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골의 신비
디지털 음원이 지배하는 시대지만 여전히 ‘오르골’의 소리는 울리고 있다. 기계식 시계와 유사한 원리로 태엽만 감아주면 반영구적으로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오르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다는, 영혼을 감싸주는 그 소리. 판도라의 상자처럼 신비로운 오르골 상자를 열었다.

1 토닌 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는 포터의 디스크 오르골, 크리스털 2 루즈의 프란카스텔
오르골은 18세기 스위스의 시계 제작자가 고안한 자동 연주 기구다. 네덜란드어 오르겔(Orgel)이 변형된 것인데 영어로는 뮤직 박스(Music Box)라고 한다. 감은 태엽이 풀리면서 금속 핀을 박은 원통을 돌리면, 이것이 음을 내는 빗 모양의 금속 조각을 튕겨서 음악을 연주한다. 오르골의 기원은 시간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중세 교회의 시계탑으로 알려졌다. 이 원리를 이용해 1780년 폰즈 지방의 시계공 자케 드로 형제가 최초의 오르골로 기록된, 새 울음소리를 내는 ‘노래하는 새’를 만들었다. 1796년 제네바 시계 제조공 앙투안 파브르가 앞서 말한 것보다 정확하고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는 기계장치를 고안하면서 본격적으로 오르골 문화가 태동했다.
오르골의 등장은 당시에는 일대 혁신이었다. 이전까지 음악은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라이브연주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절이었기에 일반 대중에게 음악 감상의 기회는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사실 오르골 역사 초창기에도 실제 오르골을 향유한 이는 거의 부유층이었다. 실린더 형태의 오르골을 담배 케이스, 보석 상자 등에 장치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러나 디스크 오르골이 탄생하면서 빠르게 수요를 채워나갔다. 디스크 오르골은 LP 플레이어를 연상시키는 생김새로 LP판을 교체하듯 디스크를 바꿔가며 음악을 들을 수 있다. 디스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 오르골 시장이 확대되었으나 오르골의 전성시대는 한 세대를 넘지 못했다. 1877년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과 제1차 세계대전, 미국 대공황 등으로 급격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주둔하던 미군이 승전 기념품으로 유럽에서 오르골을 사가며 잠깐 빛을 보는 듯했지만 라디오 보급의 영향으로 1960년대에 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럼에도 소신 있고 실력 있는 일등만은 살아남았다. 오늘날 오르골 시장은 전통을 고수하는 최고급 수공예 오르골과 과거에 만들었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보유한 앤티크 오르골, 일본과 중국산의 보급형 오르골(이들 중 일부 저가 제품은 전자 칩으로 작동해 오르골의 본질과는 차이가 있다)로 나뉜다.

1 최초의 오르골로 기록된 루즈의 노래하는 새 2 루즈의 매직 3 루즈의 오르골 제작 과정
지금 문득 오르골에 관심이 생겼다면, 입문자든 혹은 경험자든 루즈(Reuge)의 제품부터 만나야 한다. 1865년 스위스의 생크루아 지역에 설립한 이 회사는 스위스에서 처음 태동한 실린더 오르골의 전통을 유지하며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최고급 오르골을 선보이고 있다. 80여 개의 정교한 부품을 직접 손으로 조립하는 것은 물론, 오르골의 케이스 제작과 상감 장식 등의 디테일까지 전부 사람의 손을 거쳐 세심하게 만들고 다듬는다. “현대의 오르골은 그저 음악을 듣는 악기나 기계가 아닙니다. 유년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이 소리는 정서적 안정과 기쁨을 주며, 누군가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루즈를 공식 수입, 판매하는 럭스포레스트 김두환 대표의 말이다. 스위스 정부가 국빈 방문한 달라이라마와 교황 베네딕트 16세에게 루즈 오르골을 선물했고, 카타르 국왕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위해 노래하는 새를 주문했다. 그러나 굳이 이런 거창한 예를 들지 않더라도 아빠가 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주는 ‘의미 있는’ 선물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보탰다. 호두나무를 통째로 잘라 만든 루즈의 로베르송(L’Auberson) 144노트 오르골로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 중 ‘몰다우’를 감상했다. 실린더형 오르골은 실린더와 현(빗 모양의 금속 편)의 크기에 따라 음의 깊이와 곡의 길이가 달라지며 이를 노트로 표기한다. 가장 슬림한 형태가 36노트로 45초짜리 1곡만 담긴다(물론 태엽의 길이에 따라 수십 분간 반복 재생한다). 72노트가 가장 일반적인데 총 3곡이 들어가며 1분 50초간 연주를 한다(이 또한 반복 재생이다). 144노트는 72노트와 곡 수는 동일하지만 한층 풍부한 스테리오 사운드로 감상할 수 있다. 피아노와 가장 유사한 악기가 루즈 오르골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그 감동을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루즈의 오르골은 소리도 소리지만, 콘솔이나 테이블 위 장식품으로도 손색없다. 특히 마드로냐나무를 화이트 컬러로 염색하고 상감기법으로 요정 같은 소녀를 그려 넣은 후 진주조개를 박은 매직(Magic)은 여성이 특히 선호할 만한 디자인. 프란카스텔(Francastel)은 스테인리스스틸과 유리의 모던한 조합이 돋보이는데, 확실히 우드 케이스보다 소리가 명료해 또 다른 감상을 전해주었다. 사실 루즈가 롱런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전통과 함께 현대성도 갖추었다는 것. 시계 브랜드 MB & F와 협업해 SF 영화 <스타워즈>에 등장한 우주선을 연상시키는 미래적 디자인의 오르골(뮤직 머신)도 만들었다. 바젤월드 기간에 선보이는 그해의 신제품은 시계와 기계의 미학을 사랑하는 이들의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아리랑을 들을 수 있는 포터의 트윈 디스크 오르골
토닌갤러리(Tonin Gallery)에서는 또 다른 오르골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2010년 오픈해 최근 삼성동에서 한남동으로 옮겨온 이곳에서는 100년이 훌쩍 넘은 앤티크 오르골과 70년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 포터(Porter)사의 디스크 오르골을 만날 수 있다. 120년 된 독일 심포니온사의 ‘로코코’ 오르골은 앤티크 잡지의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귀한 아이템. 스위스 스텔라사의 오르골은 디스크 오르골이지만 실린더 오르골의 기술을 응용해 그 이름처럼 밤하늘의 별 같은 영롱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110년 된 미국 올림피아사 오르골은 디스크를 눕힌 것이 아니라 서서 돌아가는 업라이트 방식인데, 스탠드형 가구로 디자인해 한층 웅장하고 경건한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다. 포터의 제품은 현재도 생산하는 만큼 원하는 디스크의 주문 제작이 가능하다. 트윈 디스크 오르골로 ‘아리랑’을 듣는 경험이 여기에서만 가능하다. 토닌갤러리에서는 오르골 테라피도 진행한다. 오르골은 3.75Hz의 초저주파부터 10만 Hz의 고주파까지 발생시킨다. 이 넓은 영역의 음파가 뇌간을 자극해 자율신경계의 활동을 원활하게 하고 호르몬 분비를 도우며 우울증과 두통, 각종 질병 치료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서는 20년 전부터 이러한 오르골의 치유 효과에 주목해 각종 연구와 임상시험을 진행해왔다. 토닌갤러리의 황영옥 대표와 그녀의 딸인 큐레이터 하야시 마사키는 일본의 오르골 테라피스트 요시카쓰 사에키(Saeki Yoshikatsu) 선생에게 사사받고 2010년 테라피스트 자격증을 획득했다. 단순히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음파, 곧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테라피용 침대에 누워 오르골 소리를 듣는 것으로 테라피가 이뤄진다. 144노트의 실린더 오르골에 담긴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들었다.
‘치유’라는 것은 말과 글로는 설명할 수 없다. 오르골은 무조건 들어봐야 한다. 그 상자가 열릴 때, 자신도 모르고 있던 마음의 귀가 열리는 순간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에디터 이재연(jyeon@noblesse.com)
사진 이창재