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삶에 말 걸어올 때
정경화와 정명훈, 김성령까지 곳곳에서 우리 시대 거장의 무대가 펼쳐진다

위쪽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 공연, 콘서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와 함께 국내 무대에 돌아올 지휘자 정명훈.
아래쪽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협연해 모차르트, 베토벤, 프랑크 바이올린소나타 무대를 선보일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혜성처럼 등장한 젊은 예술가들의 반짝이는 테크닉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예술에서 화려함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우리 예술가의 콩쿠르 수상 소식에 기쁘다가도, 그에 비해 롱런하는 예술가가 적은 현실에 여전히 아쉬움이 짙으니 말이다. 단숨에 반짝이기보다 오래도록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예술가의 발자취를 좇는 것이야말로 ‘클래식’의 예술적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무용의 경우 무대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수명이 극히 짧지만, 음악과 극은 연륜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색깔이 두드러지는 장르다. 나이를 먹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감정이 있고, 결코 가 닿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나 숱한 연습 끝에 절정에 이르는 장면이 있으며,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리우는 오라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미스터치마저 예술적인 노장의 연주를 들으러 콘서트홀로 향하고, 화려함이라곤 일체 걷어낸 소박한 배우의 연기를 만나러 소극장을 찾는다.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전례 없는 역사를 쓴 여성 예술가이자 그 시절 ‘정트리오’로 국가적 자부심 그 자체였던 정경화가 9월 6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연다. 이미 2000년대 초반 손가락 부상으로 활을 놓았다가 9년 만에 복귀한 그녀는 칠순을 넘긴 지금도 날렵하고 섬뜩한 현의 선율을 들려준다. 이번 리사이틀은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함께할 예정. 음악적 이상향을 함께해온 케빈 케너(Kevin Kenner), 일찍이 재능을 알아본 조성진, 이제는 지휘자로 발돋움한 김선욱을 비롯해 여러 피아니스트와 호흡을 맞췄으나 그 역시 영재로 이름을 날린 임동혁과는 첫 듀오 무대다. 스스로 지금을 연주 인생 3막이라고 일컫는 정경화 특유의 익숙함에 천착하지 않는 도전정신이 엿보인다.
3곡의 프로그램도 주목할 만하다. 죽음을 경험하고 우수와 슬픔이 깃든 모차르트 바이올린소나타 21번과 상당한 테크닉을 보여주는 베토벤 바이올린소나타 9번, 그리고 프랑크 바이올린소나타 A장조를 차례로 배치해 악기의 다채로운 화음과 음색을 들려준다. 칠순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도 여전히 명동대성당에서 사람들과 눈 맞추며 연주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그래도, 사랑’, ‘그래도, 희망’ 같은 제목으로 사람과 사랑에 꾸준히 헌정해온 정경화. 여전히 그녀가 현역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눈과 귀로 확인하는 무대가 될 것이다.
한편 누님의 행보를 따르기라도 하듯, 10월 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선 마에스트로 정명훈이 이끄는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가 펼쳐진다. 이 무대는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첫 내한 공연으로도 화제를 모으지만, 바스티유 오페라 음악감독 시절을 비롯해 오페라 지휘로도 이름을 알린 정명훈이 오랜만에 콘서트홀이 아닌 오페라극장 포디엄에 오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탈리아 오페라가 세계 무대로 발돋움하게 한 베르디의 작품을,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뿌리를 둔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듣는 경험은 어떨까. 또 한국의 성악가들과 정명훈, 오케스트라가 삼각으로 만들어낼 합이 궁금해진다. 오페라 초심자에게도 익숙한 작품이니만큼 이번엔 시각적 연출보다는 음악적 연출이 돋보이는 ‘콘서트 오페라’로 즐겨보는 건 어떨까.
연극 무대에서 내려와 매체 연기에 도전하거나, 활발한 방송 활동 중에도 고전 무대에 복귀하는 등 미디어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배우의 활동 영역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 나이 혹은 경력과 관계없이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 하면 배우, 국악인, 예술감독, 교수, 가수 등 숱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김성녀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된다. 옛 세대에게는 ‘마당놀이의 대모’로 잘 알려진 그녀의 다채로운 인생사는 너른 ‘판’에서 시작, 무대를 거쳐 스마트폰 속 작은 스크린에 다다른 우리 공연 예술사와 꼭 닮았다.
김성녀는 빼어난 외모와 실력으로 1950~1960년대 여성 국극 스타였던 박옥진의 딸로 태어나 불과 다섯 살 때부터 천막 극장 무대에 올랐다. “예인은 고생길”이라며 말린 모친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청춘을 마당에서 보냈고, ‘고생길’을 자청했다. 게다가 연극계에서는 연극이 아니라고, 국악계에서는 국악이 아니라고 배척하던 마당놀이를 모진 세월을 견디며 30년간 이어왔다. 그것이 ‘장르’가 아니면 어떠랴. 사람들은 높은 무대에 오른 예술이 아니라 시선이 아래로 향하는 마당놀이 판에서 울고 웃고 배꼽 잡으며 예술로 위로를 받았다. 극단 민예극장의 배우로, 국립창극단의 예인으로, 국립극단의 배우로… 그렇게 TV 드라마, 연극, 마당놀이를 넘나들고 이후에는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학장으로,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한 김성녀가 오랜만에 오직 자신만이 가능한 무대,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을 재공연한다.
그녀의 남편이자 극단 미추 대표인 연출가 손진책이 2005년 결혼기념일 선물로 김성녀에게 헌정한 〈벽 속의 요정〉은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과 전쟁 이후를 관통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페인 내전을 토대로 한 후쿠다 요시유키의 원작을 우리 시대 극작가 배삼식이 각색했고, 손진책이 연출했다. 배우는 단 한 사람, 김성녀뿐이다. 그녀는 홀로 32역을 소화하며 어린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연령과 성별, 캐릭터를 넘나든다. 초연 이후 공연을 거듭하며 배우의 삶만큼 무대 위 삶도 무르익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예술과 우리 삶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공연은 10월 31일부터 11월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에디터 정규영(ky.chung@noblesse.com)
글 김태희
공연 김태희(공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