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라는 이름이 허락한 것
올 하반기 뉴욕에서 아시아 현대미술을 주목한 대규모 전시가 열리고 있다. 미술계 안팎에서 뉴요커의 관심과 비판을 동시에 받고 있는 이 전시의 속사정을 들여다본다.

천전(Chen Zhen)의 ‘Fu Dao/Fu Dao, Upside-Down Buddha/Arrival at Good Fortune’(1997년).
지난 10월 6일부터 내년 1월 7일까지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선 <1989년 이후의 예술과 중국: 세계라는 극장(Art and China after 1989: Theater of the World)>전이 열린다. 아이웨이웨이, 차이궈창, 황융핑 등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71명(팀)의 작품 약 150점을 소개하는 이 전시는 천안문 사태가 발발한 1989년부터 베이징 올림픽이 열린 2008년까지 중국 현대미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냉전 종식 후 세계화와 함께 중국이 국제 무대 한복판에 등장하면서, 당시 중국 예술가들은 대담한 예술적 실험으로 당시 사회적 변화를 예견하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전시는 현재 이들이 현대미술사의 문맥에 맞는 독보적 위치를 확보했음을 보여준다. 전시를 공동 기획한 알렉산드라 먼로(Alexandra Munroe)는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도발적인 작품을 선보이며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현실을 추구하고 집단에서 분리된 개인성을 확립했다. 또한 현대 중국의 경험을 보편적 언어로 정의하려고 노력했다”라고 말하며 전시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1 자오반디(Zhao Bandi)의 ‘Young Bandi’(1992년).
2 문제가 된 황융핑의 작품 ‘세계라는 극장’.
3 차오페이(Cao Fei)의 ‘RMB City: A Second Life City Planning by China Tracy (Aka: Cao Fei)’(2007년).
이 전시는 오픈 전부터 미국에서 열린 중국 현대미술 관련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로 많은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정작 전시를 며칠 앞두고는 큰 논란에 휩싸였다. 전시 작품의 일부가 동물을 학대한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다. 문제가 된 작품은 총 3점이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황융핑의 ‘세계라는 극장(Theater of the World)’은 반원형 구조물 안에 파충류와 곤충이 함께 머물게 해 전시 동안 서로 먹고 먹힐 수밖에 없는 상황을 설정한 작품이다. 작가는 작품이 세계화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를 보여준다고 말하지만, 그렇다 해도 동물이 계속 죽어나가는 건 잔인하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다른 작품은 쑨위안과 펑위가 2003년에 진행한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 ‘서로 접촉할 수 없는 개들(Dogs that Cannot Touch Each Other)’로, 투견 네 쌍이 러닝머신에 묶인 채 눈앞의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미친 듯이 달리는 장면을 담았다. 영문·한문과 유사한 문자를 몸에 잔뜩 그려 넣은 돼지 두 마리가 교미하는 모습을 담은 쉬빙의 ‘사례의 전환 연구(A Case Study of Transference)’ 역시 쏟아지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전시 기간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죽어가는 동물을 내버려두는 것은 명백한 동물 학대라고 주장했다. 아무리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예술 작품이라 할지라도 동물 학대는 용납될 수 없다고 말이다.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 같은 대규모 기관이 이런 작품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의 이름으로 동물 학대를 일삼는 예술가에게 면죄부를 주는 처사다. 사실 황융핑의 예와 같은 작품은 이미 2007년 캐나다 밴쿠버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 직전에 철수된 바 있다. 알렉산드라 먼로도 아트넷과의 인터뷰에서 마치 논란을 예상한 듯 “이 작가들이 경험한 시대 자체가 매우 잔혹했다. 다소 보기 불편한 작품이 있더라도 작가의 의도를 잘 살펴봐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4, 5 <1989년 이후의 예술과 중국: 세계라는 극장> 전시 전경.
그러나 대중의 반감은 예상보다 거셌다. 전시가 열리기도 전에 60만 명 이상이 작품을 철수해야 한다는 인터넷 청원에 서명했다. 결국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은 세 작품을 전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협박을 받았기 때문에 작가나 스태프,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언급과 함께 말이다. 미술관의 이런 결정에 동물 애호가는 환호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미술관이 폭력의 위협에 굴복해 작품을 철수하는 선례를 남겼고,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지키지 못했다는 것. 아이웨이웨이는 “예술 작품을 전시에서 철수하도록 압박을 가하는 것은 동물의 권리뿐 아니라 인간의 권리에 대한 편협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번 논쟁은 사실 다양한 문제를 제기한다. 과연 다른 동물이 처한 환경에 비해 전시에 포함된 동물이 유독 심각하게 학대당한 것이 사실인가? 현재 미국의 윤리의식을 과거 중국의 예술 작품에 적용하는 것이 정당한가? 예술 작품에서 생명체를 다룰 때 과연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하는가? 하지만 단지 충격적인 효과만 노리고 예술이란 명목으로 생명체를 희생시키는 작가 또한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쟁에 대처하는 큐레이터나 미술관의 올바른 자세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점이 고개를 든다. 진작 이러한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할 기회가 있었다면 이번 전시도 예술계에 걸맞은 윤리 기준을 도출하는 사례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문화에 대한 보다 유연한 태도를 견지하며 표현의 자유를 지켜내는 최선의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의 결정이 아쉬움으로 남은 이유다.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글 황진영(Jin Coleman Art Advisory 대표) 사진 제공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