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흐르는 집
프레스코와 돔형 천장 그리고 바닥의 대리석 타일까지 로마 전성기 건축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성에 가장 현대적인 예술 작품이 스며들었다. 시간의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컨템퍼러리 아트워크 하우스로의 초대.

1 정원을 바라다보는 창문 앞에 놓여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이탈리아 예술가 줄리오 파올리니(Giulio Paolini)의 조각상 ‘Mimesi’ 한 쌍이다. 2 돔형 천장과 아치형 창문이 인상적인 거실. 보라색 소파 옆에 놓인 브론즈 의자는 미셀 오카 도너(Michele Oka Doner), 오른쪽 벽면에 걸린 부조는 스위스 아티스트 파비앙 마르티(Fabian Marti)의 작품. 3 창문 유리는 빛의 예술가 마시모 바르톨리니(Massimo Bartolini)의 터치가 더해져 실내로 들어오는 빛을 한층 특별하게 해준다.
이탈리아 로마 중심가에 1500년대에 지은 팔라초(Palazzo). 이전에는 어느 귀족의 성이었지만 지금은 보존 가치가 높은 유산이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주거지다. 로마를 대표하는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과 불과 몇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것을 보면 이 팔라초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지 짐작할 수 있을 터. 이곳 1층에 살고 있는 아트 컬렉터 부부는 1980년대 중반에 일찌감치 이 집의 진가를 알아봤다. 면적이 300㎡에 달하는 이 집은 오랜 전통이 깃든 유서 깊은 귀족의 저택처럼 곳곳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테라코타, 프레스코화가 보존된 방과 우드를 조각해 예술적으로 마감한 천장, 특히 구약성서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천장화는 그 자체로 로마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거실의 커다란 아치형 유리창은 바깥 풍경을 실내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데, 중정의 오래된 나무와 아이비 덩굴이 건물과 창문을 뒤덮는 봄이면 실내는 마치 비밀의 화원처럼 신비로운 느낌마저 감돈다.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의 작품과 1950년대 제작한 프랑스 콘솔을 매치한 서재 코너.
시간이 그대로 정지된 듯한 이곳에서 코너를 돌 때마다 마주하는 것은 동시대 예술가의 작품. 가장 현대적인 아트워크가 르네상스 시기에 지은 귀족의 성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었다. “우리 부부가 로마에 왔을 때가 1980년대 중반이었어요. 그때 저는 혈기 왕성했고 컨템퍼러리 아트에 대한 욕망과 호기심이 들끓었죠.” 그들은 각자 공증인과 변호사로서 입지를 다지고 성공 가도를 달리며 컨템퍼러리 아트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컬렉션을 발전시켜왔다. 회화와 사진, 조각과 설치미술 등 예술 장르 전반에 대한 인지도가 높은 남편과 컬러, 디자인에 대한 독특한 취향과 본능적 열정을 지닌 아내의 만남은 컬렉션의 스펙트럼을 넓혀가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의 컬렉션이 이 집에 안착하기까지 수십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말한다. “처음 개조를 시작하면서 집의 구조를 바꾸기보다 디테일을 보존하고 원상태를 복원하는 것에 초점을 두었어요. 이 집은 시에서 보호, 관리하는 문화재라 벽면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도 했고, 프레스코화는 아무나 복원할 수 없는 매우 섬세한 작품이기 때문이죠.” 집의 원형을 고수하기 위해 인테리어 컨셉을 클래식 스타일로 잡았고 이를 중심으로 가구와 그림을 새로 구입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했다. “무언가 크게 훼손된 느낌이었어요. 클래식한 가구, 고전 회화와 조각 작품을 모든 방에 배치했음에도 고유의 생명력을 잃은 것 같았어요. 오히려 아무것도 없을 때보다 못한 분위기였죠.” 나름 아트 컬렉션에 대한 안목을 키웠다 자부했지만 이를 공간에 매치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작업이라는 걸 깨달았다. 첫 인테리어의 실패를 딛고 부부는 컨템퍼러리 아트 컬렉션을 다시 시작했다.

4 벽면에 걸린 거대한 팝아트는 영국 아티스트 듀오 길버트 & 조지(Gilbert & George)의 작품, 그 앞의 조각은 네덜란드 조각가 마르크 만더르스(Mark Manders)의 작품이다. 5 다이닝룸은 빈티지와 모던 디자인사에 빛나는 거장의 가구를 매치했다. 빈티지 원형 테이블과 매치한 의자는 아킬레 카스티글리오니(Achille Castiglioni), 벽에 건 태피스트리는 윌리엄 켄트리지의 작품.
그들은 지노 데 도미니치스(Gino de Dominicis), 마우리치오 펠레그린(Maurizio Pellegrin), 스티븐 패리노(Steven Parrino) 등 당시 많이 회자되지 않던 작가에게 주목했다. “처음에는 친구가 비웃었어요. 작가의 지명도는 차치하더라도 작품 자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이죠.” 그러나 그들의 컬렉션은 몇 해 지나지 않아 진가를 드러냈다. 거대한 스켈레톤 설치 작품으로 유명한 로마 출신 아티스트 지노 데 도미니치스의 설치, 조각 작품은 작가의 위상과 함께 놀랄 만큼 가치가 상승했다. 독일의 신표현주의 화가이자 조각가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는 요제프 보이스 이후 최고의 독일 작가라는 평가와 함께 미술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나무와 숲을 매개로 인간의 몸과 정체성에 대한 탐구를 이어가는 이탈리아 작가 주세페 페노네(Giuseppe Penone)의 작품성도 진작에 알아봤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아티스트로 판화, 드로잉, 동영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시각 작품을 선보이는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 영국 영화감독이자 사진가 샘 테일러 우드(Sam Taylor-Wood) 그리고 독일의 시각예술가 볼프강 라이프(Wolfgang Laib)도 부부의 컬렉션에 중요한 존재로 자리한다. 그들의 품에 안긴 예술 작품은 16세기 고성에 입성하며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에 이르렀다.

바닥과 천장, 프레스코 모두 16세기 건축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메인 홀. 벽면에 걸린 드로잉은 이탈리아 현대 화가 지노 데 도미니치스의 작품이다.

서재 천장에는 500년이 넘은 우드 패널 마감과 프레스코화가 보존되어 있다.
서로 다른 장르의 작품은 그만의 개성이 돋보이지만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죠. 미술관 같은 집은 추구하지 않습니다. 본능에 충실한 컬렉션도 중요하지만 목표와 맥락을 갖고 유기적으로 작품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죠. 그림이나 조형 작품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 중점을 뒀어요.” 아트 컬렉터로서 열정이 남다른 남편은 이들 작품을 토대로 본격적인 인테리어 작업에 몰두했다. “남편의 아트 컬렉션은 그만의 취향과 로직을 갖고 있어요. 저는 그 논리를 파악하고 모든 작품을 받쳐 줄 수 있는 패브릭과 소품을 공수했어요. 패브릭은 모노크롬 컬러로 연출하고 램프는 1950년대 베네치아 무라노 크리스털 빈티지, 가구 역시 같은 시기의 빈티지 가구를 구하거나 맞춤 가구를 제작했죠.” 작품 수집에 관한 그들만의 로직을 확립한 후에도 인테리어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방 하나하나 벽면의 색상을 복원하고 아트 피스의 가치를 지닌 가구를 배치하면서 비례와 조화미를 추구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사람에게 공개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완성도를 갖췄다고 자부한다. “이 집에서 벽과 천장, 바닥, 창문을 뺀 나머지는 늘 유동적이에요. 시간이 흘러 예술 작품과 작가에 대해 느끼는 감성과 생각이 달라지면 이를 새롭게 풀어내고 싶은 열정이 샘솟겠죠. 작품의 위치를 바꾸고 이것과 저것을 조화시키는 과정은 조각가가 돌을 매끄럽게 다듬는 것과 비슷해요. 완벽하지 않은 부분을 다듬고 수정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고 있어요. 이것이 곧 우리가 예술을 향유하는 방법입니다.”

6 이탈리아 앤티크 콘솔과 같은 색감의 사진 작품을 조화시킨 메인 홀 입구 복도. 7 채색화로 장식한 천장 서까래와 벽화 일부가 남아 있는 침실.
에디터 김윤영(snob@noblesse.com)
사진 필리포 밤베르기(Filippo Bamberghi) 글 이정민, 야카란다 카라촐로 팔크(Jacaranda Caracciolo F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