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과 새것의 교차점
고미술과 동시대 미술의 안목을 두루 갖춘 학고재. 이들의 30년 역사가 녹아 있는 숨은 공간을 방문했다.

강요배의 ‘연풍’과 조선시대 고가구를 함께 배치한 신관 응접실.
현대적 건물이 늘어선 삼청동 갤러리 거리에 한옥 한 채가 자리를 틀고 앉아 있다. 서양식 고층 건물들 사이에 유일한 단층 구조의 한옥이지만 처마 끝에 이용백 작가의 ‘피에타’가 있는 걸 보니 갤러리가 확실하다. 배울 학(學), 옛 고(古), 재계할 재(齋). 옛것을 배워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창조할 수 있다는 온고이지신 정신에 기반한 학고재다. 1988년 서울에 문을 연 후 2008년 인사동에서 삼청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신관을 오픈 하였으며, 2018년에는 강남구에 학고재청담을 열었다. 다채로운 공간으로 이루어진 만큼 작가의 폭도 넓다. 내력 있는 본관과 신관에서는 그간 강요배, 김현식, 백남준, 이용백, 윤석남 등 세계적인 한국 거장과 팡리쥔, 마류밍 같은 해외 작가를 소개했고, 개관 1주년을 맞이한 학고재청담에서는 이제 주목받기 시작한 국내외 라이징 스타와 비교적 한국에 덜 알려진 해외 작가의 전시가 열린다. 꾸준함과 새로움을 두루 갖춘 학고재를 오래 지켜본 VIP는 이곳의 시크릿 스페이스를 ‘편안하다’라고 정의한다. 소품을 대하는 태도 하나에도 자연스러움과 옛것의 멋을 중시하는 학고재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 탁자 위에 있는 책 한 권도, 서예실에 놓인 종이 한 장도 각 맞춰 정리하지 않고 자연스레 툭 올려놓았다. 학고재의 역사와 함께했다는 이유로 가구도 쉽게 바꾸지 않는다. 무엇 하나 쉬이 대하지 않기에, 학고재는 고객보다는 사람 대 사람으로 VIP와 진실하게 마주한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학고재 VIP 룸에서는 작품 컬렉팅을 논하기가 왠지 더 쉽게 느껴진다. 이들의 비밀스러운 공간은 학고재와 학고재의 사람들이 쌓아온 30년 인연이 녹아 있는 역사의 산실이다.

신관 응접실
VIP와 작가의 만남, 컬렉터의 작품 감상이 주로 이루어지는 신관 응접실은 매우 안락하다. 학고재 우찬규 대표가 즐겨 읽는 책, VIP와 공유하고픈 도록 그리고 중국에서 힘들게 구한 고서가 탁자 위에 불규칙하게 놓여 있어 집 같은 편안함마저 감돈다. 여러 갤러리와 마찬가지로 앞으로 전시할 작가의 작품을 프리뷰처럼 보여주기도 하지만, 학고재의 차별성은 ‘손님 맞춤’에 있다. 일례로, 미니멀한 추상 작품을 눈여겨보는 손님이 방문한다면 학고재청담에서 개인전을 연 토마스 샤이비츠(Thomas Scheibitz)의 작품 중 VIP를 위해 따로 준비한 미공개 그림을 걸어놓는 방식이다. 작품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 아니기에, 오롯이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VIP의 취향에 신관 응접실의 작품을 맞추는 만큼 본전시보다 작품 교체 주기가 잦다고 한다. 학고재의 온고이지신 정신은 신관 응접실에도 녹아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가죽 소파는 인사동 시절부터 함께한 것으로 학고재의 30년 역사가 깃들어 있다. “갤러리의 주인공은 아트 퍼니처가 아닌 ‘작품’이기에 작품에 더 신경 쓰고 있다”라는 학고재 관계자의 말처럼, 작품이 자주 바뀌는 대신 가구는 그대로 두어 공간의 밸런스를 맞추고 있다. 방문하는 VIP를 위해 맞춤형 상설전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학고재 신관 응접실은 오직 ‘사람’과 ‘작품’ 둘만의 시간에 초점을 둔다.

차실
학고재 대표가 매일 아침 붓글씨를 쓰고 차를 마시는 공간이다. 탁자 위에는 대표의 손때가 묻은 먹과 벼루 그리고 문진에 눌린 화선지가 빳빳하게 깔려 있고, 벽에는 다양한 털과 모양새의 모필이 걸려 있다. 두 층을 잇는 계단에는 대표가 직접 수집한 먹, 벼루, 고서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하나하나가 진귀해 수집품만 구경하는 데도 시간이 훌쩍 간다.
차실은 대표와 손님이 함께 차를 마시는 공간으로 동양의 다도법에 따라 주로 인삼차나 녹차를 내어준다. 차실 유리문을 열면 보이는 작은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조경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바람에 날아온 씨가 싹을 틔우고, 햇빛을 받고, 비를 맞으며 자연의 섭리에 따라 성장하도록 지켜보고 있습니다. 학고재는 무엇이든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요”라며 학고재의 철학은 자연스러움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차실 안에서 정원 쪽을 바라보고 앉으면 정원 너머로 경복궁과 민속박물관이 보인다. 마치 경복궁을 앞마당으로 둔 것처럼 그 전경이 한눈에 담긴다. 그래서일까? 차실은 해외에서 온 손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이곳에 앉아 지극히 자연스러운 정원과 경복궁을 보고 있으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본관 응접실
학고재 본관의 숨은 문을 열고 돌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본관 응접실은 비밀 정원에 들어가는 기분을 자아내 들어가는 길목부터 설렌다. 학고재 이사가 손님을 맞이하고 차를 마시는 장소로, 공간이 클 필요 없다는 주인의 의견에 따라 작지만 알차게 구성했다. 견고한 나무로 짠 원목 가구가 알맞게 들어와 있어 따스한 느낌을 자아내고, 한쪽 벽에는 황란 작가의 ‘Healing Temple’을 걸어 공간에 리듬감을 더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다기는 중국에서 공수한 제품이거나 한국 장인의 것으로, 소품 하나에서도 학고재의 예술적 안목을 확인할 수 있다. 블라인드를 올리면 인왕산과 경복궁 전경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특히 봄가을이 되면 장관이 펼쳐진다. 작품보다는 사교와 대화에 초점을 맞춘 본관 응접실.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 대화를 나누고, 조선이 남긴 문화유산을 즐길 수 있는 이 공간은 살롱 문화를 즐기기에 완벽한 조건을 갖췄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김잔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