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냐 아니냐, 그것이 문제로다
올해로 61세를 맞이한 비디오게임이 예술의 심판대에 올랐다. 우리는 게임을 예술로 부를 수 있을까?

1 MoMA는 2000년에 첫 출시된 ‘심즈’를 소장했으며, 이 게임은 현재 ‘심즈 4’까지 출시되었다.
게임은 디자인이다
에디터에게 첫 게임은 ‘남극 탐험’(1985)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남극 탐험’ 룰은 매우 간단하다. 주인공 펭귄이 남극기지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피해 달리기만 하면 된다. 1980년대 게임이라 도트를 어떻게 찍었는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그래픽은 투박하지만, 파랑·하늘·하양·주황의 색 배합과 펭귄의 귀여운 뒤통수에 사로잡혀 다른 게임은 제쳐두고 슈퍼 패미컴의 컨트롤러로 남극만 달렸다(여담이지만, 슈퍼 패미컴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런던 과학 박물관 소장품 목록에 들어 있다). 어릴 때부터 멋지고 예쁜 것만 좋아한 탓도 있지만, 그 뒤로 게임을 선택할 때 영순위는 ‘그래픽’이었다. 소프트맥스의 ‘4LEAF’, ‘창세기전’, 손노리의 ‘악튜러스’, 넥슨의 ‘테일즈위버’, 플레잉 이틀 만에 엔딩을 본 남코의 ‘괴혼!: 굴려라 왕자님’ 등. 한데 그 기준은 금세 무너졌다. 그래픽이 마음에 들어도 스토리나 기획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 이상 플레이하는 게 곤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점점 그래픽, 스토리, 기획 삼박자를 두루 갖춘 게임에 손이 갔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손노리의 ‘화이트데이’(2001)로, 대략적 내용은 이러하다. 배경은 연두고등학교, 전학생 희민은 첫눈에 반한 소영에게 사탕을 주기 위해 밤 10시에 학교로 간다. 그런데 갑자기 정문이 잠기고 학교 수위가 호루라기를 불며 맹렬히 쫓아온다. 당시에 봐도 매끄럽지 못한 데다 3D 티가 너무 나서 그래픽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느새 일인칭 시점의 호러 게임에 푹 빠졌다. 한 가지 정확히 기억나는 건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는 수위 아저씨가 정말 무서웠다는 것이다. 왜 개인의 게임 이야기를 늘어놓나 싶겠지만, 요지는 따로 있다. 유저 입장에서 게임을 하다 보면 ‘이 게임, 그래픽 예술이다’라고 느낀 적은 있어도 막상 그래픽을 예술 작품 보듯 ‘감상’하진 않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실제 게임 유저는 예술적 관점으로 게임 그래픽을 천천히 뜯어보지 않는다. 아니, 플레이하기 바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래픽이 미끼가 될 수는 있어도 게임의 흥행을 결정하는 건 결국 기능, 스토리, 성취감, 유저와의 상호작용이다. 넥슨코리아 데브캣 스튜디오 정광구 배경 컨셉 아티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게임에서 그래픽은 언제나 보조 수단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픽만으로 성공한 게임은 드물다. 나 또한 게임 아티스트지만 비주얼을 우선순위로 두고 작업하지 않는다. 게임 기획, 시스템 방향과 맞지 않으면 비주얼 부분을 과감히 포기하거나 노선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 무조건 보기 좋은 비주얼을 뽑아내는 게 아니라 해당 게임의 세계관과 스토리에 맞는, 그리고 기술적 한계까지 고려한 게임 아트를 창작하는 게 중요하다.” 순수예술의 핵심은 ‘시각적 표현’에 있다. 게임의 유일한 시각적 요소인 ‘그래픽’이 막상 중요하지 않다고 설파한 에디터에 따르면 게임은 예술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게임을 디자인적 관점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 포인트다(앞선 인터뷰에서 파올라 안토넬리도 게임을 디자인으로 정의했다). 좋은 디자인이란 멋진 외관이 전부가 아니다. 사용자에게 윤택한 경험을 제공하는, 우리 삶의 모든 것이다. 그렇기에 잘 만든 게임은 완벽한 디자인이 될 수 있는데, 한 예로 뉴욕 현대미술관(이하 MoMA) 소장품 ‘심즈’(2000)를 들 수 있다. 인생 시뮬레이션 게임 ‘심즈’는 플레이어가 게임 속 인간 심(Sim)을 창조해 그들에게 행동을 지시하고 생활을 관찰하는 내용이다. 실사 같은 그래픽을 구현한 어드벤처 게임 ‘레드 데드 리뎀션 2’와 비교하면 최근에 출시된 ‘심즈 4’의 그래픽은 다소 딱딱하다. 그런데도 ‘심즈’가 디자인적으로 높이 평가 받는 건 플레이어가 게임에 존재하는 심의 세상과 교류하며 나와 다른 세계를 사는 인간 사회를 경험할 수 있어서다. 또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갖춘 심은 플레이어에게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을 지시받으면 완강히 거부한다. 플레이어와 게임 캐릭터 심이 사람 대 사람으로 상호작용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다른 게임과 달리 달성할 목표도 없기 때문에 원하는 방향으로 스토리를 만들면 된다. 어떤 방향으로든 사용자에게 색다른 경험을 제공하므로 ‘심즈’는 좋은 디자인이다.

2 하룬 파로츠키의 ‘평행 I’(2012).
게임은 제한된 예산 안에서 최고 결과물을 도출해야 한다. 게임 캐릭터 하나를 만드는 데도 기획, 스토리 구성, 비주얼 컨셉, 모델링, 게임 내 배치 등 각 분야의 전문가를 투입한다. 이는 정해진 예산 안에서 상품을 만들기 위해 기획, 제작, 모델링 등 담당자가 협업하는 디자인 시스템과 같다. 게임을 디자인의 한 장르로 보지 못하는 건 그래픽에 국한하기 때문이다. 좀 더 시야를 넓혀 기능적 면까지 살피면, 게임은 디자인이 될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그런고로 게임은 디자인이다.
게임은 예술이다
게임을 예술로 보기 위한 크고 작은 시도는 1990년대부터 있었다. 1989년 뉴욕 동영상 박물관의

3 랜덤 인터내셔널은 관람객과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주로 선보인다. 사진 속 작품은 ‘Audience’(2008~2019)로,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거울도 방향을 바꾼다.
본격적으로 논쟁이 시작된 시기는 MoMA가 비디오게임 14개를 컬렉션에 포함하겠다고 발표한 2012년이다. 아무리 현대미술 선구자인 MoMA라도 비디오게임을 예술로 정의한 행위는 용납하기 어려운 듯했다. 많은 예술계 인사가 분개했고, 지금도 여전히 비난하고 있다. 에디터는 이러한 태도가 게임을 ‘시각예술’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MoMA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MoMA뿐 아니라 게임을 컬렉팅한 미술관은 단지 멋진 그래픽을 이유로 들며 그 게임을 소장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스토리, 참신함 그리고 유저와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우수한지를 따졌다. 요즘 전시장에서 관람객이 몰리는 작품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관람객이 무언가를 조작하거나 신체 행동을 하면 작품이 반응하는 인터랙션 아트다. 스크린에 컬러 상자를 던지거나 쌓으면 화면에 몬스터가 등장하는 리즈닝 미디어의 ‘컬러몬스터가 사는 세상’은 작품을 체험하기 위해 줄이 늘어설 만큼 인기가 많다. 비가 오지만 젖지 않는 비현실적 공간,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의 ‘Rain Room’도 인터랙션 아트다. 관람객은 그냥 보기만 하는 전통적 감상 방식이 아닌 직접적 행동으로 ‘특별한 경험’을 얻는 작품을 선호한다. 그렇기에 게임은 더더욱 예술과 다를 바 없다. 왜냐? 플레이어가 있어야 작동하는 게임은 관람객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는 인터랙션 아트와 같기 때문이다.

4 육성 게임에서 아이디어를 착안해 작가 육성 게임을 제작한 황문정의 ‘그레이트 아티스트 메이커’(2019).
5 실사와 비슷한 디지털 그래픽을 구현한 게임 ‘파이널 판타지’.
한편에서는 미술대학 학생들이 게임 아트 쪽으로 빠지는 바람에 예술계 인재를 잃는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미술 대학의 현실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우선, 순수 미술을 전공한 모든 학생이 작가를 희망하는 건 아니다. 과연 게임 아티스트가 되기 위해 미술대학에 진학한 학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현존하는 최고 게임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게임 ‘파이널 판타지 Ⅳ’ 캐릭터 디자이너 노무라 데쓰야(Tetsuya Nomura)도 고등학교 미술 선생이 보여준 게임 일러스트를 보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학습, 게임 회사 스퀘어에 입사했다. 두 번째는 현실적인 이유다. 미술대학 학생 대부분 졸업할 무렵이면 전업 작가의 길을 두고 고민한다. ‘한 학번에 작가 한 명이 나오면 성공’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돌 만큼 전업 작가로 성공하는 경우의 수는 지극히 낮다. 반면 상업 아트는 순수예술에 비해 수요가 활발하고 직업적으로도 비교적 안정적이다. 따라서 작가를 원하는 학생은 작가의 길을 걷고, 작업에 미련 없는 학생은 다른 길을 찾아 떠나는 건 게임 아트가 부상하기 전부터 있던 미술대학의 풍습이다. 즉 게임 아트가 활발해졌다고 해서 순수 작가의 절대 수가 줄어드는 건 아니며, 설사 줄어든다 해도 그 이유가 게임에 있다고 귀결해선 안 된다. 사실 에디터는 ‘게임은 예술인가’라는 문장을 보고 또다시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사운드 아트, 무용은 퍼포먼스, 영화는 미디어 아트, 만화는 팝아트 형태로 순수예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게임은 입성하기는커녕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왜 게임만 구설수에 오르는지 납득은 간다. 국가부터 게임에 호의적이지 않다. 셧다운, PC 온라인 월 결제 한도 등 게임 관련 법은 규제 위주다. 언론도 마찬가지로 ‘범죄로 이어진 게임 중독’, ‘게임 중독은 마약 중독과 다름없다’, ‘백해무익한 게임’ 같은 기사 헤드라인을 자주 송출한다. 심지어 지난 6월, 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 중독을 ‘게임 사용 장애(Gaming Disorder)’라는 질병으로 분류해 게임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강화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게임만 논란인 건 게임 자체가 유익하지 않아서일까?

6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 설치된 야스거 욘의 관객 참여형 작품 ‘삼면축구’.
7 토마스 빌레멘의 ‘How to Make a Primitive Hut in Minecraft’(2019)는 작가가 게임 ‘마인크래프트’로 여행을 떠나 컴퓨터 코드로 만들어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작업이다.
지난해 한국 전체 콘텐츠 수출에서 게임 산업이 차지한 비율은 57%였다. 액수로 따지면 최소 5조원. 순수예술이 예술로 인정한 음악과 영화, 기타 콘텐츠를 모두 합쳐도 게임 산업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게다가 7년째 부동의 1위, 7년째 가파른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높은 해외 수출률은 그만큼 한국 게임 콘텐츠가 양과 질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걸 방증한다. 회화부터 사운드 아트까지, 순수예술의 범위가 폭넓듯 게임도 롤플레잉, 에듀케이션, 아케이드 등 베리에이션이 매우 넓다. 특히 게임은 어린이 교육에서 탁월한 기능을 발휘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블루메미술관 등 미술 쪽에도 어린이 교육을 진행할 때 게임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 즉 앞서 말한 게임이 백해무익하다는 주장은 타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순수예술은 고급문화고 게임은 하위문화라서? 세상 어디에도 문화를 계급으로 나누는 명확한 기준은 없기에 이 또한 비논리적이다. 많은 평론가와 예술계 종사자는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그들의 넓은 아량은 게임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다. 되레 MoMA가 게임을 영구 소장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MoMA의 시대착오적 선택”, “피카소와 반 고흐 사이에 ‘팩맨’과 ‘테트리스’를 전시하는 건 예술을 향한 진정한 이해의 종언”, “체스를 잘 두는 사람은 체스 챔피언일 뿐 예술가는 아니다”라는 둥 혹평을 퍼부었다. 특히 “피카소와 반 고흐 사이에 ‘팩맨’과 ‘테트리스’를 전시하는 건 예술을 향한 진정한 이해의 종언”이라는 말에는 피카소와 반 고흐는 고급, ‘팩맨’과 ‘테트리스’는 하위문화로 본다는 시선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한데 그가 예로 든 반 고흐는 살아생전 당대 예술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다. 그보다 조금 앞서 활동한 마네도 ‘풀밭 위 점심 식사’를 공개하자마자 “이건 예술이 아니다”라며 온갖 비난을 받았다. 파리 부르주아들이 자꾸 삿대질하는 바람에 그들이 들고 다니는 지팡이를 뻗어도 닿지 않는 곳에 그림을 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인상주의 대가로 평가받기 시작한 두 작가처럼 ‘팩맨’과 ‘테트리스’도 100년 후 예술적 위상이 어디쯤 있을지 모를 일이다. ‘종언’은 정말 섣부른 판단일 수밖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술 작품을 보는 관점도 시시각각 달라진다.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 논하려면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필요하다. 마네, 세잔, 피카소, 뒤샹, 자코메티가 세기의 작가라 칭송받는 이유는 모두 전에 없던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술은 모든 걸 포용하는 열린 장르다. 지금, 누군가에게는 피카소 작품 옆에 게임을 전시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머지않아 자연스러운 풍경이 될 수 있다. 계속 변화하는 아트 신에서 당연히 게임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