는 아르마니가 1981년에 선보인 재퍼니즘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요소가 속속 눈에 띄었다. 파고다 숄더, 오리가미 효과, 가부키 스타일 컬러 등이 그 예. 하지만 앞서 말한 다양한 실험적 요소를 접목해 좀 더 미래적 분위기를 나타냈다.
이처럼 각 패션 하우스는 혁신적 소재의 사용, 특정 시대로의 회귀, 독보적 테일러링 기술, 하이엔드 터치를 가미한 디테일 등 개인기를 십분 발휘해 오트 쿠튀르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들의 도발적 창의성이 탄생시킬 마스터피스에 당신은 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에디터 이혜미 (hmlee@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