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입니다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좁스키가 7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 그에겐 언제나 ‘건반 위의 불곰’, ‘괴력의 러시아인’이란 무시무시한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는 더없이 상냥하고 섬세한 피아니스트였다.

ⓒBogomaz Jury
당대 최고의 비르투오소(virtuoso, 기교가 탁월한 연주자)로 평가받는 피아니스트 보리스 베레좁스키(Boris Berezovsky)가 5월 16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리사이틀을 펼친다. 그는 베를린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 등 유명 오케스트라의 협연자로 정기적으로 출연 중이며, 독주자로서도 세계 각국의 리사이틀 시리즈와 음악 축제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내한 때마다 폭발적 연주로 화제를 모은 그는 특히 2009년 공연 당시 강한 타건으로 피아노 줄이 끊어진 일화로도 유명하다. 이번 공연에선 피아노계의 3대 난곡으로 평가받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를 통해 압도적인 테크닉을 선보이는 것은 물론, 프레데리크 쇼팽의 즉흥곡과 도메니코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로 섬세한 연주를 들려줄 예정. 내한에 앞서 그에게 이번 공연의 특징과 그간의 다양한 활동, 피아니스트로서 연주 철학에 관해 물었다.
7년 만의 내한입니다. 원래 지난해에 리사이틀이 잡혀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취소됐죠. 그런 만큼 소감이 남다르실 것 같은데요. (한국이) 정말 그리웠습니다.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고, 지난 수차례의 연주에서 열정적인 클래식 관객 덕분에 진짜 즐거웠거든요. 또 재능 있는 젊은 연주자가 많은 것도 흥미롭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다시 방문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5월 16일에 열리는 서울 리사이틀에선 쇼팽의 곡을 시작으로 스카를라티의 피아노 소나타, 마지막으로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를 연주할 예정입니다. 어떤 흐름을 생각하며 레퍼토리를 구성했나요? 저는 레퍼토리를 구성할 때 ‘다양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서울 공연의 레퍼토리도 이 점을 고려했죠. 우선 많은 관객에게 익숙한 쇼팽의 곡을 연주할 겁니다. 그리고 스카를라티와 스트라빈스키의 곡을 연달아 선보이려 하죠. 둘은 서로 다른 스타일을 지니고 있어요. 이들의 조화를 지켜보는 것도 관객에게 흥미로운 경험이 될 겁니다.
스카를라티와 스트라빈스키가 서로 스타일이 다르다고 하셨는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주세요. 일단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스카를라티는 ‘고전적(classical)’이고, 러시아 근대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는 ‘신고전주의적(neoclassical)’이란 차이가 있죠. 그런데 한편으론 둘이 비슷한 면도 있습니다. 제 생각에 스카를라티의 곡은 민속음악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엔 러시아의 민속 선율이 자주 등장합니다. ‘페트루시카’도 마찬가지고요.
민속음악에 빠져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당신은 2015년부터 뮤직 오브 더 어스(Music of the Earth) 페스티벌의 예술감독을 맡아 클래식과 민속음악을 한 무대에 올리고 있잖아요. 민속음악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다른 것 같습니다. 오래전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갔을 때 우연히 몇몇 악사가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 좋았습니다. 뭐라고 콕 집어 설명할 순 없지만, 저는 민속음악이 음악의 본질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따지고 보면 클래식 음악도 민속음악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죠.

2009년 내한 공연 당시 모습
ⓒChang Young Soo
연주자로 활동하는 것 외에 감독 활동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뮤직 오브 더 어스 페스티벌뿐 아니라,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메트너 페스티벌(Medtner Festival), 2013년부터는 프랑스의 피아노스코프 뮤직 페스티벌(Pianoscope Beauvais)의 예술감독으로도 활약하고 계십니다. 제가 원하는 음악, 예술가와 게스트를 선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부분이 제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죠. 예를 들어, 피아노스코프 뮤직 페스티벌의 감독을 맡으면서 클래식 음악과 전통음악을 연결하는 데 중점을 둘 수 있었어요. 이처럼 제가 소개하고 싶은 음악을 많은 사람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재작년엔 제1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 심사위원을 맡았는데, 오래전 당신이 우승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콩쿠르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오른 무대에서 젊은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걸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우선 젊은 연주자들에 대한 질투심을 억눌러야 했습니다.(웃음) 제15회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아주 성공적이었고, 우승자는 물론 다른 수상자들의 결과에 대해서도 기쁘게 생각합니다. 물론 심사위원을 하면서, 제가 이 무대에 올랐을 때가 떠오르기도 했죠. 잊을 수 없는 순간이고, 제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로 인해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연주 기회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요. 지난 차이콥스키 콩쿠르 수상자들 역시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콩쿠르 우승만이 본인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네요.
당신 같은 대가에게도 처음이란 게 있겠죠. 피아노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어릴 적 부모님의 권유로 피아노를 시작했습니다. 부모님은 제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셨거든요. 처음엔 여러 악기를 배웠지만, 저는 그중에서 피아노를 선택했습니다. 너무 어릴 때라 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부모님은 제가 열심히 노력할 때마다 아이스크림을 사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지금도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웃음)
모스크바 음악원의 엘리소 비르살라제(Eliso Virsaladze) 문하에서 공부했고, 알렉산더 사츠(Alexander Satz)에게 개인 교습을 받으며 성장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두 분 모두에게 좋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서로 음악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달랐는데, 저는 각각의 좋은 점을 흡수하기 위해 노력했죠. 2명, 3명, 이렇게 다른 스승을 모시는 건 음악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아니스트로서 곡을 해석하고 연주할 때 무엇에 중점을 두는 편인가요? 어디서 무엇을 연주하건 가장 중요한 건 ‘음악’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를 압도하는 에너지는 기술적 요소가 아니라, 위대한 작곡가의 음악 세계를 알리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오죠. 저는 작곡가의 아름다운 음악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또 그들과 음악을 함께 즐기고 싶습니다.
처음 연주를 시작한 당시와 현재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지휘자 없이 협주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오케스트라 실내악과 함께 연주하는 걸 즐기는데, 조만간 지휘자 없이 협주곡을 연주하는 많은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또 종종 피아노의 위치를 옮겨 오케스트라 ‘중간’에서 연주하기도 하죠.
‘중간’이라뇨? 그렇다면 관객이 무대에 선 당신을 잘 볼 수 없을 수도 있는데요. 그 때문에 몇몇 관객은 제 손놀림을 볼 수 없다고 불평하곤 합니다.(웃음) 하지만 이건 더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한 선택이죠. 실내악은 교감이 중요한데, 피아노의 위치를 옮기면 오케스트라 단원을 더 잘 보고 들을 수 있거든요.
20여 년간 벨기에를 비롯한 여러 서유럽 국가에서 지냈지만, 3년 전 가족과 함께 고향인 모스크바로 돌아갔습니다. 모스크바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요. 사람은 결국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향에 돌아오니 언어적 측면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감정과 문화, 생각을 밀접하게 공유할 수 있어서 만족스럽습니다.
쉴 때는 주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나요? 친구들을 만나고 좋은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죠. 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항상 그렇지만, 음악 외에도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아요.
올해 계획을 알려주세요. 저는 항상 특별한 목표나 계획을 세우지는 않아요. 늘 그래왔듯이 러시아와 유럽, 다른 나라에서 피아노를 연주할 겁니다. 그 외에 새로운 건 없어요.
마지막으로 이번 내한 공연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 한국 관객이 준비해야 할 게 있을까요? 공연 전에 술을 한잔 마시는 것도 음악을 즐기기 위한 좋은 방법입니다.(웃음) 저는 위대한 작곡가의 작품을 관객이 만끽할 수 있도록 전달하려 합니다.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제공 마스트 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